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들어진 서양
니샤 맥 스위니 지음, 이재훈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서양>은 어떤 지리적 위치나 문화적 공동체를 가리키는 낱말이다. 이 낱말을 정의하는 한 가지 구체적인 요소는 공통의 기원과 역사를 가지고 있고 문화유산과 정체성을 공유하는 근대적 국민 국가라는 개념이다. 서양의 기원 신화를 찾아 서양사를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면, 근대화된 대서양 연안 국가들에서부터 계몽주의 시기 유럽을 거치고 찬란한 르네상스와 암흑의 중세를 지나 마침내 그리스와 로마의 고전기 세계에 다다른다.

그러나 플라톤에서 나토에 이르는 단일하고 온전한 연속체로서 서양사를 구성하려는 서양사의 판본은 사실에 근거하기 보다는 이념에 의해 추동된 것이다. <서양 문명>으로 알려진 이 거대 서사의 판본은 영화와 텔레비전, 도서관, 건축물 등 우리 일상에 널리 퍼져 있다. 우리는 <서양 문명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 기독교 교회로부터 계승되어 르네상스, 과학 혁명, 계몽주의를 거쳐 왔다>는 식의 이야기를 반복적으로 들어 왔고, 서양의 출생지로서 고대 그리스-로마가 특히 강조되곤 한다.

그러나 이 거대 서사는 사실과 다르다. 근대 서양은 고전기 고대라는 명백하고 단순한 기원을 갖고 있지 않다. 또한 중세 기독교 세계-르네상스-계몽주의 시기-근대로 이어지는 단순한 선형적 발전 과정을 거치지도 않았다. 이 거대 서사는 한 세기 전부터 그 결점이 노출되었고 현재 그것을 반박하는 증거는 차고 넘친다. 오늘날 모든 진지한 역사학자와 고고학자들은 <서양>과 <비서양> 사이의 문화 교류가 있었고, 근대 서양의 문화적 DNA의 상당 부분이 비유럽인 및 비백인 선조들에게서 폭넓게 빌려온 것임을 인지하고 있다.

서양 문명이라는 거대 서사는 토대가 되는 사실관계가 전혀 근거가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그럼에도 그 서사가 계속 유지되고 있는 것은 그것이 현재에도 지속되고 있는 백인종의 지배 체제와 더불어 서양의 확장 및 제국주의를 정당화하기 때문이다. 고전기 아테네를 민주정의 등불로 여기는 발상, 고대 로마가 유럽다움의 근본이라는 생각, 십자군이 기독교와 이슬람교 간 문명의 충돌이었다는 신화 등 임시변통으로 그때 그때의 특정한 정치적 목적에 따라 만들어진 수많은 미시 서사가 상호 연결과 끼워 맞추기를 통해서 이 거대한 서사를 구성하고 있다.

정치화된 역사 재상상하기는 매우 일반적인 관습이고, 역사 그 자체가 쓰인 기간만큼이나 오래 행해졌다. 기원전 6세기 에게해를 장악하려 시도하던 아테네인들은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 에게해의 섬들이 아테네의 것임을 암시하는 글귀를 삽입한다. 1923년 근대 국민 국가 수립을 선언한 튀르키에는 고고학 프로그램을 통해 아나톨리아 지역과 튀르키에인을 연관지었다. 푸틴은 우크라이나 침공전 러시아인과 우크라이나인의 역사적 단일성을 주장했다. 시진핑은 2차 세계 대전에서 중국의 역할에 대해 새로운 서사를 만들고 있다.

모든 역사는 정치적이다. 사실 이것이야말로 역사가 서술되는 유일한 방식이다. 정치적 입장에 따라 쓴 역사가 나쁜 게 아니라, 사실과 다르게 쓴 역사가 나쁜 역사다. 그것이 서양 문명이라는 거대 서사가 지닌 중요한 문제 가운데 하나다. 또 다른 문제는 오늘날 자유주의, 사회적 관용, 민주주의 등의 이념 대신 백인종의 우월성이나 제국주의를 서양 정체성의 핵심으로 만들기 위해 그 서사가 이용된다는 점이다.

우리는 사실과 맞지 않을 뿐더러 이념적으로도 뒤처진 그 거대 서사를 치워버려야 한다. 그것은 서양사에 대한 정확한 설명도, 서양 정체성에 적절한 이념적 토대도 제공하지 못하는 잘못된 기원 신화이다.


여성이면서 혼혈인 영국의 역사학자 '니샤 맥 스위니'는 역사학자로서 서양이라는 서사에 담겨 있는 인종과 성과 계급에 근거한 차별 체제를 해체할 책임을 느낀다. 그리고 더 나아가 현실의 고대 세계가 서양 문명이라는 거대 서사에 의해 알려진 것보다 얼마나 다양하고 흥미롭고 다채로운지를 밝혀내고 전파하고 싶어한다.


그를 위해 저자는 이 책에서 열네 명의 인물을 소개한다. '헤로도토스'에서 '베이컨'을 거쳐 '캐리 람'에 이르는 각각의 인물을 통해 서양사를 더욱 풍부하고 다양하게 풀어내기 위한 서사의 토대를 그려냈다.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들은 주관적이면서도 사실에 바탕을 두고 있다. 가장 정확하게, 그리고 가장 흥미롭게 고대 세계를 연구하는 방법은 헤로도토스가 그러했듯이 그 현란한 다양성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서양은 서양 문명에 대한 낡은 서사를 버리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서양은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적 사실에 더욱 근접한 새로운 거대 서사를 설정해야 한다. 이 새로운 서사는 인종주의적이고 제국주의적이고 성차별적이고 배제적인 서양이 아니라 자유주의적이고 다원주의적이며 민주적인 서양을 만들어 나갈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