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호자들
존 그리샴 지음, 남명성 옮김 / 하빌리스 / 2023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수호자들>

이 책은 법정 스릴러의 대가인 존 그리샴의 작품입니다. 존 그리샴은 변호사 출신의 소설가로, 1989년 타임투킬로 데뷔하여 47권 연속 베스트셀러 1위에, 전 세계에서 3억부 이상이 팔려나간 어마어마한 베스트셀러 작가입니다.

아마도 그의 최전성기는 데뷔 직후부터 90년대 일 겁니다. 발표하는 작품마다 흡입력 뛰어난 이야기와 탄탄한 짜임새로 초대형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소설들은 영화로도 만들어져, 당대의 최고 배우들이 출연하여 뛰어난 완성도를 자랑하는 흥미 만점의 영화로 재탄생 했습니다.
그의 작품들은 쉽고 평이한 문장으로 쓰여져 술술 읽힙니다. 탄탄한 구성속에 이야기를 풀어놓는 재미가 탁월해서 특별한 반전이나 유별난 소재 없이도 이야기 자체의 재미에 빨려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면서 소박한 행복과 카타르시스를 줍니다. 왜곡되고 구겨진 정의가 제 자리를 찾아가는 희열을 느끼게 해줍니다.

존 그리샴은 제가 읽은 스릴러 작가 중에서 스티븐 킹과 더불어 가장 뛰어난 스토리텔러입니다. 사실 스티븐 킹에서 호러를 떼어내고, 존 그리샴에서 법정을 떼어내도, 그들은 여전히 삶에 대한 통찰과 인간에 대한 애정을 보여주는 탁월한 이야기꾼들입니다. 무협지에서 김용이 그러하듯이. ㅋ

그는 법정 스릴러 말고도 '시어도어 분 시리즈' 같은 아동용 법정 소설이나 일반 소설도 발표했지만 국내에서는 큰 호응을 얻지는 못했습니다. 그의 법정 스릴러들 또한 2000년대 들어서면서 초기작들의 신선하고 탄탄한 재미를 보여주지는 못했습니다.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힘도 많이 딸리고, 소재도 점점 진부해지는 느낌을 주었죠.
2017년 불량 변호사 이후 국내에서 그의 소설들이 출판되지 않았는데, 작년부터 다시 그의 책이 국내 출판되는 것 같습니다. 작년의 '카미노 아일랜드'에 이어서 올해 이 책 '수호자들'이 출간되었습니다.

존 그리샴은 그의 흥미만점인 법정 스릴러 속에서 일관되게 약자에 대한 연민을 보여주는 작가입니다. 또한 미국 사법 제도에 대한 문제의식과 사형제도에 대한 회의와 비판을 보여줍니다. '가스실', '고백', '이노센트 맨'등은 사형제도를 소재로 쓴 작품들이구요.
수호자들 또한 재미있는 법정 스릴러 소설입니다. 무고한 장기수들의 결백을 증명하고 석방시키는 일을 하는 ‘수호자 재단’과, 그 재단의 핵심 인물인 성공회 신부이자 변호사인 주인공의 이야기입니다. 비록 초창기 소설들처럼 압도적인 긴박감과 쫄깃쫄깃한 스릴은 부족해도, 여전히 탄탄하고 시원시원한 재미를 느낄 수 있습니다.

이번 '수호자들'에서도 미국 사법 제도에 대한 그의 문제 의식은 여전합니다. 그러나 그가 탁월한 베스트셀러 작가인 것은 문제 의식을 소설의 재미 속에서 잘 녹여낸다는 것입니다. 주제에 매몰되어서 소설적 재미를 떨어뜨리는 것이 아니라, 소설의 재미를 위한 소재에서 멈춥니다. 그러면서 이야기를 약자에 대한 연민 속에 풀어 놓고 있습니다.

그의 소설들을 읽어보면 돈에 의해서 좌지우지되는 미국 사법 시스템의 모순은 그 나라의 시민에게는 큰 문제로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제가 볼 때는 돈에 의해 좌우될망정 미국 사법 시스템은 규칙에 의한 시합으로 보여집니다. 메시나 호날두를 스카웃해서 우승하는 프로 축구처럼.
돈만 많으면 엄청난 물량 공세로 배심원들을 뒤흔들 수 있는 미국 사법 제도는 분명 문제가 많은 제도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돈으로 규칙을 활용할 수는 있지만, 돈으로 규칙을 멋대로 바꾸지는 못합니다. 규칙 따위는 뻔뻔하게 팽개치고 판사와 검사 맘대로 법을 유린하는 우리 나라 사법 제도를 생각하면 , 그들의 사법제도가 부럽기만 합니다. 그들의 사법 제도에서는 판사와 검사도 플레이어의 하나일 뿐입니다. 재판이라는 도박장의 하우스장도, 전주도 아닙니다.
미국 사법제도에 대한 그의 문제의식을 보여주는 몇몇 구절들을 책에서 뽑아 보았습니다.

"제대로 된 재판에서는 교흔, 이른바 물린 자국과 모발 분석이 신빙성을 상실한지 오래다. 두 가지 다 뒤가 구리고 항상 변하는 지식 분야로, 무죄를 주장하는 피고 측 변호인들 사이에서 '쓰레기 과학'이라는 조롱을 받고 있다. 자격이 없는 전문가들과 이들의 근거 없는 유책 이론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억울하게 교도소에 갇혀 있는지 아무도 모를 것이다."(21 쪽)

"백인들의 미국에서 교도소는 나쁜 사람들이 저지른 범죄의 대가를 치르는 곳이다. 흑인들의 미국에서 교도소는 소수 인종을 길거리에서 보이지 않게 치우는 데 사용하는 창고 같은 곳이다."(79 쪽)

" 그 교도소 역시 주 정부가 아닌 일반 회사에서 이익 창출을 위해 운영하고 있다. 그 말은 교도관들의 월급이 짜고, 교도관들의 수가 적고, 원래도 끔찍한 음식이 더 수준이 낮고, 매점에서는 땅콩버터에서 화장실 휴지까지 모든 물건을 두고 재소자들에게 바가지를 씌우고, 의료적 보살핌이 거의 전무하다는 말이다."(86 쪽)

"1980년대와 90년대에는 형사 재판에서의 전문가 증언이 급격히 증가했다. 인기 높은 텔레비전 범죄 드라마들에서는 법의학 수사관들을 오류 없는 과학에 근거해 복잡한 범죄 사건을 해결하는, 유능하고 똑똑한 탐정처럼 묘사했다. 판사들은 과학에 압도당해 버렸고, 독학으로 이해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적거나 아예 없었다. 그들의 이력서가 두꺼워지면서 피고를 유죄로 모는 그들의 이론도 점점 더 다양해졌다."(104 쪽)

" DNA 검사는 범죄 수사의 미래를 바꾸어 놓았을 뿐 아니라, 쓰레기 과학에 대해 신선하고 파괴적인 검토가 필요하다는 인식을 불러왔다. DNA 검사를 통해 풀려난 무고한 사람들의 절반 이상의 경우가 검찰이 제시한 근거 없는 법의학적 추리를 기본으로 하고 있었다."(105 쪽)

"확실한 건 교도소는 거대 고용주라는 점이다. 교도소를 유치할 수 있을 정도로 운이 좋은 지역에서는 그 어떤 사업장보다 많은 일자리를 제공한다. 미국에서는 200만명이 넘는 사람이 교도소에 갇혀 있다. 이를 운영하려면 1백만 명의 직원과 800억 달러의 세금이 필요하다."(131 쪽)
"연방 법원이든 주 법원이든 대부분의 항소심 판사들은 일단 이런 유의 사건을 무시하고 본다. 이미 수십 년을 끌어온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한번 피고가 유죄라는 판결을 내리면 아무리 새 증거물이 나온다고 해도 마음을 바꾸는 일이 드물다."(248 쪽)

"조이 바는 강간죄로 7년째 복역 중이다. 그는 결백을 주장하고 있다. 그의 피해자 역시 그와 같은 입장이다. 두 사람은 그들의 관계가 합의 하에 이루어졌다고 했다. 조이는 흑인이고 여자는 백인이다. "(265 쪽)

"하지만 우리는 웬만하면 교도관은 손대지 않으려고 해. 당신 말고도 많은 교도관들이 물건을 배달해 주면서 뒷돈을 챙기잖아. 교도소장은 재소자들이 약에 취해 있기를 바라는 사람이니까 별로 신경도 안 쓰고. 죄수들은 제대로 걷지 못해야 얌전하게 있으니까. 교도소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알잖아. 우린 교도소 금지 품목의 밀매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아. 우린 훨씬 중요한 걸 쫓고 있다고."(355 쪽)

"나도 사람인지라 판사들이 경멸스러울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특히 사건을 제대로 보지 못하거나 나이가 많거나 백인이면 더욱 그렇다. 그들은 대개 검사 신분으로 법조계에 입문했고, 범죄 혐의를 받는 사람에게 한 치의 동정심도 보여 주지 않는다. 그들은 기소된 사람들을 무조건 유죄 취급하며 마땅히 감옥에 보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논리에 따르면 사법 체계는 잘 돌아가고 정의는 늘 승리한다."(362 쪽)

"무고한 사람을 다루는 재판이 시간은 아무 문제도 아니라는 듯 길게 늘어지는 경우를 수없이 보았다. 그럴 때마다 나는 거만한 판사들을 강제로 교도소에 주말 동안 가두어 둘 수 있기를 수백 번 기도했다. 사흘 밤만 그렇게 해 본다면 그들의 직업의식은 놀라울 정도로 투철해질 것이다."(511 쪽)

"밀러 씨, 당신에게 잘못된 판결을 내려서 20년 넘게 가둔 사람들은 오늘 이 법정에 없습니다. 그들이 언젠가 오심에 관한 책임을 지게 될 것인지 저는 모릅니다. 저는 그들의 뒤를 추적할 권한이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적어도 당신이 우리의 법률 체계에 의해 끔찍한 학대를 당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저 역시 그 체계의 일부로서 당신에게 벌어진 일에 사과드립니다."(515 쪽)


저는 사형제를 찬성합니다. 양심수 석방과 사형제 폐지를 주활동으로 하는 국제 사면 위원회의 20년 넘은 (유령) 회원이면서도 사형제를 찬성합니다.
사형이 강력 범죄를 줄이지 못한다는 연구, 오심에 의한 억울한 사형의 엄존하는 가능성, 사형은 법이 저지르는 또 다른 살인이라는 사형 반대론자들의 주장을 저는 이해하고 공감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형은 절대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굳이 조봉암이나 인혁당 사건이나 민족일보같은 고의적인 사법 살인이 아니더라도.

근데 그러다가도 유영철이나 조주빈같은 자를 보면 사형을 원하게 됩니다. 저는 복수도 정의의 일부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사적 복수와 사적 정의까지 저는 믿습니다. 온전히 사법제도에만 기대기에는 우리의 사법제도는 너무나 부실합니다.

하지만 저는 또한 사법제도가 너무 부실하기 때문에 사형 반대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자세가 되어 있습니다. 다만, 그 전에 가석방없는 종신형이 도입되어야 겠지요. 인권 침해라는 비판에도 불구하고요.

사형제를 찬성하면서도, 사형제 반대의 목소리에 솔깃해지는 저. 너무 귀가 얇은 것 같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