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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호랑이
네주 시노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26년 3월
평점 :
"내가 겪은 그 순간은 시간 밖에 있고, 역사의 흐름에서 벗어나 있다. 부조리로 가득 차 있고 의미가 너무 복잡해서 어떤 서술로 그 순간을 설명하고자 해도 그럴 수가 없다."(47쪽)
뭔가 급하게 하고 싶은 말이 많은데, 그 말이 너무 많고 정리가 되지 않아 목구멍에 턱 걸리는 바람에 오히려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급하게 헉헉거리기기만 할 때가 있다. 이 책을 읽은 느낌이 그렇다. 뭔가 말을 쏟아내고 싶고, 무슨 말이든 토해내야 할 것 같은데, 스스로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도 모르겠고, 정리도 되지 않아 목에 탁 걸려 있는 그런 느낌. 말을 하려고 하면 할수록 말이 엉키고, 목이 막히는 그런 느낌 말이다.
이 책 '슬픈 호랑이'는 프랑스 작가 '네주 시노'가 지은 책이다. 출판사 책 소개에 의하면 '어릴 적 의붓아버지에게 지속적으로 성적 학대를 당한 저자가 쓴 자전 소설이자, 에세이, 회고록이다. 저자는 증언 문학이 지닌 기존의 문법을 파괴하고, 여러 장르의 경계를 넘나들며 자기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간다. 읽는 이를 단숨에 몰입시키는 서술과 첨예한 지적 통찰이 함께 소용돌이치는 독보적인 작품이다.'
그렇다. 이 책은 어릴 적부터 지속적으로 성폭력을 당해온 작가가 자신의 경험을 펴낸 책이다. 영화나 드라마나 소설이나 뉴스에서 많이 접해온 이야기다. 너무나 자주 접해봤기에 익숙하다고 착각하면서도, 그 내용의 파괴력 때문에 실제로는 눈을 감고 귀를 닫은 우리들이 자칫 진부하고 상투적인 신파로 피해버리는 아동 성폭력에 대한 이야기다.
그러나 우리의 비겁하고 무책임한 선입견과 달리 이 책은 뻔하고 반복적인 눈물과 상처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들의 편견과 외면에 무시 당하는 피해자를 빼놓더라도, 이 책은 정해진 답을 향해 달리는 교과서나 참고서가 아니다. 이 책은 문외한이고 방관자이고 구경꾼인 우리가 미처 짐작도 할 수 없고, 상상도 할 수 없는 고민과 사유를 담고 있다. 사회가 피해자에게 바라고 요구하는 정체성을 넘어서는 한 인간으로서의 사색과 사유를 담고 있다. 그러면서 냉철하고 분석적인 시선으로 여러 문학 작품을 넘나든다.
뭔가 많이 떠들고 싶다. 그러나 내가 무슨 말을 떠들든 그것은 다 허공 중에 연기처럼 흩어질 것이다. 내 말은 다 헛소리가 되어 공허하게 부서질 것이다. 그보다는 작가의 말 몇 마디를 직접 소개하는 것이 나으리라. 그리고 떠들 시간에 차라리 작가의 사유를 곱씹고 되새기는 것이 나으리라.
그것이 내가 시작도 모르고, 끝도 모르고, 속도 모르고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얘기를 듣는 올바른 방법일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내가 구경꾼을 넘어서 목격자가 될 수 있는 방법일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내가 방관자를 넘어서 증인이 될 수 있는 방법일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내가 나 자신도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섬뜩한 깨달음을 직시하는 방법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나는 단순히 아동 성폭력의 피해자가 아닌 '네주 시노'라는 사람의 '슬픈 호랑이'를 소개하고 싶다.
"강간과 관련된 모든 일은 별도의 차원, 즉 이상한 차원에서 전개된다. 물리적으로는 삶의 나머지 부분이 전개되는 차원과 비슷하지만, 견딜 수 없을 만큼 선명한 또 다른 차원이 거기에 겹쳐진다." (67쪽)
"버지니아 울프가 쓴 대로, 우리가 어떤 사건에 관해서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사건이 진짜 고통에서 떨어져 나와 비현실의 양상으로 있기 때문이다. 그 사건은 언어를 통해서 포착될 때에만 현실이 된다."(117쪽)
"그는 나라는 소녀에게 거부당하는 일을 견딜 수 없었다고 말했다. 내가 자기를 사랑하려 하지 않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여겼고, 성행위야말로 나하고 접속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건 허위적이고 병적인 변명이었다."(151쪽)
"그들은 자기 자신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아이를 강간한 남자를 변호하기 위해 행했던 그 증언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그를 돕는다고 해서 그들에게 이익이 될 건 전혀 없었다. 그들은 그 점을 잘 알면서도 자발적으로 증언에 나섰다"(155쪽)
"요컨대 고소 사건의 10%만이 중죄 재판소나 소년 법원에 공소 제기가 되었고, 강간에 대한 유죄 판결은 지난 10년 동안 40%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10% 중의 10%, 실제로 그건 많은 게 아니다. 1백 건의 강간 사건 중에 단 한 건이 판결을 받는다는 뜻이니까 말이다."(194쪽)
"괴물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정상 상태에서 너무나 멀리 벗어나 있기에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고, 자신도 스스로 이해할 수 없는 존재, 그것이 괴물이 아닐까? 자기들의 발기된 성기를 자기네 아이들의 몸 속에 넣고, 아무도 듣지 못하도록 아주 작은 목소리로 그들의 귀에 대고 세상에 있는 그 무엇보다 그들을 더 사랑한다고 속삭이는 그자들이 바로 괴물이 아닐까?"(207쪽)
"강간은 흔히 성적인 욕구를 참지 못하고 성관계를 강행하는 것으로 표현되지만, 사실은 힘이나 분노의 문제를 표출하기 위해 성행위를 이용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강간은 사이비 성행위이고, 성 본능이나 성적 만족과 관계를 맺기 보다 지위, 적의, 통제, 지배와 더 밀접한 관계를 맺은 성적 행동의 총체이다."(214쪽)
"내 의붓 아버지는 바로 그런 식으로 상황을 설명하려 했다. 무언가가 그에게, 우리에게 일어난 것이지, 자기가 뭔가를 하고 싶었다거나 의도적으로 계획한 게 아니라고. 자기는 그런 점에서 피해자라고, 가해자는 자기가 아니라 소녀라고, 자기와 함께 살면서 자기 안에서 그런 기계 장치 같은 게 작동하게 만든 소녀가 가해자라고"(237쪽)
"그들이 강간을 저지르는 것은 그들이 할 수 있기 때문이고, 사회가 그들에게 그 가능성을 주기 때문이며, 사람들이 허락을 했기 때문이다."(248쪽)
"아동에 대한 성적 학대는 한낱 시련이나 살다가 겪는 사고가 아니라, 존재의 근거 자체를 파괴하는 극도의 모욕이다. 한번 피해자가 되면 피해자에게서 벗어날 수 없다. 한번 피해자는 영원한 피해자인 것이다. 설령 우리가 그 역경에서 벗어난다고 해도, 진정으로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259쪽)
"강간과 관련해서는 승리라는 것이 있을 수 없다. 아니 어쩌면 아주 작은 것들이 있을 수는 있다. 서로 가는 길이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그랬듯이, 나는 오로지 신뢰할 수 없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이에, 강간당했고, 모욕당했고, 배신당했다."(339쪽)
" 그 세계는 피해자와 가해자가 모여 있는 세계다. (...) 그 세계의 문턱에 머무는 법을 배우라. 그렇게 도전하라. 우리 운명들의 줄 위로 곡예사들처럼 걸어라. 비틀거릴 수는 있지만, 다시 한번 말하거니와, 떨어지지 말라, 떨어지지 말라, 떨어지지 말라"(35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