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한 구원
에단 호크 지음, 김승욱 옮김 / 다산책방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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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유부남 아니에요?" 그녀가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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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비상구 계단을 살금살금 내려와 주차장으로 가서, 남들이 볼 수 없는 곳에 이르자마자 입을 맞췄다. 키스가 어떤 것인지 나는 잊고 있었다. 내 품에 안기고 싶어 하는 사람을 품에 안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도 잊고 있었다. 내 손길에 녹아내리는 사람, 내가 자신의 치마 속으로 손을 넣어주기를 바라는 사람, 내 손이 더 멀리까지 닿기를, 더 심하게 밀어붙이기를 바라는 사람, 그럴 때 작게 소리를 내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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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욕망이 아니었다.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몇 년 만에 처음으로 나는 인간이 된 기분이었다. 이 세상에서 나고 죽는 인간. 지금 이곳에 나는 살아 있었다.
(31 쪽)


아내였다. 혈관의 피가 멈추는 기분으로 나는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내가 힘들게 말했다.
내 귀에 들리는 것이라고는 내가 영원히 사랑하겠다고 약속했던 여자가 걷잡을 수 없이 흐느끼는 소리뿐이었다. 그녀는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울기만 하다가 숨을 몰아쉬고는 또 엉엉 울었다.
"미안해, 미안해, 당신을 정말 사랑해" 내가 말했다. 메리는 거의 숨도 쉬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나는 다시 말했다. "당신을 정말 사랑해. 미안해"
그녀가 전화를 끊었다. 내가 곧바로 다시 걸었지만 그녀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145쪽)

스무 살 시절에 나는 사랑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사랑은 정의 내리기에는 너무나 가슴 벅찼다. 규정 짓기에는 너무나 혼란스러웠다. 이해하기에는 너무나 숭고했다. 담아두기에는 너무나 뜨거웠다.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 파괴적이었다. 함께하기에는 너무나 아팠다. 포기하기에는 너무나 달콤했다. 버리기에는 너무나 아름다웠다. 외면하기에는 너무나 어지러웠다. 무엇인지 알 수조차 없는 사랑은 나를 부드러운 미풍에 실어서 짓무른 꽃내음 가득하고 햇살 따사로운 공중으로 둥실둥실 떠올려 주었다. 그리고선 변덕스럽게 나를 끌어내려 쓰러뜨리고 굴리고 짓밟고 모욕하고 더럽혔다. 사랑은 나를 오물 속에 내동댕이쳤다. 그러고 나서도 사랑 그놈은 끝내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리고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사랑이 무엇인지 모른다. 사랑은 숭고하다고 하기에는 너무 원초적이고, 파괴적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관대하고, 아프다고 하기에는 너무 요란하고, 달콤하다고 하기에는 너무 계산적이고, 아름답다고 하기에는 너무 초라하고, 어지럽다고 하기에는 너무 맹목적이다. 이제 사랑이 무엇인지 찾기에는 나는 너무 비루하고, 누추하고, 탐욕스럽다. 이제 사랑마저 내게 오면 부끄러운 무엇이 된다. 그 정도로 나는 더럽혀져 살아왔다. 내 손으로.


도서관이었다. 다시 영미소설 신작 코너였다. 작가의 이름이 눈에 확 들어왔다. '에단 호크' 그 에단 호크인가? 책을 뽑았다. 맞다. 그 에단 호크다. '죽은 시인의 사회'의 그 여린 소년, '가타카'의 그 절박한 젊은이, '트레이닝 데이'의 그 거친 형사, '비포 시리즈'의 그 에단호크, 그가 지은이였다. '톰 행크스'의 '그렇게 걸작은 만들어진다'를 보았을 때처럼 부러움과 호기심, 그리고 질투심이 확 밀려왔다.

이 책은 에단 호크가 쓴 소설이다. 연극에 대한 얘기고, 예술에 대한 얘기고, 사랑에 대한 얘기고, 상실에 대한 얘기고, 위로에 대한 얘기고, 치유에 대한 얘기고, 이별에 대한 얘기다. 그리고 지루한 얘기고, 뻔한 얘기고, 진부한 얘기다. 그러면서도 매혹적인 얘기다. 그렇게 삶은 상투적이다. 한 번 밖에 살지 못하면서도.


영화 배우에 대한 이야기였다. 30대 후반의 남자 영화 배우, 세계적인 록스타를 부인으로 두고서 한 순간 일탈을 한 영화 배우. 그로 인해 이혼을 겪게 되고, 덕분에 온 세상의 조롱을 받는 유명한 남자 배우. 그런 그가 뉴욕의 연극 무대에 서는 이야기다. 그렇게 연기를 통해서 자신을 찾아가는 이야기다.

호기심으로 시작했지만, 처음에는 진도가 나아가지 않았다. 책을 잡고 있으면 자꾸 눈이 감겼다.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읽을 때는 눈이 번쩍 뜨였다. 내 얘기 같았다. 그러나 다른 이야기가 나올 때는 지루했다. 그러다가 점점 빠져들었다. 책을 다 덮은 지금 내 가슴은 따뜻하게 벅차오른다.

책은 많은 이야기를 한다. 그러나 나는 사랑 얘기만 말하련다. 다른 이야기는 하지 않으련다. 가족에 대한 이야기나 연기에 대한 이야기는 말하지 않으련다. 다른 얘기들까지 하는 건 나에겐 너무 버거운 일이다. 처음 시작할 때 사랑에 대한 얘기로 읽었듯이, 다 읽은 지금 사랑의 얘기로만 기억하겠다. 아니, 솔직하게 말하자. 다 읽은 지금 나에게 이 얘기는 사랑 얘기가 아니다. 이 얘기는 욕망에 대한 얘기고, 고통에 대한 얘기고, 실존에 대한 얘기다. 삶은 그렇게 혼란스럽다. 최소한 나에게는.

"우리 둘 다 서로를 놓아 보내고 있었다. 우리는 미친 듯이 서로를 사랑했다. 수많은 젊은 연인들이 그렇듯이, 우리는 시를 쓰고, 별을 보고, 서로를 끌어안은 채 밤을 꼬박 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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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달플 때도 있고, 고통스러울 때도 있고, 하기를 잘했다 싶기도 하고, 끝나서 다행이다 싶기도 했다. 이 모든 감정이 어떻게 동시에 진실일 수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정말로 진실이었다"
(3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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