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세계철학사 1 - 지중해세계의 철학 ㅣ 세계철학사 1
이정우 지음 / 길(도서출판) / 2018년 1월
평점 :
철학사의 서술에서 그 출발점에 놓인 물음은 '철학이란 무엇일까?'이다. 우리는 그 물음에 대해 '철학(philosophia)'이라는 말과 개념을 만들어낸 그리스 자연철학자들로부터 출발할 수 있다. 이들이 만들어놓은 개념들은 지금까지도 모든 학문의 기초 개념들로서 사용되고 있다. 하나의 개념이 탄생할 때는 늘 어떤 대립성이 작동한다. 대립, 갈등, 부정, 모순의 장에서 무엇인가가 탄생한다. 철학의 탄생에도 이런 대립성들이 작동했다.
지중해세계의 철학은 신화와의 대립의식, 허무주의와의 대립의식, 그리고 '동방'과의 대립의식을 통해서 태어났다. 이런 탄생설화는 이후 다양한 곡절을 거치면서 점차 현재로부터 멀어지게 된다. 그럼에도 그 여운은 사라지지 않고 어떤 측면에서는 오늘날의 서구 철학에도 여전히 남아 있다. 21세기의 서구 철학도 여전히 지중헤세계 철학의 탄생설화와 무관할 수는 없다.
인간이 세계를 인식한다는 것은 자신에게 단순히 '드러나' 있는 것을 자신이 '아는' 것으로 변환하려는 노력이다. 자신에게 드러난 현상들을 인식한다는 것은 자신이 가진 인식 장치들인 감각, 의식, 언어, 기구, 대화 등을 동원해 그것들의 선험적 조건들 즉 가능조건들을 들여다보는 것을 뜻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인식 주체는 대상과의 뒤섞임으로부터 스스로를 점점 구분해보는 것이다.
특정한 인식 장치들로 세계의 특정한 대상/영역/차원을 인식하는 것을 각각의 개별 과학이라고 한다면, 인간의 각종 인식들이 맺는 총체적 관계, 더 정확히는 현시점에 이르기까지 인식이 겪어온 과정 전반에서 그 가능조건들을 읽어내는 것은 철학/사유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철학의 역사 초창기에는 이런 식의 구분, 즉 개별적인 인식의 성취들과 그 종합적 구조, 전반적인 과정에 대한 메타적 사유 사이의 구분이 뚜렷할 수 없었다. 따라서 철학의 역사는 사유하는 주체가 점차 대자적(對自的)으로 화해가면서 사유의 폭을 넓혀온 역사라 할 것이다.
아직 인식을 위한 정교한 기구들이나 수학적 언어들, 사회적 제도들 등이 존재하지 않았던 사유의 여명기에 철학자들은 자연적 지각작용과 일상 언어를 통해 사유했다. 이들은 인식의 가장 기본적인 조건들이지만, 이 조건들 또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계속 변화해왔다. 따라서 철학의 탄생이 고대 그리스에서 이루어졌다면 그 탄생 조건의 인식론적 측면은 당대 그리스인들의 지각과 일상 언어였다고 할 것이다.
이렇게 파악된 철학의 초기 조건들은 인도의 초기 조건들 및 동북아의 초기 조건들과는 당연히 현저하게 다르다. 고(苦)로부터 해방되어 해탈에 이르려 한 인도의 전통, 난세를 치세로 바꾸려 한 동북아의 전통, 그리고 허무에서 해방되어 영원을 향하려 한 그리스의 전통은 철학의 매우 상이한 세 전통을 형성한다.
철학에 대한 이해는 추상적인 보편성에서가 아니라 이렇게 구체적인 역사성에서 출발해야 한다. 만일 철학적 보편성이 있다면 그것은 이런 역사적 구체성'들'에서 출발해 그것을 성실하게 '접합'해가는 한에서만 가능하다. 이 책 '세계철학사'는 이렇게 특수성/역사성에서 출발해 보편성/철학성을 지향해가는 한 관점을 제시하기 위한 시도이다.
'세계철학사1'은 철학자 소운 이정우가 지은 4권의 세계 철학사 시리즈 제 1권으로, 고대 그리스부터 이슬람과 스콜라 철학을 거쳐 근대에 이르는 지중해세게의 철학을 다뤘다. 4권 전체를 합치면 3천 쪽이 넘는 대작이고, 1권만 해도 872쪽이 넘는다. 철학 이야기를 하는 벽돌책,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프다. 그럼에도 이 책은 꽤 재미있다.
그것은 이 책이 단편적인 철학 지식을 나열한 책이 아니기 때문이다. 저자 본인이 말하듯이 이 책은 '철학'사인 동시에 철학 '사' 책이다. '철학을 다루지만 어디까지나 역사적 지평에서 다루며, 역사에 속하지만 어디까지나 철학의 역사이다'. 세계 속에서 철학이 어떻게 태어났고, 철학이 어떻게 세계를 변화시키고, 세계의 변화가 철학을 어떻게 형성하는지, 세계와 철학의 되먹임의 순환을 보여준다.
그렇게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자기완결성이다. 실제 세계가 어떻든 최소한 이 책에서는 세계와 철학이 서로 연결된 기승전결의 맥락과 논리와 인과를 갖추고 있다. 세계와 철학은 같이 어울려서 그 시작과 전개와 현재를 같이 하고 있다. 그렇기에 세밀하고 복잡한 철학의 단편들을 미처 이해하지 못할 지라도 세계와 철학이 어우러진 변화와 인과율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그 흐름에 몸을 푹 담그게 된다.
이 세계철학사 1권을 다 읽은 지금 나는 여전히 스토아 학파와 스콜라 철학을 구분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나는 안타까워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순간 순간 찾아오는 두통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여러 차례 고개를 끄덕이며 재미있게 읽었다. 감이불취. 비록 가지지 못했지만 나는 느꼈다. 세계와 철학의 어우러짐을.
이제 겨우 1권을 읽었다. 1권을 다시 읽을 지, 2권으로 넘어갈지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 저자의 해박한 지식과 깊은 사유는 내가 나무를 보지 못할지라도 숲의 생명력을 느낄 수 있도록 도와준다. 숲을 걷다 보면 언젠가는 나무를 구분하게 되리라. 스토아 학파든 스콜라 철학이든 아니면 다른 나무든. 그때까지 나는 바람을 느끼며 세계철학사의 숲을 천천히 걸어 가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