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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쑤기미 - 멸종을 사고 팝니다
네드 보먼 지음, 최세진 옮김 / 황금가지 / 2025년 8월
평점 :
007은 거의 고유 명사다. 자칭 문명 국가의 국민이라면 거의 모두가 알고 있을, 중장년층이라면 숀 코네리나 로저 무어를 통해서, 좀 더 젊은 사람이라면 피어스 브로스넌이나 대니얼 크레이그를 통해서 접했을 그 유명한 '제임스 본드'의 별칭이다. 그러나 본래 007은 고유 명사가 아니다. 살인 면허 번호다.
1953년, 영국 소설가 '이언 플레밍'은 자신의 소설 속에서 살인에 대해서 책임을 지지 않는 면허 번호 00을 만든다. 그리고 제임스 본드에게 7번째 살인 면허를 발급한다. 007은 일곱 번째로 발급된 살인 면허 번호다.
상상력을 살짝 열어서 한 발짝만 더 나가보면 어떨까? 살인 면허를 바우처로 발급하면 어떨까? 제임스 본드 아니더라도 누구나 이 살인 쿠폰을 구매할 수 있는 공정하고 평등한 세상을 만드는 거다. 3만 8482유로. 원화로 65,908,506원. 살인의 무게를 생각하면, 이 정도의 금액일지라도 구호만의 평등이 아니라 거의 실효적 평등에 가까운 것 아닐까?
2022년, 영국 소설가 '네드 보먼'은 소설 '독쑤기미'에 그런 세상을 담았다. 다만 살인 면허가 아니라 멸종 면허다. 어떤 생물을 지구상에서 멸종시키고 싶은 회사가 있다면 멸종 크레딧을 구매하면 된다. 너무 비현실적인가? 그렇지 않다. 우리들이 지금 살아가고 있는 현실 세상에서는 이미 '탄소 배출권'이 또 하나의 산업이 되어서 시장에서 거래되고 있다. 2025년 11월 현재 국내 탄소배출권은 톤당 1만원이라고 한다. 우리는 진작부터 인류에 대한 살인 면허를 거래하고 있다.
자본주의의 포식성은 결코 멈추지 않는다. 살인도, 멸종도, 지구 파괴도 모두 시장으로 집어 삼킨다. 그러면서도 시장의 상인이면서 동시에 손님인 우리들에게 최면을 건다. 우리는 자신이 시장의 일원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우리는 멸망으로 달려가는 세상을 바꾸는 대신 자신의 생각을 바꾼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아주 능숙하다. 이 책에서도 그렇다. 세계멸종위원회는 '멸종'의 기준을 바꾸려고 한다. 어떤 종이 지구상에서 모든 개체가 사라지더라도, DNA 스캔, 행동 기록, 서식 자료가 남아 있다면 그 종은 멸종된 것이 아니다. 그렇다. 멸종은 그저 산업일 뿐이다. 사람도, 생명도 다 상품인 세상에서 자연마저 상품인 것은 너무 당연하다. 그리고 그런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멸종 크레딧으로 투자라는 도박을 하는 것도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 '헬야드' 또한 그런 평범한 사람의 하나다. 광업 회사 직원인 헬야드의 담당 구역에는 '독쑤기미'라는 멸종 직전의 물고기가 있다. 개발이 시작되면 독쑤기미는 멸종될 것이고, 그의 회사는 해당하는 멸종 크레딧을 납부하면 된다. 독쑤기미의 지능이 없다면 1개, 지능이 있다면 13개를 납부해야 한다. 그를 위해 그는 회사의 멸종 크레딧 13개를 갖고 있다.
세계멸종위원회가 멸종 기준을 완화할 것이라는 계획을 미리 알게 된 주인공은 자신이 관리하는 회사의 멸종 크레딧을 팔고 현금을 챙긴다. 곧 계획이 공표되고 멸종 크레딧 가격이 폭락하면 그때 다시 크레딧을 구입해서 회사에 돌려주면 된다. 일종의 공매도인 것이다. 그는 꿈에 부푼다. 그렇게 그는 영리한 개미 투자자다.
그러나 개미 투자자 위에는 언제나 개미핥기 같은 작전 세력이 있는 법. 주인공이 부자가 될 꿈에 부풀어 있는 어느 날 사고가 터진다. 세계멸종위원회의 데이터베이스 센터가 해킹 당하고, 센터에 보관되어 있던 모든 생물종의 DNA와 자료가 소멸된다. 멸종 크레딧 가격은 폭등하기 시작한다. 주인공의 부자의 꿈은 감옥의 공포로 바뀐다. 주인공은 회사가 알기 전에 어떻게든 13개의 멸종 크레딧을 채워 넣어야 하는 위기에 처한다.
작가 네드 보먼은 1985년생이다. 젊은 나이의 작가 답게 책도 젊고 산뜻하다. 나처럼 칙칙하고 우울하지 않다. 담고 있는 주제는 무겁고 암울해도 이야기의 전개 방식은 경쾌하고 매끄럽다. 이제 낡은 나는 그래서 오히려 몰입하기 어렵고 헷갈렸다. 책에 등장하는 많은 생물종 이름과 유럽의 지역명과 사건들. 그것들이 작가의 지어낸 허구의 것인지 실제의 것들인지 구분하기가 어려웠다. 이야기의 분위기와 감성도 나에게는 잘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반가운 것이 하나 있었다. 영화 '나의 사촌 비니'. 조 페시와 마리사 토메이가 주연한 코메디 영화 나의 사촌 비니가 책의 앞에서 그리고 뒤의 에필로그에서 다시 한 번 거론된다. 어떤 장치로 이 영화 얘기를 넣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젊은 시절 내가 재미있게 봤던, 그러나 별로 유명하지도 않은 1992년 영화를 이 젊은 작가가 의미심장하게 다룬 것 자체가 반가웠다.
책은 블랙 코미디다. 멸종과 환경 뿐만 아니라 인공 지능, 경제 시스템, 미래에 대해서도 재미있는 관점을 보여준다. 그러면서도, 나에게는 이야기의 전개가 지루하고 산만했다. 하지만 매번 반복되어 오는 좋은 이야기의 뻔한 책들과 트렌디하고 독특하게 뻔한 책들에 질려있던 나에게 이 책은 그 소재와 주제 만으로도 충분히 인상적이고 강렬했다.
"동물 학살은 거대한 공동 프로젝트였다. 어쩌면 인류의 기본적인 프로젝트일 수도 있다. 모든 사람이 조금씩 기여하는 자선 활동이나 전쟁처럼 말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기여는 매우 단편적이고 간접적이라서, (...) 희생자의 의식에 깊은 인상을 남길 기회가 없었다." (343쪽)
작가의 모든 생각을 내가 알 수는 없다. 작가의 모든 이야기에 내가 다 공감을 하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에게 깊이 공감하는 것이 있다. 망하는 것은 지구가 아니라 인류다. 인류는 스스로 파멸의 길로 들어섰지만, 자연은 계속될 것이다.
"결국 인류는 종말을 맞이할 겁니다. 그 후 인류가 남긴 상처가 사라질 것입니다. 생물다양성은 다시 회복될 겁니다. 새로운 종들이 탄생할 것이고, 그중 상당수는 사라진 종들만큼이나 놀라운 종이 될 것입니다."(40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