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읽는 여성 세계사 - 그 많던 역사 속 여성들은 다 어디로 사라졌을까
케르스틴 뤼커.우테 댄셸 지음, 장혜경 옮김 / 어크로스 / 2018년 3월
평점 :
절판


서문이 꽤 인상적입니다.

읽으면 읽을 수록 마음을 파고듭니다.


빠진 퍼즐 채우기


세계사는 '어쩌면'으로 시작해야 한다.


어쩌면 지구의 모든 생명은 폭발로 시작되었을지도 모른다. 빅뱅이라는 이름의 대폭발로. 어쩌면 처음엔 모든 것이 황량했고 텅 비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다 작디작은 단세포들이 거대한 공룡으로 진화했다. 어디선가 원숭이가 두 발로 일어서 도구를 이용하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최초의 인간이 탄생했다. 어쩌면.


어쩌면 이 모든 일들은 전혀 다르게 흘러갔을지도 모른다. 혹은 비숫하지만 우리가 아는 것과 똑같지는 않았을 것이다. 역사에 대해, 지나간 것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자주 '어쩌면'이라고 말해야 한다. 우리가 모르는 것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우리가 진실이라고 믿는 대부분은, 심지어 교과서에 적힌 내용도 알고 보면 그저 추측에 불과하다.


물론 우리가 내린 대부분의 결론은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과거는 흔적을 남기고 우리는 어디서나 그 흔적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그중에는 눈에 잘 띄지 않는 흐릿한 흔적도 많다.가령 모서리가 칼처럼 날카로운 돌이 있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돌을 저렇게 깎은 것일까? 아니면 큰 바위에서 부서져 떨어진 것일까?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알고 보면 그렇지 않은 신호들도 많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누군가가 한 해 한 해 기록한 책. 신문이나 편지가 바로 그런 것들이다. 그 사건의 기록에는 특정한 이해관계와 의도가 숨어 있는 건 아닐까? 그 기록을 남긴 사람이 역사에 영웅으로 남고 싶었던 누군가에게서 뇌물을 받았을까? 애당초 실제 사건을 기록할 목적이 아니라 교훈 넘치는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 쓴 걸까? 편지를 쓴 사람이 누군가를 싫어해서 그를 모함했을까? 갑자기 많은 것들이 예전처럼 명확하지가 않다.


역사가들은 많은 증거와 개별 자료들을 수집해 정성껏 조사한다. 그런 다음 결론을 내리고 이론을 정립한다. 그러나 그 후에도 이론은 수정을 거듭한다. 그래서 완벽한 설득력을 갖춘 듯 보이는 이론이 도로 전부 폐기되는 일도 다반사다.


역사를 기록하는 사학자들은 이런 뒤엉킨 기록의 그물망을 해쳐 진실을 찾기 위해 싸워야 한다. 어떤 증거를 신뢰할지, 어떤 증거를 신빙성 있다고 여길지를 결정해야 한다. 그로부터 판단이 탄생한다. 그들의 고단한 퍼즐 작업은 '어쩌면'을 '다분히'로 만든다.


퍼즐 조각을 전부 다 손에 넣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역사가들은 쉬지 않고 퍼즐을 맞춘다. 그러한 현실이 실망스러울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매력적이기도 하다. 과거를 상상할 수 있을 만큼 많은 조각을 손에 넣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늘 따라다니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세계사의 퍼즐은 하필 여성과 관련된 조각들이 많이 빠져 달아나고 없다. 이유는 여러 가지다.


세계사를 이야기할 때 우리는 특이한 일, 세상을 바꾼 사건에 집중한다. 전쟁과 건국, 새로운 종교의 탄생, 기술의 발명에 눈을 돌린다. 그런데 그런 일은 주로 남자들의 몫이었고, 그 순간 여자들은 가사와 요리와 육아에 힘을 쏟았다. 세계 어디서나 오랜 시간에 걸쳐 사정이 그렇다 보니 남자들이 유명인이 되어 역사책에 이름을 올릴 가능성이 훨씬 높았다.


하지만 전부 그렇지는 않다. 인류 역사를 살펴보면 자신을 가둔 울타리를 부수고 밖으로 나온 여성들이 늘 있었다. 그들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것, 자신이 잘할 수 있는 것을 행동으로 옮겼다. 그들은 나라를 다스렸고 전쟁터에 나가 싸웠으며 철학자, 작가, 작곡가, 의사가 되어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능력을 입증했다. 유명한 여성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많았다. 다만 그들에 대한 정보가 부족할 뿐이다. 그 이유는 여성이 비범한 일을 하면 올바르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사람들이 생각하는 세계 질서를 거슬렀기 때문이다. 비범한 일은 남자들이 할 테니 여자는 살림이나 해라!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시대의 사건을 기록한 남성들이 여성의 업적을 무시해버리는 일이 자꾸만 일어났다.


이미 고대 이집트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 여성 파라오 하트셉수트가 세상을 뜬 후 사람들은 건축물에 새겨진 그녀의 이름을 도로 파내버렸다. 몽골에서도 여성의 역사가 기록된 부분을 모조리 잘라낸 13세기의 양피지가 발견되었다. 로마인들도 다르지 않았다. 로마의 역사는 1000년에 가깝지만 등장하는 여성의 숫자는 적어도 너무 적다. 훗날 여성들의 이름이 기록에서 삭제되었을 수도 있지만, 전사들의 사회였던 로마가 애당초 여성에게는 두드러진 업적을 쌓을 기회를 주지 않았을 가능성이 더 높다. 어쨌든 우리는 로마 여성들에 대해 아는 것이 너무 없고, 어쩌다 알고 있는 것도 별로 흥미롭지 못한 내용들뿐이다.


그럼에도 어떤 여성이 용감하게 역사에 끼어들고자 했다면, 그녀는 모략을 일삼고 잔인하며 거짓말을 입에 달고 사는 매우 나쁜 여자로 기록되었다. 전 세계의 역사가들이 비슷한 목적을 위해 그런 짓을 저질렀다. 여자가 역사에 끼어들면 나쁜 일이 생긴다는 사실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입증하려 한 것이다.


안타깝게도 여성에 관한 기억을 지우려 한 남성들의 전략은 잘 먹혔다. 유명한 여성 작가들에 대해 우리가 아는 것은 그녀들이 유명했다는 사실뿐. 정작 그들의 글은 사라지고 없다. 남성 작가들의 작품은 필사를 거치면서 고이 보관되어 전해졌다. 남성과 여성이 편지를 주고받았을 경우에도 남성이 쓴 편지들은 지금껏 남아 있지만 여성이 쓴 편지들은 고의적으로 폐기했거나 부주의로 잃어버린 경우가 많다. 그 결과 기나긴 역사의 흐름을 거치는 동안 망각이 베일처럼 여성의 삶과 활동을 덮어버렸다. 하지만 최근 들어 역사학자들이 아직까지 남은 흔적들을 찾기 시작했고, 그 덕분에 우리는 50년 전이나 100년 전에 비해 훨씬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역사 속 여성을 가려놓은 베일이 조금씩 걷히고 있는 것이다.


이 책에서 우리는 다시금 세계사의 퍼즐을 맞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역사에 중요한 업적을 남긴 수많은 남성들을 골라내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 역시 편파적인 이미지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과거에 일어난 일을 지울 수는 없다. 따라서 전혀 다른 새 퍼즐을 맞추려는 것이 아니다. 이미 알고 있는 퍼즐에 몇 개의 빠진 조각을 채워 넣으려는 것이다.


우리는 여성들만의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또 역경을 딛고 위대한 사상가, 예술가, 정치가가 된 강인하고 총명하고 용감한 모든 여성의 이야기를 들려줄 수도 없다. 물론 그렇게 된다면 그야말로 진짜 '여성 세계사'가 탄생할 것이고, 그것 역시 분명 흥미로운 일이다. 그러나 그런 역사는 다시금 특수한 부분을 다룬 분야별 역사로 그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여성이 모두의 역사로 존재하는 일은 또 다시 요원해질 것이다.


제가 꽂힌 것은 역사에서 지워진 여성들이 아니라 '어쩌면' 입니다. 어쩌면으로 시작해야 하는 것은 역사만이 아닐 겁니다. 많은 학문들이 학자들의 '다수결'인 걸로 저는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진실이라고 믿는 대부분은, 심지어 교과서에 적힌 내용도 알고 보면 그저 추측에 불과하다'는 것은 역사 뿐만이 아닐 것입니다. 아주, 아주 많은 것들이 그렇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서문에 꽂혀서 책을 샀는데, 언제 읽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늙어가는데, 읽는 걸 미뤄 놓은 책은 점점 늘어만 갑니다. 책 읽는 거 말고 할 게 얼마나 많은데, 정말 재미있는 소설책과 만화책읽기도 부족한데, 자꾸 엉뚱한 빚만 늘어가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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