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처음 '지능'이란 것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한 것은 영리한 말 '한스' 때문이었다. 나는 인공지능의 실체를 다룬 문제적 책, 'AI 지도책(케이트 크로퍼드 저)'을 통해서 한스를 알게 되었다. 한스는 '산수 문제를 풀고 시계를 볼 줄 알고 달력의 날짜를 판독하고 음을 구별하고 단어와 문장을 표현'했었던 영리한 말로, 19세기 말 유럽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학자들의 조사 결과 이것은 거짓으로 드러났다. 한스는 실제로 문제를 푼 것이 아니라 질문자의 호흡, 표정, 자세 등을 읽고서 질문자가 원하는 답을 한 것이었다. 한스의 주인은 사기꾼으로 몰렸고, 한스는 군마로 팔려나가 전쟁터에서 죽었다.
한스 이야기로 책을 시작하면서 케이트 크로퍼드는 지능에 관한 우리의 두 가지 환상을 지적한다. 첫째, 훈련과 자원만 충분히 투입하면 세계와의 관계 맺기 없이도 인간 지능을 백지 상태에서 만들 수 있다는 환상. 둘째, 지능이 자연, 사회, 문화, 역사, 정치와 관계없이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라는 환상. 한스는 이미 다른 종과의 소통, 공연, 높은 인내심 같은 놀라운 위업을 선보였지만 우리는 이것을 지능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우리는 지능을 너무 편협하게 인식한다. 우리는 지능을 물질 세계와 무관한 컴퓨터 같은 것으로 인식한다.
그리고 이 책 '뇌 없이도 생각할 수 있는가'를 읽으면서 나는 다시 한 번 지능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직면한다. 저자 파코 칼보는 인간과 동물을 넘어서 식물지능에 관해 이야기한다. 우리는 뉴런이 지능을 일으키고 의식의 중심에 뇌가 있다는 도그마에 갇혀 다른 종류의 내부 경험을 잘 상상하지 못한다.
AI 지도책이 말하는 것처럼 지능이 의식적, 계획적으로 세계와의 관계를 맺는 것이라면, 식물의 지능에 대해서도 같은 맥락에서 생각해봐야 할 터이다. 식물이 무기력하고 정적인 존재라는 생각에서 벗어나 식물이 자연 세계와 어떻게 상호작용 하는지, '식물의 관점'으로 살펴봐야 할 때다.
적응이 특정 정보 입력에 대한 무의식적인 반응이라면, 인지 행동은 유연하고 예측적이고 목표지향적인 행동이다. 학습과 기억, 위험 대응 행동의 수학적 능력에 이르기까지 식물은 인지 과정에 의한 행동을 한다. 식물은 학습을 기억할 수 있고, 다양한 통로를 통해 다른 종과 지속적으로 소통하고, 스스로 내린 선택의 위험성을 판단할 수 있다.
지능에 관한 컴퓨터 메타포는 생각이 체스 게임에서 이루어지는 엄격한 데이터 처리와 비슷하다고 상정한다. 하지만 컴퓨터의 능력은 결국 초 당 얼마나 많은 지시를 처리할 수 있는 지가 관건이다. 이는 생물학적 지능과 거의 아무런 관련이 없다. 식물과 유기체는 가시적인 상호작용의 망에 자리한 물리적인 존재이다. 식물의 인지는 환경과의 여러 역동적이고 연속적인 상호작용을 하는 목적 지향적 행위이다. 식물의 생각은 생태적 환경에서 이루어지는 물리적 변화를 통해 이해해야 한다.
식물은 같은 환경에 놓이더라도 개체마다 다르게 행동한다. 이는 식물 역시 우리가 성격이라고 지칭할 수 있는 자질을 지니는 것으로 보인다. 동물들도 인간처럼 성격을 지녔으며 개체마다 일정하게 보이는 행동 양상이 다르다는 생각은 비교적 새로운 발견이다. 식물에 성격이 있을 가능성에 주목한 과학자는 극소수에 불과하지만, 식물 성격 연구가 시작되고 있다.
식물이 의식을 지녔는지는 아직 확정할 수 없다. 하지만 동시에 의식이 없다고도 단정할 수 없다. 동물은 뇌와 신경절에서 통합된 신경들의 전기 활동이 의식을 일으킨다고 여겨진다. 신경이 없는 식물은 관다발 세포로 이루어진 긴 관들이 뿌리에서 잎까지 서로 연결되어 신경과 같은 기능을 한다.
식물이 지능을 갖추었고 주변을 인식할 수 있다면 식물에 대한 윤리적 문제에 마냥 눈 감고 있을 수는 없다. 마취제와 어둠은 인간과 동물 뿐 아니라 식물에게도 마취와 졸음의 효과를 일으킨다. 우리 자신이 다른 존재의 고통을 고민하는 존재라면 고통을 느낀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모든 유기체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식물이 의식을 지녔을 가능성을 항상 염두에 두고 식물을 새로운 방식으로 바라보는 노력이 필요하다.
생각을 가두는 껍데기를 깨려면 새로운 질문들을 받아들이며 우리와 함께 하는 존재들의 본질을 상상해야 한다. 식물로 존재한다는 게 어떤 것인지 진정으로 이해한다면 인간으로 존재하는 게 어떤 의미인지에 관해 많은 걸 깨달을 뿐 아니라 유기적 세계를 망가트리지 않고 유기체들과 공존하는 방식들을 배우게 될 것이다.
이 책은 식물의 지능에 대한 가설과 추론을 담고 있는 책이다. 책에 의하면 식물의 지능은 다수의 학자들에게 인정받는 정론이 아니라 일부 학자들이 주장하는 가설이다. 나로서는 어느 것이 맞는지 알 수 없다. 논리적이고 설득력있는 주장에 솔깃하면서도, 직관을 벗어나는 파격적인 주장이 낯설기도 하다.
이 책은 '빛을 먹는 존재들'이란 책을 살피다가 알게 되었다. 기자 출신의 작가가 쓴 그 책을 미리보기로 살펴보니 은유적이고 수사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식물지능에 관한 책이면서 과학자가 쓴 이 책을 먼저 읽게 되었다. 다 읽고 난 지금 잘한 선택이라는 생각이 든다. '빛을 먹는 존재들'은 여전히 보관함에 올라 있다.
사실 이 책을 읽으면서 어렸을 때부터 혼자 가끔 품었던 의문을 다시 떠올렸다. 혹시 지구도 살아있는 것 아닐까? 지구는 살아있으면서도 우리 인식을 벗어가는 거대한 생명체이기에 우리의 인식 능력으로는 지구를 생명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것 아닐까? 지구가 생명이라면 우주는 더 거대한 생물이고, 어쩌면 지구는 우주의 세포 같은 것이 아닐까? 우리의 감각은 너무나 작고, 우리의 시간은 너무나 짧아서 우리는 지구와 우주라는 영겁을 살아가는 거대한 생물의 작동 방식을 감지조차 못하는 것 아닐까?
물론 내 생각은 근거 없는 공상에 불과하다. 이 책의 주장처럼 근거와 논거를 갖고 오랜 실험과 연구 끝에 내놓는 체계적인 가설이 아니다. 그럼에도 내 공상이 책의 주장과 비슷한 출발점이 있는데, 그것은 인간의 인식 능력이 모든 것을 파악하기는 어려울 수 있다는 생각이다. 인간은 지식과 지혜와 진리를 향해 끊임없는 도전을 하며 자신의 틀을 넓혀왔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자신의 틀 안에 갇혀있는 미미한 존재다. 우리는 지식과 세계 앞에 겸허해져야 한다. 그리고 상상력을 해방해야 한다.
저자는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생물학자가 아니다. 저자는 철학자이면서 과학자이다. 그는 식물의 지능에 대해 단순한 실증(實證)을 넘어 넓은 사유를 동반한 통합적인 자세로 접근한다. 그리고 식물의 지능에 대해 논하면 결국은 마주할 수 밖에 없는 고민을 던진다. 채식주의의 윤리 체계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사실 정답은 없다. 우리는 다른 생명체의 생명을 갈취해야만 우리의 생명을 유지하고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존재다. 그것은 악이 아니다. 생명은 자연의 순환이다. 우리의 생명도 순환의 일부이다. 우리는 생명과 죽음 앞에서 겸허하게 살아가면 되었다. 그러다가 자연의 순환을 넘어서는 자본주의의 대량 생산, 대량 도살 시스템이 정착되었다. 이제 삶이 죄가 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전히 길을 찾기 어렵다. 동물 복지는 동물의 고통을 줄여주지만,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벽이 너무 높다. 채식주의는 윤리적으로 안전했지만, 이제는 자유롭지 못하다. 자본주의는 멈출수 없다. 인류를 파멸로 내모는 기후 위기 앞에서도 우리는 멈추지 못한다. 고작 동물이나 식물의 고통 따위 때문에 멈출 리가 없다.
나는 무기력하다. 그저 고민할 수 밖에 없다. 내가 다른 생명에게 주는 고통에 대해서. 자본주의가 멈추지 않는 것처럼 나의 고민도 멈추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다시 겸허해져야 한다. 그것이 지능이라는 마음을 가진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 아닐까? 부끄럽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