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는 사무치고 문장은 아름답다.
"매번 우리 사이의 거리를 가로지를 수 있는 어조를 찾아내려고 애썼습니다. 그 거리는 단지 지리상의 거리만이 아니라 언어 사이의 거리이기도 하고, 역사 사이의 거리이기도 하며, 말할 수 있는 것과 침묵 속에 전해야 하는 것 사이의 거리이기도 했습니다."
책을 펼치자마자 만난 온유하고 사색적인 문장에 마음이 들떴다. 그 문장은 나의 시야를 확장하고, 사유를 자극할 것을 예고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왠지 한강 작가의 따뜻하고 사려깊은 사유를 연상시켰다. 그렇게 반갑게 읽어가다가 뒤 따르는 글에 나는 그만 울컥하고 말았다.
이 책은 팔레스타인에 대한 얘기다.
그리고 언어에 대한 얘기다.
굶주림과 폭격과 죽음에 포위된 가자라는 재앙의 세계에서,
언어가 삶을 어떻게 담아내고 있는지,
언어가 영혼을 어떻게 담아두고 있는지를
얘기하는 책이다.
팔레스타인 사람이 아니면 쓸 수 없고,
언어에 삶을 건 사람이 아니면 쓸 수 없는 이야기다.
슬프고 차분하고 사색적이고 절망스러운 그러나 의지어린 목소리로 들려주는
가자의 삶과 언어에 관한 이야기다.
가자의 이야기는 굶주림으로 시작한다. "배고픔은 자신만의 언어를 키워낸다. 조용하게 사람을 갉아먹는 언어를, 그것은 극적으로, 혹은 요란하게 찾아오지 않는다. 그보다는 몸과 마음에 스며들어 둘 다 흐물흐물해지고, 구부러지고, 닮아 없어지게 만든다. 배고픔은 생각 위에, 기억 위에, 피부의 연약한 껍질 위에 먼지처럼 내려앉는다." 나는 비로소 실존을 알 것 같다.
글을 읽는 내내 먹먹하다. 문장은 연꽃같고, 사유는 선혈같고, 의지는 죽음같다. 나는 경험하지 못했고, 상상하지 못했던 세계 속으로 빠져든다. 배고프고 절박하고 해체되고 무너져가는 멀고 막연하고 흐릿한 세계가 문장으로 새롭게 구성되어 나타난다.
나는 먹먹한 가슴과 뜨거운 눈시울 속에서 감탄한다. 이것이 문장이 만들어내는 세계구나. 이것이 언어가 만들어내는 세계구나. 글이 생명을 얻어 스스로 존재하는 세계구나. 꿈처럼 막연하고 신기루처럼 흐릿한 현실이 사라지고 문장들이 눈에 새겨져 피를 따라 흘러 심장에 스며들고 뇌리에 박힌다. 그렇게 작가의 사유는 내 안에 숨쉬는 세계를 구축하고, 언어가 만들어낸 세계는 나의 현실을 전복한다. 글이 세계가 된다. 갑자기 그동안 읽었던 모든 글들이 허무해진다. 비로소 팔레스타인과 가자는 새로운 현실이 된다.
작가는 가자의 비명을 부르짖는데 나는 글을 얘기한다.
작가는 영혼의 해체를 절규하는데 나는 문학을 얘기한다.
그 괴리가 미안하고 슬프다.
많은 이들이 디아스포라를 말하지만
팔레스타인이야말로 디아스포라다.
가자에 갇혀 있어도,
가자를 떠나 있어도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디아스포라다.
이들의 흔적은 언어로 남는다.
이 책을 읽다보면
일제 식민 시대를 살아가며
빼앗기고 짓밟히고 끌려가고 죽어가고 저항하고 싸웠을
우리 선조들의 마음을
눈꼽만큼은 짐작할 수 있을 것도 같다.
이 책을 읽던 와중에
한 밴드에서 서정주의 친일시에 관한 포스팅을 읽게 되었다.
서정주의 시어가 아름답다고?
서정주의 시가 형이상학적 깊이를 간직하고 있다고?
정말 그런가?
언어라는 것이 삶과 괴리될 수 있는가?
글이라는 것이 영혼과 무관할 수 있는가?
시라는 것이, 문학이라는 것이 그저 글자라는 기호의 조립에 불과한 것인가?
글자를 배치하고 배열하고 조합하면 저절로 글이 되는 것인가?
'글'을 좋아하고, 글에서 의미를 찾는 사람 중의 하나로서,
언어란 무엇인지, 글이란 무엇인지 묻지 않을 수가 없다.
시가 무엇인지, 문학이 무엇인지 묻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나 굳이 대답은 필요 없다.
나는 이 책 '팔레스타인 번역가의 이중생활'을 읽으면서 그 답을 얻는다.
이 책, '알라 알카이시'라는 팔레스타인의 젊은 번역가가 쓴,
아니 썼다기 보다
굶주림과 슬픔과 고통과 절망과 희망과 의지를
삶과 영혼에 한 줄 한 줄 새겨 놓은
이 글들을 읽으면서,
나는 저절로 알게 된다.
아름다운 글이 어떤 글인지,
깊이를 간직하는 글이 어떤 글인지
이 책은
가자라는 좁고 절망스러운 세계에서
언어가 가지는 의미에 대한 이야기지만,
그 이야기 속에 이미 내 질문에 대한 답이 담겨있다.
굶주린 삶은 언어로 세상을 담고, 해체되는 영혼은 언어로 존재를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