나는 천국을 보았다 나는 천국을 보았다 1
이븐 알렉산더 지음, 고미라 옮김 / 김영사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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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천국을 보았다
이븐 알렉산더 / 고미라 옮김 / 김영사 / 251

 

임사체험에 관한 이야기는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많은 경험담과 이에 대한 연구서가 있고 사후세계나 영혼에 대한 이야기 또한 식상할 정도로 거론되는 실정이다.  이 방면에 대한 조예가 전혀 없지만  얼핏 생각나는 책만도 고전인 <사자의 서> 이집트와 티벳편이 있고 스베덴보리가 쓴 <천상여행기>, 다치바나 다카시의 <임사체험> 등등이다.

 

모르는 분야이기는 하지만 관심만큼은 매우 커서 항시 궁금하게 생각해왔다. 어떤  것이든 종교가 있는 이라면 영혼의 존재를 의심하지 않는다. 19세기 근대과학의 형성기에 유물론이 제창된후 과학이라는 탈을 뒤집어쓴  유물론이 인간영혼의 존재를 부정했고 지금까지도 그 영향으로 의식은 뇌의 작용일 뿐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오히려 뇌과학이 새롭게 등장한 요즘은 그렇게 믿는 사람이 더 많아졌는지도 모른다.  이 책은 의학박사면서 영혼의 존재를 믿지 않았던 한 평범한 의사가 혼수상태로 7일간 있었던 상황을 정리한 책이다.

 

급성 박테리아성 뇌막염으로 갑자기 쓰러져 7일동안 혼수상태로 지내며 의료진으로부터 사망선고를 기다리던 의사 이븐 알렉산더는 어느날 기적적으로 깨어났다. 그는 혼수상태에서 신을 만나고 왔는데 그 기억이 너무 생생하여 글로 남긴 것이 바로 이 책이다. 자신이 겼었던 기억이 뇌의 환각작용이 아님을 의료적 과학적 지식을 이용하여 증명하고 꿈같은 몽환상태에서 보고 듣고 느낀 것이 바로 신이라는 것을 깨어난 후 알게되었다는 것이다. 자신도 의사로서 환자들이 죽음을 앞둔 상태에서 겪는 이야기에 너무나 무심하게 대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신과의 접촉이 과학에 대치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과학적으로 증명될수 있다는 주장과 함께.

 

독자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이책을 읽어가면서 떨리는 감동을 주체할수 없었다.  그가 전하는 신의 세계와 신의 모습은 다름아닌 사랑이었다. 영혼이 겪은 최초의 상태는 진흙탕같은 혼돈의 상황에서 시작되는데 그 속에서 빛과 소리에 의해 인도되고 천사를 만나 게이트를 지나 근원(the core)으로 향하며 신을 만난다. 그의 표현에 의하면 감각으로 느끼는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느껴지고 알게된다고 한다. 그가 들은 신의 소리는 옴(om)이라, 그는 신을 옴om으로 부른다. 그는 기독교의 하느님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가 천사로부터 들은 말은 - 말로된 언어가 아니었다고 한다 -


“그대는 사랑받고 있고 소중히 여겨지고 있습니다.”
“그대는 두려워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대가 저지를 수 있는 잘못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 세마디인데 이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그대는 사랑받고 있습니다.” 이것이라 한다.  이 사랑이 가장 강력하고 가장 순수한 형태는 질투하거나 이기적이지 않은 조건없는 사랑이라고 한다.

 

그의 영혼은 혼돈의 세계에 머물면서 그 자신, 즉 인간은 신성(神聖)의 일부이며 그 무엇도 이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는 것을 느꼈으며, 여러 가지를 알게되었지만 이를 언어로 표현하기는 너무 어려워 마치 침팬지가 하루동안 인간이 되는 경험을 한뒤 돌아가 침팬지들에게 인간세계의 모든 것을 전해주려는 것과 똑같다고  표현했다.

 

인간의 삶이란 신성을 향해 성장하는 일이고 뇌는 지구의 필요에 의해 진화한 지구의 생산물이며 선택하는 주체는 바로 영적인 존재라고 했다.  참다운 영적 자아는 물리적 세계에서 인식되는 그 무엇보다도 실재하며 창조주의 무한한 사랑과 신성하게 연결되어있다는 진실을 아는 것은  사랑과 연민을 실천하는 방법에 의해 가능하는 것이다. 

 

뒤에가서는 의학이론과 물리학이론을 동원하여 자신이 느낀 신의 세계가 동덜어진 것이 아님을 증명하려 한다. 평행우주론은 이런 저런 책을 통해 자주 접했는데 여기서도 평행우주를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양자역학을 통해 나와 대상 즉 나와 우주가 떨어져있는 상이한 존재가 아님을, 다만 상이한 진동수로 존재하고 있음을 역설하고 우주의 모든 입자속에 신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간곡하게 주장한다.

 

진리에 접근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임사체험을 해야할까? 아니다. 기도나 명상을 통해 자신의 의식 깊숙이 들어가야한다고 말한다.  책의 마지막 장에서는 자신의 임사체험을 통해 세상을 좀더 좋은 곳으로 만들기위해 영적도움을 줄 수 있는 단체인 이터니아를 설립했다는 소식을 담았다. www. Eternea.org

 

나 또한 사랑이 대단히 큰 힘을 갖고 있으며 종교의 본질이 사랑임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나는 머리로만 알고 있다. 가슴으로 빈 마음으로 영혼으로 알고있지는 못하다. 이 책을 보고 좀더 마음을 열어 우주의 모습을 바라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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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재수필 그릇꿈
이양재.김향희 지음 / 분홍개구리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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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재수필 그릇 꿈
이양재 김향희 / 분홍개구리 / 191

무엇을 하고있든 꿈을 꿀수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88만원 세대든 사오정이든 꿈을 꿀수만 있다면 괜찮다. 이시대 명강사라는 김미경이 운집한 젊은이들 앞에서 촛불은 밤에들고 낮에는 노력하라고 꿈을 위해 노력하라고 했다는데 맞는 말이다. 하물며 나이들어서도 꿈을 가질수 있다면 행복한 사람이 아닐수 있겠는가. 더 이상 꿈을 못 꾸는 사람이 불행한 사람이다.  그릇 꿈을 꾸는 도예가 이양재는 엄청 행복한 사람이다.  얼마나 그릇을 사랑하면 이몽룡이 춘향이 꿈꾸듯 그릇꿈을 꾸는가.

 

도예가 이양재가 책을 냈다길래 여기저기 서점을 찾아다녔으나 결국 못사고 인터넷으로 책을 구했다. 동네서점에는 주문조차 할수 없다니 출판유통 구조가 좀 이상하다 싶다. 그렇게
기다려서 받은 도공의 책은 흰바탕에 파란 빛 청화백자 스타일.

 

그런데 읽다보니  이양재의 저술이 아니고 이양재와 김향희의 대담록 정도되는 수필이다.
프롤로그와 에필로그가 있고 네 개의 주제로 나눠 서술되어있다. 일상, 정성, 인연, 마음.
곳곳에 이양재의 도자작품을 소품처럼 배경으로 활용했다. 책 자체가 작품처럼 느껴진다.

 

도예가 이양재는 우리나라 생활자기의 중견작가? 뭐라 불러야할지? 대가라 해도 지나치지는 않은 듯 한데 나이가 좀 어중간하고. 권위자는 학자에게 어울리고. 중견이기엔 좀더 나간 것 같은데.

홍대 디자인학과를 다니다 도예과로 재입학해 도자기를 공부하고 영국에서 공부한 이야기며 저지르고 떠난 배낭 세계일주며 평생의 반려를 만난 이야기들이 그의 도자철학과 함께 녹아있다.

 

생활자기는 감상이 아니라 일상에서 사용하는 예술품아닌 예술품인데  주로 사용하는 계층이 주부들이라서 그런지 아는 사람에게만 알려져있는 듯 하다. 이양재는 몰라도 로얄 코펜하겐을 모르는 사람이 있겠나. 조선 도공을 끌고와  세계적 도예대국이 된 일본만 해도 도자기가 일상생활 전반에 두루 통용되고있는데 한국이 그렇지 못한 것은 경제사정도 있겠지만 미적 탐구나 예술적 가치에 대한 동경이, 비싼 것에 대한 전시욕구보다 훨씬 못하기 때문이다.


일본국보인 이도다완은 조선의 막사발이다. 그런 사기 질그릇에서 투박하고 자신을 낮추는 선적(禪的) 다도정신을 배울수있는 자세가 있어야 과일접시 하나에도 자신의 미적 관념을 담아 손님에게 내놓을수 있는 것이다. 도자그릇은 과시가 아닌 선다일여에서 나온 자기표현이다.

 

조선의 백자는 완상용도 있지만 대개는 선비정신을 담은 일용의 그릇으로 사용되었다. 유교에서는 그릇을 군자로 비유했는데 가장 좋은 그릇은 제사에 쓰는 그릇이었다.  백자는 더 나아가 분청이나 청화백자로 발전했고 지금 분청을 좋아하는 사람도 참 많지만 나는 깨끗한 백자를 좋아한다. 이양재는 백자에 자신의 특기인 청화채색의 드로잉을 더해 독특한 양재스타일의 도자를 완성했다. 듣기로는 일본에서도 고정팬층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다 읽고나니 아쉬움이 없지 않다. 동양적 전통에 사십이 넘으면  자서전을 쓸수 있다. 이양재는 오십이 넘었으니 오십자술을 써도 되었다. 이 책처럼 대화체도 좋겠지만 작가자신의 글로 완성했어도 좋았을텐데. 좀더 인생 경험을 녹여 현재의 도예관이 나오게된 계기를 상세하고 진솔하게 버무렸으면 어땠을까. 간간이 나오는 오타도 옥의 티.

 

이제 이 책을 계기로 다시한번 과거를 돌아보고 새롭게 갈길을 정비하는 인생의 중간기지로 삼아 생활도예의 대가 이양재를 만나게되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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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닝 - 20대 이후의 삶을 성장시키는 진짜 공부의 기술
김현정 지음 / 더숲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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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닝
 20대이후의 삶을 성장시키는 진짜 공부의 기술

김현정 / 더숲 / 219

 

전통시대 사회질서이자 종교로 오랫동안 기능해온 유학에서는 배움의 목적이 무척 명료하게 정의되어 있다. 수기치인修己治人이다. 그래서 유학자는 배운 바를 과거시험이나 기타의 방법으로 세간에 알리고 관직에 나아가 지닌 경륜을 펼쳐 경세제민해야 했다. 때문에 관직에 나가지 못한 유자들은 아직도 배움의 초입에 있다는 뜻으로 어릴 유자를 써서 유학幼學으로 자신을 표현했다. 스스로 관직에 나가지 않아도 마찬가지니 위패에는 직함대신 ‘현고學生부군’으로 표기했다. 조선중후기에 혼탁한 관직을 피해 산골에 묻혀살던 선비들은 스스로를 수기만하는 산림처사로 자처했다. 그러니 우리 조상들은 평생을 배움의 과정에 있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물론 처사들의 공부는 우주의 질서에 대한 것이었으니 지금의 순수학문개념이다.

 

이 책의 제목을 보고 그런 인문학적 공부의 일환이려나 생각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는데 앞부분을 조금 읽고나서 학문이 아닌 자기계발서임을 알았다. 그러나 다 읽고나니 옛선비들의 공부와 대동소이하다 해야되나.

 

러닝(Learning)이라는 제목의 이 책은 무엇 때문에 공부를 하는지 어떻게 공부해야 하는지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에 대한 총체적인 학습론이다. 크게보면 학교공부까지도 포함하지만 주내용은 사회진출 이후에 맞닥뜨리는 모든 배움행위에 대한 지침이라고 하겠다. 서문에는 책의 대상을 이리 규정한다. “이 책은 보다 가치있고 실용적인 삶을 살고자하는 모든 이들을 위한 것이다. 근면성실보다 효율성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위한 책이기도 하다.”  조금 거슬리기는 하지만 무턱대고 방향없이 공부하는 행위를 지양하자는 의미일 것이다.

 

히로나카 헤이스케의 <학문의 즐거움>도 떠오르는데 왜 공부가 아닌 러닝이라 제목을 택했는지 모르겠다. 표지의 소개글에는 Now Learning, Not Studying 이라 되어있다. 일반적으로 볼 때 런보다 스터디가 적극적 개념인데 그 양자에 대한 구분이나 개념화는 나타나있지 않다. 다만 러닝의 의미는, ‘현 상태에 문제의식을 가지고 새로운 지식이나 경험을 습득한 후 그를 통해 깨달은 바를 미래의 행동에 적용시키는 것’으로 정의했다. 그래서 암기,경험,공부를 포괄하는 큰 개념이라고 한다.

 

러닝은 다시 다음 세가지 개념으로 정리된다. 자신이 무엇을 알고 모르는지 인식하는 메타인지, 자신이 하는 행위의 목표를 인식하는 시스템 사고, 과거현재미래의 연결 속에서 이루어지는 시간의 연속성.


그래서 책 전체를 네가지 파트로 나누었다. 1편은 21세기의 키워드 러닝, 2편은 어떻게 러닝할 것인가, 3편은 무엇이 러닝을 가로막는가, 4편은 나를 만드는 러닝이다.  저자는 개인이나 부모, 기업에 모두 러닝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인생에서 무엇이 중요한 것인지 무엇을 배워야하는 것인지 총체적으로 판단할수 있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우리에게 익숙한 학교나 암기, 평가 만이 학습의 다는 아니라고 한다. 발상의 전환이 필요한데 전문가인 메지로우교수의 정의에 의하면  ‘러닝은 예전에 가지고있던 어떤 경험의 해석을 지금 일어나는 경험을 바탕으로 수정 보완하면서 미래의 행동지침으로 사용하는 과정'이라고 한다. 즉 일상의 매순간이 학습이 될수도 있다.  이런 경우 과거 실패의 경험이 좋은 약이 되기도 하는데 저자는 그런 실패로부터 많은 생각을 하고 많은 학습이 일어난다고 본다. 

 

책에는 개인 뿐 아니라 조직에 관한 학습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현대인의 생활에서 조직없이 이루어지는 일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개인에게 국한될 때는 옛적 선비들의 경우와 비슷하겠지만 조직의 영역으로 확대되면 자기계발과 코칭이 된다. 저자는 코칭이 바로 학습을 도와주는 일이라고 말한다.

 

그동안 자기계발서나 경영이론서 종류를 적지않게 읽었는데 가장 맘에 와닿지 않는게 외국인이 쓴 책이고 나머지도 크게 감동받을만한 내용은 없었던 듯 하다. 퍼플 카우만 좀 그럴 듯 하고 대개는 비슷한 내용으로 생각된다. 실행력에 집중하라가 좋은 책이다. 이 책은 관점을 달리해서 본 처세서고 경영서로 보인다.  이 정도 책이면 주위에 추천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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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희망, 사회주의
마이클 해링턴 지음, 김경락 옮김, 김민웅 감수 / 메디치미디어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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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희망 사회주의
마이클 해링턴 지음 / 김경락 옮김 / 409

 

뒷표지에 인용된 감수의 글에보면 “정치와 운동의 차원에서 진보가 궤멸하다시피한 한국의 현실에서 마이클 해링턴의 사회주의에 관한 논의는 우리가 어떻게 실패에서 배울 것인가에 눈뜨게 한다.” 라고 써있다.  진보의 눈으로 보면 그렇게 생각될지 몰라도 나처럼 보수적인 입장에서 본다면 그렇지 않다. 국회에는 진보라는 이름을 단 정당이 들어가 활동하고 있고 민주당과 합쳐진 새정치연합에도 진보를 자처하는 의원들이 많이 소속되어 있다. 비록 현실정치에서는 진보주의가 큰 세력을 형성하지 못하고 있다해도 사회문화 노동계를 보면 우리나라는 상당히 ‘진보’적인 나라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여기서의 진보란 사회주의의 순화된 표현이다.

 

이 책을 보고는 잠시 얼마전에 세상을 떠난 영국의 사회주의 학자 스튜어트 콜의 부음기사를 떠올렸다. 영미권에 많지않은 사회주의 계열의 학자들이라 그만큼 반향이 있는 것이리라. 그런데 대체 사회주의란 무엇인가. 책을 읽는 내내 사회주의에 대한 분명한 정의나 해석을 마주칠수 없었다. 저자 스스로도 광범하게 얽히고 변화되어 왔기 때문에 쉽게 정의할 수 없다고 까지 한다. 책에 등장하는 개념으로 보면 마르크스주의에서 사회민주주의, 뉴레프트, 케인즈주의 복지국가가 모두 사회주의의 범주에 들어간다. 그런데 공산주의와 현실 사회주의 - 소련은 실패라하니 예외로 치더라도 중국과 북한의 경우 - 국가의 체제와 관련해서는 별 언급이 없다.

 

이 책은 주로 사회주의의 본령인 경제문제에 집중되어 있다. 원제는 Socialism : Past and Future 다. 이 제목은 여러 가지를 시사하고 있다 생각된다. 과거와 미래만 있고 현재가 없기 때문이다. 현재는 과거의 결과고 미래는 현재의 결과인데 저자는 미래를 너무 낙관하고 있는 것일까.

 

책은 모두 9개의 장으로 되어있다.  서두에서 저자는 사회주의에 대한 세가지 가설을 제시하고 다음으로 과거 사회주의가 겪어온 길을 반성적으로 고찰하고 있다. 사회주의 여러 유형과 가짜 사회주의, 유토피아주의, 복지국가의 과제, 제3세계의 필요성. 그리고 말미에 사회주의의 구조적 논점을 살핀다. 즉 사회화, 시장이냐 계획이냐, 점진적 발전에 대한 논의 등.

 

사회주의의 정의가 아닌 저자가 생각하는 사회주의의 모습은 분명하고도 간결하다. “자유와 정의正義를 위한 희망” “연대와 자유, 사회정의를 위한 주장”
이것이 목표라면 이런 미래의 실현을 위해 동참하지 않을 사람이 몇이나 있겠는가.
나는 다만 인간을 자본의 유무로 평가하는 방식이 싫을 뿐인데 한국사회의 후진적이고 교조적 사회주의자들이 모두 다 이 책을 꼼꼼히 읽고 무엇 때문에 사회주의운동을 하는건지 목표를 분명하게 자각했으면 좋겠다.

 

저자는 분명히 말한다.  아래로부터 사회를 바꿔나가는 세력이 노동계급은 아니며, 혁명적 연대를 통해 형성되는 동질적이고 단일한 노동계급은 현실세계에선 존재하지 않는다고.

 

그럼 사회주의는 완고하거나 변형불가능한 것 같지 않은데, 과거의 모습이 여러갈래인 것은 사회주의를 잘못 이해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현재 저자의 사회주의와 가장 맥락이 같은 것은 북유럽의 사회민주주의인 듯 하다. 특히 저자는 책의 곳곳에 스웨덴식 사회주의에 대한 애정을 보이고 있다. 그렇다면, 독점과 이윤 극대화를 추구하는 자본주의의 속성을 변화 수정할수 있다면, 점진적 사회주의와 비슷해지는 것은 아닐까. 예를들어 공유개념의 확대와 사회적 기업, 인간의 얼굴을한 자본주의 등등의 개념이 자본주의의 변화를 가능케할 수는 없는걸까. 


     
사회주의의 출발을 다루면서 여러 유형의 사회주의를 소개하는데 마르크스가 정리한 초기 사회주의 개념은 무정부주의와 사뭇 흡사하다. 그런데 저자에 의하면 카우츠키도 힐퍼딩도 정작 사회주의 국가가 무엇인지 몰랐다고 한다.  이것은 매우 변명스럽게 보인다.  여러 방법으로 시도했지만 정작 성공한 적은 없었다. 그러니 미래가 답이다 라는? 그러나 한편으로 “사회주의자들이 자신들의 핵심목적을 정의하는데는 실패했지만 인류역사에서 어떤 대중운동보다 더많은 성취를 이뤄냈다”는 모순적 사실도 지적하고 있는데 이는 부인할수 없는 사실일 것이다.


과거의 사회주의를 다루면서 국유제 계획경제체제인 독재공산국가는 역사상 어떤 사건보다도 사회주의의 참뜻을 왜곡했다고 한다. 그는 공산주의 사회를 사회주의가 아닌 집산주의라고 이해한다. 소련의 경우다. 그는 이를 가짜 사회주의라고 부른다. 즉 “오늘날 자본주의적인 기술과 규칙을 갖고있지만 단지 마르크스주의자의 지배를 받는 공장사회”로 규정한다. 스탈린은 농민과 노동자를 위한다는 사회주의 이름하에 거꾸로 유례없을 정도로 농민 노동자를 착취하여 국영산업화를 이루어낸 분명한 독재체제라고 한다.

 

유토피아주의를 다룬 장에서는 케인즈주의를 자본주의를 도입한 사회주의정부라고 말한다. 그러나 유럽 사민주의와 마찬가지로 복지국가를 추구한 이런 움직임은 정치와 경제가 분리되어 운용됨으로써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러나 복지국가를 자본주의의 한 국면으로 이해한다면 사회주의의 재부상 가능성을 생각할수도 있을 것 같다. 이렇게 사회민주주의 실패와 생산성하락, 실업의 증가는 레이건과 대처의 집권을 가능케했다. 이를 중앙집권적 권위적 정부로 본다. 이를 통해 개인의 자유와  시장, 부유층을 위한 정책으로 회귀했다는 것이다.

 

앞으로 무엇을 해야하나 라는 장에서 그는 현재의 세계를 고려해야한다고 말한다. 즉 상호의존적 세계경제체제의 현실을 고려해서 방향을 설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본의 국제화가 미국 또는 다국적기업의 세계지배를 불러왔으니 일국사회주의론 불가능하며 새로운 국제경제기구의 설립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지역대표체제로 인구와 경제규모에 관계없이 같은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체제가 필요하다고 한다.

 

계획이냐 시장이냐의 이분법에 관해서는 중요한 것은 시장이 존재하는지가 아니라 어떤 종류의 시장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가에 있다고 주장한다. 무능이나 비효율을 경계하고 시장원리 자체는 잘못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민주적이며 효율적인 방법으로 계획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시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말미에서 그는 단일계급에 의한 세계혁명론을 부정한다. 선진 자본주의국가와 복지국가 체제는 많은 새로운 계급을 만들어냈고 또 분화시켰다. 청소년과 여성도 그 일부다. 또 경제결정론의 오류를 지적하면서 상부구조가 중요해지는 마르크스주의 방법론자체의 변화를 말한다. 지난 백년에서 교훈을 얻었느냐 못 얻었느냐가 앞으로의 갈림길이 된다고 말하며 책을 마친다.

 

공감과 아쉬움이 다 남는다. 그가 주장하는 새로운 세계, 연대와 자유와 사회정의가 숨쉬는 세상을 만들기위해 나부터라도 적극 노력할 것이다. 자본이 인간보다 중시되는 자본주의의 폐단을 없애려는 마음은 이념에 구애될수 없다. 인간이 모든 가치에 선행하는 최종 목적임은 누구에게나 부정할수 없는 사실이다. 마르크스주의를 종교적 신념처럼 여기는 많은 사람들에게 이 책이 노선수정의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실제로 그는 구좌파와 신좌파 모두에게 공격을 받고있다고 한다.
문화분야에 대한 중시와 상부구조 등 마르크시즘 자체의 변화요구 또한 작은 충격이었다.

 

아쉬움은 경제철학과 정책에만 집중한 나머지 현실 사회주의 국가에 대한 분석이 부족했다는 점이다. 특히 사회주의체제를 고수하고 있는, 또는 그렇다고 주장하는 중국과 북한에 대한 언급이 너무 적었다. 북한에 관해서는 한마디도 없다. 정치가 없는 마르크스주의가 존재할수 없다. 진보가 민족문제와 분리될수 없는 한국적 현실에서 북한에 대한 분석이 없는 점은 이책의 약점이기도 하다. 박정희시대 국가주도 집산적 경제계획이 당시 사회주의 국가와 얼마나 다른지에 대한 의문도 있다. 싱가폴을 사회주의 체제로 본다면 박정희시대도 비슷하지 않을까.

 

결국 우파니 좌파니 하는 구분이 철학과 경제정의 실현의 신념이 아니라 다분히 정치권력을 둘러싼 이익갈등 때문이라는 생각을 떨칠수 없다. 진정 소외된 약자를 위한다면 주사파가 아닌 한국의 PD들은 사회를 이끌어가는 한 축이 될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너무 두서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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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테라스에서 모노노케 히메까지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45
박규태 지음 / 책세상 / 200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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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테라스에서 모노노케 히메까지

- 종교로 읽는 일본인의 마음

 

박규태 / 책세상 / 201

 

 

일본의 정객들은 늘 한일관계의 어두운 부분을 건드려 보수세력으로부터 인기를 얻으려 했다. 그러나 최근 일어나고 있는 일본 내 우경화는 이와는 달리 민족주의와 경제침체가 맞물려 근본적인 변화가 있는게 아닌가 하는 의문을 주며 지난 반세기 한일관계를 최악의 상황으로 몰아가고 있다. 특히 아베총리가 역점을 두고있는 야스쿠니 신사 참배문제는 이제 우리 한국사람들에게 익숙한 사안이 되었다. 일본은 왜 전범자들의 위패가 있는 야스쿠니 신사에 집착하는가. 종교학자인 저자는 일본에서 옴진리교사건을 접하고 야스쿠니 신사와 이 사건을 <모노노케 히메> 속의 신앙관을 원용하여 이 책을 저술하였다.

 

 

개인적으로는 그렇게 친절하고 배려심 깊은 사람들이 한일관계에서 표변하는 것을 보면 정치적 문제 외에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그 무엇이 있겠지만 대부분의 한국사람은 그게 뭔지 모르고 또 알고 싶어하지 않는다. 과거 일본영화시장을 개방할 때 많은 사람들이 문화적 예속화를 걱정하며 반대했지만 일본 영화나 가요는 우리에게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했다. 오히려 한류라는 이름으로 유명해진 우리문화 수출은 일본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우리 배우와 가수들은 지금도 일본에서 큰 인기를 얻고있으며 극성팬들은 우리나라로 건너와 연예인들의 행동 하나에 울고웃는다.

 

 

우리는 일본에 대해서 역사도 문화도 그들의 속생각도 잘 알지 못한다. 과거사는 비단 과거에 그치지 않고 현재의 정치상황과 맞물리고 영토문제로도 불붙지만 개개인들까지 그러지는 않는다. 우리는 명동에 일본 관광객이 몰리길 기대하고 역으로 일본 지역경제에서도 한국인은 귀한 손님들이다. 서로를 알아가기 시작하면 오랜 악연을 넘어 진정한 이웃이 될수도 있다. 일본 보다는 오히려 중국이 앞으로 적대적인 사이가 될 가능성이 더 크다. 역사적 지리적 이웃은 때론 갈등으로 때론 선린으로 지내왔는데 중국이건 일본이건 우리는 그들을 잘 모른다. 중국에 대해서는 막연한 호감을 갖는 이들이 많은 듯 한데 일본에 대해서는 그런 사람이 별로 없다.

 

 

그런 의미에서 일본의 역사 문화를 이해하는 한 방편으로 박규태교수의 이 책은 나름 신선했다. 신화와 종교를 통해 일본인의 의식구조를 들여다보려는 시도는 매우 좋았다고 생각된다. 일본의 신도나 천황에 대해 미움보다는 이해가 먼저다.

이 책은 일본 고대신화와 천황, 신도와 종교, 신종교와 옴진리교를 통해 일본인의 마음속을 들여다보고 뿌리깊은 간극을 넘어서고자 하는 이야기다.

 

 

저자는 모노노케 히메 이야기를 들어 책을 끝맺는다. 타자와의 동화가 아닌 타자들의 각자도생을 통해 서로가 서로를 살리는 상생이 있음을 말한다. 저자는 일본에 대해 우리가 갖고있는 여러 전제들, 즉 일본신화는 정치신화다, 절대악도 절대선도 존재하지 않는다, 종교는 원칙보다는 현실에 더 많은 가치를 부여한다, 신불습합의 부정은 파괴적 에너지로 나타났다... 등등을 넘어야할 전제라고 말한다. 굳어진 기정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 극복으로 열린 결론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주요내용

 

 

<고사기>古事記 에는 일본의 건국신인 이자나기와 이자나미가 나온다. 이자나기는 물로 부정을 씻는 의례를 통해 아마테라스(신들의 하늘 다카마 가하라高天原 주재), 쓰쿠요미(밤의 세계 주재), 스사노오(바다의 세계 주재)를 낳는다. 스사노오는 다카마가하라에서 추방되어 이즈모出雲로 가서 산신의 딸과 결혼하고 그 후손인 오오쿠니누시가 일본땅을 통치하는 지배자가 된다. - 다카마가하라의 위치는 설이 분분한데 우리나라 고령에 있었다는 믿기힘든 주장도 있다. - 그러나 신들은 아마테라스의 후손이 통치해야 한다고 생각하여 결국 통치권 이양을 받아내 아마테라스의 후손인 니니기가 3종의 신기(구슬 거울 칼)를 가지고 히무카日向 다카치호에 강림하여 그 후손이 일본을 통치한다. 곧 천황가의 시조다. 이는 천황가의 신성한 기원을 설명하기 위해 8세기에 쓰여진 건국신화다. “이 일본신화에는 신화일반에서 엿볼수 있는 보편적 테마들을 적지않게 내포하고 있다. 숨은 신, 근친상간, 세계축, 저승세계로의 하강, 금기와 위반, 단성생식, 신의 살해와 곡물의 기원, 카오스의 살해, 입문적 시련, 죽음의 기원, 부활의 모티프 등.”

 

 

아마테라스는 메이지 이후 천황제국가가 형성되면서 여성성으로 정착되었다고 한다. 이 일본신화는 우주의 기원이나 인간의 기원을 설명하지 않고 대신 국토의 기원에 대한 서술만 나온다. 또 성적 상징과 몸에 관한 담론이 많다. 저자는 형이상학적 표현 대신 눈에 보이는 결과를 우선한 일본신화에서 상상력의 자유를 본다.

 

 

일본의 독특한 종교인 神道는 문헌상 <일본서기>日本書紀31대 요메이천황의 즉위전기에 처음 나타난다. 즉 일본의 고유종교가 불교를 만나면서 비로소 체계를 갖추기 시작한 것이다. 몇차례 전환기가 있었지만 대체로 천년에 걸친 신도의 체계화를 신불습합 神佛習合이라 부른다. 신도와 불교가 일체화되는 과정이다.

 

 

13,14세기부터 신도 중시관념이 나타나고 임진난이후 주자학이 들어오면서 야마자키 안사이가 스이카신도를 창시하여 주자학, 음양도, 기학을 합해 신도를 정리하고 아마테라스의 도라 규정한다. 즉 그 후손인 천황에 대한 숭배를 강조한 것이다. 17세기들어 일체의 외래사상을 배제한 채 순수한 신도만 내세우는 사조가 나타났는데 이것이 국학이다. 모토오리 노리나가(1730~1801)에 의해 집대성된 국학은 에도후기 근왕지사들에게 강한 영향을 주어 순수하게 일본적인 것을 강조하게 되고 결국 메이지유신이후 신불분리정책으로 귀결되어 폐불훼석운동이 나타났다.

 

 

저자는 신도와 불교라는 이질적 종교가 공존하고 융합해 신불이라는 신관념을 만들어낸 현상을 용광로에 비유한다. 궁극적 절대자나 교조도 경전도 없는 신도의 관용성이 불교를 받아들여 공존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나아가 저자는 이를 일본인의 관용정신으로 보아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때 그것을 이전의 것과 동화시켜 현재화하고 과거부정 대신에 과거에 첨가시켜 축적하는 공존의 논리로 보았는데 마루야마 마사오는 이런 타자의 포용을 정신적 잡거성이라 비판했다고 한다.

 

 

신도에서는 절대적인 악이나 절대적인 선이 없고 생명력의 고갈을 악으로 본다. 고대 일본어에도 현대적 개념의 도덕적 선악개념이 없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신도의 신 가미는 어디에나 있는 모든 은덕있고 두려운 존재인데 도덕을 초월한다. <고사기>를 정리하여 신도를 집대성한 모토오리 노리나가의 사상은 일본정신을 대변한다고도 할수 있는데 그는 고사기 해석에서 실증주의적 태도와 배타적 국수주의적 태도를 동시에 나타내 양면적이란 평을 듣는다고 한다. 일본적 사고란 바로 이 양면성을 말한다. 즉 노리나가 선악의 기준은 가미의 마음(신들의 마음), 의 원리(고귀함은 덕에 의한 것이 아니라 혈통에 의한 것), 모노노아하레(사물의 마음을 헤아려 아는 정조), 즉 윤리적 판단이 아닌 미를 기준한 선악의 판단이다. 옳고 그름을 분명히 나누지 않는 노리나가의 선악관이 곧 일본의 선악관이라니 다른 나라 사람들이 천황을 신으로 섬기고 카미카제를 찬양하는 이유를 쉽사리 알기 어려운 것이다. 그런데 노리나가는 이에 더하여 외국풍의 침투 특히 중국적 사상이나 문화를 악으로 규정하고 철저히 비판했다. 그는 국학을 통해 외국풍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하여 맹목적으로 모든 중국풍을 거부하여 국수주의의 원조가 되었다.

 

 

선과 악을 뚜렷이 구별되는 객체로 보지않고 상대주의적 관점으로 해석하는 것은 일본 사상사의 한 특징이다.(신의 뜻에 합일하고 자기를 아는 것이 참된 선, 악이란 다만 본질의 결핍일 뿐:니시다 기타로)

 

 

일본의 신사는 어디가나 있고 대부분 가정에도 신단을 모시고 있다. 신사는 일본인의 생활전반에 없어서는 안될 신앙의 대상이자 생활관습이다. 사적인 영역 뿐만아니라 공적으로도 신사는 중요한 의례의 하나다. 일본인은 일생을 그리고 하루하루를 신사와 함께한다. 그런 측면에서 야스쿠니 신사에 대한 심정적 동의는 정치적 문제라기 보다는 원령을 위로한다는 일본의 전통적 신앙에 가깝다.

 

 

서기 538년 백제에서 전래된 불교는 곧 호국불교로 정착하여 고쿠분지國分寺 계획의 일환으로 나라에 도다이지가 세워지고 전국에 중점 사찰이 건립된다. 헤이안 후기를 지나며 민중불교가 성장하여 가마쿠라 신불교운동이 일어난다. 호넨의 정토종은 칭명염불을 통해 극락왕생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오늘날까지 일본인이 가장 많이 믿는다는 정토진종을 창시한 신란은 호넨의 제자로 박해를 피해 환속하여 속인으로 지냈다. 신란의 사상은 매우 특이하다. 신란은 인간을 어리석은 존재로 보아 신심과 노력, 능력도 없다고 보았다. 오직 반성과 인간의 죄에 대한 철저한 자각이 있어야 한다 했는데, 인간의 죄란 기독교의 원죄 같은 것이 아니라 범부로서의 인간에 대한 자의식, 번뇌 등에 대한 절망을 말한다. 그래서 구원에는 절대타력(염불에 의한)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선한 사람도 왕생할 수 있는데 하물며 악한 사람이야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악인도 왕생하는데 선인이야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라는 말은 잘못된 것이다. 자력으로 선을 행함이 아닌 타력에 의지한 칭명염불만이 아미타불의 본뜻이다.” 신란 당대의 악인이란 살기위해 어쩔수 없이 계율을 범하고 죄악을 끊기 어려운자,. 직업 때문에 사회에서 소외된 비천한 피차별민을 가리킨다. 이렇게 악인이라야 구원받는다는 믿음을 악인정기설惡人正機說 이라한다. 신란의 주장은 도덕적 선악의 문제를 넘어 사회경제적 함의를 담고있는 개념인데 여기서 더 나아가 선이든 악이든 모든 것을 아미타불의 서원에 맡기고 다른 선을 일체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을 천명쯤 죽이면 반드시 정토에 왕생한다는 역설의 성립도 가능하게 된다. 이는 극단적이고 비현실적인 비유였지만 현대 일본사회에서 이 역설은 옴진리교 사건으로 현실화되었다.

 

 

니치렌은 법화경을 절대적으로 신봉하여 가마쿠라 막부에 염불을 금지하고 법화경을 신봉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로인해 박해를 받았지만 니치렌 일련종의 특징은 개인구제보다도 법화경을 통한 사회와 국가 개조로 이상국가를 실현한다는 국가주의다. 이는 또 후대에 창가학회와 입정교성회 등의 신종교로 나타났다.

 

 

선종은 에이사이의 임제종, 도겐의 조동종으로 발전했는데 공안 중심의 한국불교와 달리 조동종은 좌선과 수행을 중시한다. 도겐의 저서 <정법안장>正法眼藏은 일본인이 쓴 최고의 철학서라는 평을 받는데 이 안에 제법실상諸法實相이라는 장이 있다. 이는 구마라집이 번역한 용어인데 여러 현상들의 참된 모습을 말한다. 諸法實相은 대립개념인데 일본에서는 이를 제법은 실상이다라고 해석했다. 그런데 도겐은 더 나아가 실상은 제법이다라고 풀었다. 그러니까 희로애락으로 가득찬 이 세계가 곧 실상(실재)이라는 것이다.

 

 

이런 현실긍정 태도는 중세 일본 불교 곳곳에서 나타나는데 요컨대 일본인에게는 주어진 환경세계와 현실 및 모든 객관적 조건을 그대로 긍정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일본불교는 인간의 욕망을 긍정하는 태도로 이어지고 따라서 육식,음주,여색에 관한 계율을 일찌감치 파기했다. 메이지유신 이후 대부분의 일본 불교종파는 계율에 구애받지 않는다. 이것이 진정한 불교인지는 논란거리인데 현대 일본불교는 신앙의 대상이라기 보다는 의례나 전통생활의 일부로 사람들 사이에 남아있다.

 

 

기독교도 한국보다 먼저 일본에 전래되었지만 뿌리내리지 못하고 결혼식을 위한 로맨틱한 종교 정도로 여겨지고 있다. 그 이유중 하나는 근세일본의 철저한 기독교탄압이 있었고 국가 신도체제에서 천황의 종교적 권위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루야마 마사오가 말했듯 일본의 관용적 사상전통 및 정신적 잡거성을 기독교와 마르크시즘은 전적으로 부인하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있다. 그리고 그런 신앙의 빈자리는 신종교가 메우고 있다.

 

 

일본에는 여래교, 흑주교, 천리교, 금광교 등 여러 가지 신종교가 나타나 활약하고 있으며 최근 그중 하나인 옴진리교는 여타 신종교와 마찬가지로 선과 악에 대한 구체적 개념이 없는데다가 인간을 구제하기 위해서는 적극적 폭력까지도 용인하는 비현실적 교리로 인해 지하철 사린가스 사건을 일으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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