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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볼 수 없는 모든 빛 1
앤서니 도어 지음, 최세희 옮김 / 민음사 / 2015년 7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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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하루 하루는 늘 그 날이 그 날 같이 흘러간다. 뉴스 속의 사건, 사고나 국제 이슈들도 브라운관 너머에서 일어나는 일들일 뿐, 나에겐 그저 영화나 드라마와 다름없는 것들이다. 평범하고 연약한 개인과 특별하고 거대한 역사는 조금 떨어져 각자의 사이클로 돌아가는 존재인것 같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이렇게 느낄 수 있는 지금이 아마도 '평화'라는 것인가 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휴전국'이라는 특수한 상황임을 인지하고는 있지만, 지금의 우리 일상은 임시로 평화롭지 않은가.)
지금의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도 전쟁의 소용돌이를 그 어느 나라 못지않게 정면으로 부딪쳤던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나는 감사하게도 그 파괴적인 횡포가 잠시 멈추고 그 흔적이 희미해질 즈음에 태어난 세대이다. 그래서 나에게 전쟁은 무섭고 끔찍한, 영화다. 하지만 베르너와 마리로르에게는 영화가 아니었다.
'우리가 볼 수 없는 모든 빛'은 역사와 무관하게 살 수 없었던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그 이유는 특별하게 살고자 했던 주인공들의 야망이 아니라 그들이 선택하지 않았던 '전쟁' 때문이었다.
표지의 아련한 소년, 소녀의 눈빛과 '눈먼 프랑스 소녀와 독일 고아 소년이 간직한 가장 빛나는 이야기'라는 소개 멘트에서 느꼈던 감동적인 소설일거라는 기대의 한켠에는 단골 소재인 '전쟁과 사랑'을 담은 또 하나의 소설이겠거니 하는 식상함이 살짝 묻어있었다.
소설 속에서 소년과 소녀의 이야기가 교차되며 진행되는 와중에, 나는 수시로 언제쯤 두 아이들이 만나서 둘만의 이야기가 이어질지를 가늠하고 있었다. 하지만 2권을 채운 이야기 안에서 이 둘의 만남은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았고, 예상처럼 불꽃 튀는 뜨거움도 없었다. 그래, 그저 단순히 로미오와 줄리엣의 이야기였다면 퓰리처상을 수상할 리 만무했겠지… 이 소설은 이성간의사랑보다 더 많은 이들의 삶을 담고 있는 이야기이다.
소설에 등장하는, 품는 자는 영원히 살 수 있다는 다이아몬드 '불꽃의 바다'는 사그라 들지 않는 욕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돌을 품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그러나 그가 돌을 품고 있는 한, 멈추지 않는 빗줄기처럼 그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에게 차례로 악운이 미치리라
자신의 야망을 실현시키고자 하는 누군가의 욕망, 그리고 그로 인해 멈추지 않는 빗줄기처럼 스러져간 많은 사람들… 이것이 바로 전쟁이지 않은가.
불행이 뒤따른다는 것을 알면서 사랑하는 사람들의 희생을 감수하고서라도 손아귀에 넣고 싶은 것, 인간의 욕망은 그래서 무서운 것이다.
그와는 다른 의미로 등장하는 것은 '라디오'이다.
베르너는 '라디오'를 통해 졸페라인 너머의 세상을 알게 되고, 눈 앞에 놓인 정해진 운명과 다른 미래를 그려보게 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라디오를 만들고 고치는 것을 좋아하던 베르너는 그 재능 덕(?)에 라디오를 파괴하는 일을 하게 된다.
베르너의 대대는 트럭을 타고, 수많은 라디오(주파수)를 끊기 위해 러시아를, 프랑스를 다닌다. 사람들의 연결, 소통을 끊는 것이다.
에티엔 할아버지가 죽은 마리로르의 할아버지와 닿고 싶어서 보냈던 라디오, 처음 맞닥뜨린 베르너와 마리로르를 믿을 수 있도록 연결시켜주는 라디오… 결국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누군가와의 연결인 것이다. 혼자가 아니라는...
혼자 남을 수 밖에 없는 '불꽃의 바다'와 누군가와 연결되어 혼자가 아닐 수 있게 하는 '라디오', 우리는 무엇을 갈망하는 사람인가.
장님 소녀 마리로르는 생일 때마다 아빠가 정교하게 만든 퍼즐상자를 열어 선물을 찾아낸다. 그 선물들은 내가 느끼기에 다소 시시한 것들이다. 매년 반복되는 부녀의 생일 기념 의식을 읽으면서 마치 그 안에 든 선물이 목적이 아니라 퍼즐상자를 여는 그 자체에 의미가 있는 듯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오로지 내가 쟁취하고자 하는 결과물에 정신을 쏟는 것과 그 과정에 의미를 두고 느끼면서 살아가는 것.
그런 의미에서 결국 저자가 우리에게 남기고 싶었던 것은 '열쇠'였던건지, 소설의 막바지에 '불꽃의 바다'는 바닷물 속에 사라지고, 철제 열쇠는 마리로르의 손에 돌아온다. 그 열쇠는 어둠 속에서 빛을 열게 하는 열쇠일까.
이 소설을 읽으며 또 하나, 내가 개인적으로 느꼈던 부분은 악의 모호함이었다.
소설 속에는 프랑스인과 독일인이 등장하고, 몇을 제외한 (본부 원사 룸펠이나 향수 상인 빅 클로드) 등장인물들은 악인이라 지칭할 수 없는, 자신의 일상을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이다. 전쟁을 일으키고, 수많은 학살을 일삼고, 유태인의 시체가 쌓일 정도로 잔인한 '독일'이었지만, '독일인'들도 자신들의 삶을 잃어버린 사람들이었다. 인질에게 들이붓도록 강요되었던 양동이를 거부하지 못했고, 그에 맞섰던 프레데리크를 옹호하지 못하고 방관했던 죄책감을 가졌던 베르너, 마리로르를 만나러 가던 기차 안에서 마주친 상이 군인이 독일인인 자신을 향해 원망을 퍼부을까 두려워 하던 유타...
독일인이라는 사실만으로도 마음의 부채를 안고 살아가게 된 그들을 악인이라 할 수 있을까. 전쟁의 상처는 모두에게 깊고 아프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고, 종식되었다'는 한 줄의 역사적 기술 속에 얼마나 많은 베르너와 마리로르와 프레데리크, 유타, 폴크하이머, 마리로르의 아빠, 에티엔 할아버지, 유타, 마네크 부인들이 사라지고 또 살아남았는지를 문득 느끼게 된다.
늘 그렇듯이 마지막 페이지를 끝마치고 책장을 덮으면서 내가 과연 저자가 전하고자 한 메세지를 이해한건지는 의문스럽지만 마음에 남은 잔잔한 빛이 나의 컴컴한 머리 속에서 라디오 방송처럼 퍼져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뇌는 단 한점의 빛도 없이 살아가면서 무슨 수로 우리에게 빛으로 가득한 세상을 지어 주는 것일까요?
실제로는 말이죠, 수학 상으로는 어떤 빛도 눈에 보이지 않는답니다.
눈을 떠요. 그리고 영원히 감기기 전에 그 눈으로 여러분이 할 수 있는 걸 찾아봐요.
마리로르도 베르너도 그리고 우리도 실제로는 볼 수 없지만, 우리 안에 존재하는 빛을 보면서 살아가고 있다.
내가 이 소설 속의 빛을 조금이라도 본건지는 모르겠다.
'불꽃의 바다'보다 더 빛나는 우리 안의 눈으로 이 소설이 담고 있는 빛을 조금이라도 볼 수 있기를 바라며 이 책을 추천한다.
* 출판사에서 도서를 지원받아 작성된 서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