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 좌파 - 민주화 이후의 엘리트주의 강남 좌파 1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1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강준만에 따르면 강남좌파라는 표현이 처음 등장한 것은 2006년 이해찬 총리 3.1절 골프파동 직후 동아일보에 실린 칼럼에서라고 한다. 서민을 대표한다는 노무현 정권의 많은 고위 공직자들이 대놓고 골프 같은 귀족스포츠를 즐기는 이율배반적 행태를 비꼬면서 만들어낸 용어이다.

강준만은 노 정권이 자기편 인사를 대거 기용한 것을 두고 한국 정치의 고질적인 승자 독식주의라고 지적했는데, 개혁을 바랐으나 인재는 부족했던 노 정권으로서는 열린우리당으로 모여든 소위 ‘70%의 기회주의자들까지도 아우를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그것은 견고한 보수 정치판을 개혁하는 데 수반되는 기회비용이 아니었을까? 문재인의 <운명> 서평에서도 말했지만 노무현은 한국정치에서 참 특이한 사람이다. 그는 한국정치 지형을 개혁하고픈 열망이 컸으나 현실적인 힘은 부족했고 시간도 턱 없이 모자랐다. 때문에 승자 독식주의의 오명을 얻으면서까지 판도를 바꾸려고 무리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그건 실패가 예정된 싸움이었다. 노무현 자신이 그런 속성을 지녔건, 그의 최측근 세력이 그런 속성을 지녔건, 그가 세를 불리기 위해 감싸안은 주변인사들이 그런 속성을 지녔건 간에 노무현 정권은 강남좌파적이었고, 그로 인해 서민들의 지지를 잃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2004 6, 노무현 전 대통령은 대선 공약이었던 아파트 분양원가 공개 계획을 철회함으로써 노 정권의 강남좌파적 정체성을 드러냄으로써 서민들의 신뢰를 잃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해마다 실시된 고위공직자 재산공개에서 노무현 정권의 공직자들의 재산이 크게 늘어난 것으로 밝혀짐에 따라 비판은 더욱 고조되었다. 5년간 주변세력을 공고히 할 것인가, 대중의 지지를 공고히 할 것인가? 노무현은 전자에 더 집중했고 이는 후자의 실패로 연결되었다. 결국 그것은 정권의 몰락을 의미했다.

다른 한편으로 노정권의 인사가 영남 민주화 세력의 한을 해소하는 방향으로 나아간 측면도 있다는 주장을 강준만은 지지한다. 1971년 대선에서 박정희와 김대중이 대권을 두고 다툰 이후 민주화세력=호남세력이 되어 버렸고, 영남 지역의 민주화세력은 (마치 예수처럼?) 고향에서마저 환영받지 못했다. 1990년 김영삼마저 3당합당으로 반민주화 대열로 돌아섬으로써 영남 민주화세력의 한은 증폭되었다. 노정권 내 소수파는 이런 한을 푸는 데 지나치게 집중했다는 것이다. 노무현이 집권 후반기에 한나라당과의 대연정을 제안한 것도 이러한 한의 연장선 상에서, 즉 영남 민주화세력이 입지를 공고히 하려 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자신을 대통령으로 뽑아주었건만 그 이후 총선, 재선에서 계속 한나라당만 뽑아주는 지역민들을 보며 한나라당과 대연정을 해야겠다는 생각은 노무현에게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었을지도 모른다.

노무현 정권에 대한 평가야 어찌 되었건, 보수언론이 처음에 비꼬는 말투로 노정권을 강남좌파라고 지칭한 이후 이 용어는 다소 의미가 넓어지고 긍정적인 뉘앙스마저 더해졌다. 서울대 조국 교수가 강남좌파로 불리는 것을 개의치 않는다고 밝혔을 때는 이미 강남좌파에 대한 부정적 의미는 많이 탈색된 뒤였다. 강남좌파 현상은 한국사회에서 무엇을 의미하는가?

강준만은 마지막 챕터에서 한국의 학벌주의에 대해 비판하면서 강남좌파 현상을 엘리트주의와 연결시켜서 바라본다. 진보, 보수를 막론하고 (심지어 민노당마저) 정치권 지도부는 일류대 출신들이 장악하고 있다. 학력사회인 한국에서 고학벌은 강남적 삶을 보장한다. 고학벌 강남 보수주의 정치인들에게 고학벌 강남 진보주의자들을 강남좌파로 비하하기란 무척 쉬운 일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보면 강남좌파란 결국 엘리트들끼리 밥그릇 싸움 하면서 나온 시기 섞인 표현일 뿐이라고 할 수 있다. 강남좌파라는 용어나 강남좌파 현상를 통해서 주목해야 할 더 근본적인 문제는 한국 정치(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가 고학벌 엘리트들이 장악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금까지 그래왔듯 지들끼리 다 해먹으면 별문제가 없을 텐데 노무현 정권 때부터 주머니에 넣은 송곳처럼 삐져나오는 세력들 때문에 보수 엘리트는 심기가 불편했을 법도 하다. 그렇다면 강남좌파 현상은 한국사회 정치엘리트 내에 나타난 조그만 일렁임인가? 그저 그뿐인가? 강준만의 시각은 여기에서 멈춘다.

강준만은 신문방송학 전공자답게 글은 잘 쓴다. 말도 그럴듯하고 글 속에 이런저런 생각을 많이 반영한다. 그러나 글의 화려함에 비해 깊이는 떨어지는 것 같다. 뭔가 그럴 듯한 주장을 하기는 하지만 확실한 논거는 없다. 최근에 벌어진 사건들에 대한 사설들을 조목조목 비판하지만 거시적, 역사적 안목에서 종합적인 분석을 제시하지는 못한다. 그게 신문방송학이라는 학문적 특성인지 한계인지는 모르겠다. 이 책은 마치 긴 신문사설 같다. 신문사설은 짧은 지면에 할말을 다 담아야 하기 때문에 주장과 논거가 매우 압축적이다. 사설에서는 특히 깊이 있는 논거를 제시할 공간이 부족하다. 이 책은 지면을 400쪽 넘게 늘렸음에도 여전히 사설 같다.

그렇지만 이 책은 게으른 독자들에게 고마운 책이다. 강준만은 최근에 실렸던 여러 신문의 사설들을 지루할 정도로 길게 인용하고 쭉 연결해 놓았다. 책 참 쉽게 만들었다는 느낌도 든다. 그렇지만 독자들은 이 책만 읽으면 그 많은 사설들을 다 섭렵한 셈이 된다. 물론 강준만의 시각에서.  주제와 관련된 사설들을 찾아서 붙여놓고 중간중간 해설을 달아 준 정성도 물론 인정해주어야 할 것이다.

엄밀히 말해 책의 많은 챕터들은 강남좌파 논쟁과는 직접적 상관이 없다. 몇 챕터를 제외하면 강준만이 계속 해오던 인물비평, 시사평론과 크게 새로울 것이 없다. 오히려 강남좌파라는 이 책의 제목보다는 부제인 민주화 이후의 엘리트주의가 제목으로 적합하다.

글은 술술 잘 썼는데 어법에 안 맞는 표현이 자꾸 거슬렸다.

  • 를 잘못 띄어쓴 경우가 있었다. 저자나 편집부에서 착각한 걸로 보인다. 이런 초보적인 실수는 안 했으면 좋겠다.
  • 사람과 직함을 붙여서 언급할 때 대개 직함+이름으로 쓰다가 가끔씩 이름+직함으로 쓰기도 했다. 일관성이 없는 것도 문제이거니와, 저자는 직함+이름은 상대를 낮춰부르는 것이고 이름+직함은 높여부르는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것 같다(참고로 아무개 교수, 아무개 국회의원, 아무개 아나운서라는 식으로 자기를 소개하는 건 예의가 아니다. 자기를 소개할 땐 직함을 이름 앞에 붙여야 한다).

강준만이 사실 확인에 그친 강남좌파현상을 좀더 거시적이고 역사적인 안목에서 분석하고자 한다면 다음과 같은 점들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강남좌파’ (혹은 다른 무엇으로 부르건)는 하나의 필연적인 시대현상인 듯하다. 특히 1980년대 이후 민주화의 세례를 받은 세대들(80년대에 30대였건 그즈음에 태어났건 간에)이 보수로 점철된 기존의 정치판에서 만족을 느끼지 못하고 기성정치세대와 스스로를 차별화하면서 사회적 현상으로 부각된 것이 아닐까? 한국의 정치는 한국전쟁 이후 산업화를 거치면서 보수주의적 구세대와 민주화 이후를 대변하는 신세대로 나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치는 여전히 구세대의 수중에 있었고 영남당과 호남당의 대립구도 속에 세대간 차이는 다소 희석되어 왔다. 어쨌건 기존 정치판도를 수용해야 정치판에 뛰어들 수 있는 것이므로. 그러다가 결국은 구세대와 다른 신세대의 가치가 점차 수면 위로 부각되기 시작한 것이다. 구세대는 그것을 좌파라고 (잘못) 부르고, 심지어 강남좌파라는 악의 섞인 비아냥까지 한다. 구세대가 구축한 물질을 누리고 살면서 구세대의 가치를 부정하는 것이 우습다는 것이다.

강준만은 모든 정치인은 강남좌파라고 다소 파격적인 주장을 한다. 모든 정치인이 강남적 삶을 사는 것이야 당연하고 보수, 진보를 막론하고 겉으로는 서민을 위하는 정책에 목소리를 높이기 때문이다. 내가 위에서 지칭한 신세대를 위해서는 강남좌파 말고 다른 용어가 필요할지 모르겠다. 아무튼 내가 말하려는 건 한국 근대사가 짜놓은 정치틀, 가치관, 의제, 정당체제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는 사람들이다. 그 중 엘리트에 돈도 많고 기존의 정치판에 이미 포섭된 사람은 이 책에서 보는 전형적인 강남좌파의 범주에 들 것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정치적 허무주의자나 반정치주의자 등의 범주에 속할 것이다. ‘강남좌파라는 용어가 보수세력에서 먼저 나왔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보수세력이 그들이 강남좌파라고 부른 어떤 세력의 존재로부터 위협을 느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어떤 세력이란 전통적인 보수주의 제도권 정치의 아성에 끼어든 이질적인 존재이다. 그 존재만으로도 한국정치가 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강남좌파 현상은 반세기 동안 이어져온 견고한 한국정치의 틀에서 움트는 세대변화의 일면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강남좌파라는 비아냥은 사회에 비해 그 변화속도가 느릴 수밖에 없는 정치권의 현실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리라. 새로운 가치관과 정치의식을 가진 새로운 세대들에 의해 영향을 받은 자들이 (혹은 그 세대들 자신이) 정치권에서 구세대와 다른 가치를 표방하고 나서는 것은 일단은 긍정적이라고 본다. 문제는 그들의 표방가치를 현실적 힘으로 강제할 추진력이다. 기존 정치판도가 혁명적으로 변할 수 없는 한, 그 힘은 진짜 좌파세력이나 민중에게서 나올 수밖에 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 - 자유 시장과 복지 국가 사이에서
토니 주트 지음, 김일년 옮김 / 플래닛 / 2012년 5월
평점 :
품절


영국에서 나고 유럽에서 배우고 영국과 미국에서 가르친 토니 주트는 단호한 사회민주주의자이다. 그러나 아마도 미국의 독자들을 염두에 둔 듯, 미국의 반사회주의 정서 때문에 저자는 아주 조심스럽게 의견을 개진하기 시작한다.

주트는 이 책에서 영국과 미국을 주요 분석의 대상으로 삼는다. 전반부에 소개된 시각화된 지표들은 독자들이 미국, 영국 및 유럽 각국을 비교하는 데 매우 유용하다. 소득 불평등이 높은 미국과 영국에서 유아 사망률, 기대 수명, 범죄율, 재소자 비율, 정신 질환, 실업, 비만, 영양실조, 10대 임신, 불법 약물 복용, 경제적 불안정, 개인 부채, 불안 등이 더 높게 나타난다. 그러나 유럽 국가들과는 다른 자본주의 발전 경로를 밟아온 한국의 경우에는 이 국가들과 직접 비교가 불가능하다. 후발 자본주의 국가로 1980년대 중반에 기본적인 경제성장을 완수한 한국을 분석하기 위해서는 이와는 다른 분석방법이 필요할 것이다(예컨대 국가간 비교보다는 1960년대 이후 10년 단위로 한국의 변화상을 볼 수 있는 지표들을 분석하는 식으로).

주트는 60년대 유럽과 미국을 휩쓴 혁명적 분위기가 아이러니하게도 전후 안정을 누리던 복지국가에 일격을 가했다고 주장한다. 사회민주주의적 복지국가가 유럽에 퍼지게 된 것은 두 세계대전을 겪고 난 뒤 경제 재건과 사회 통합,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공산주의와의 경쟁에서 비롯된 측면이 있었다. 지금과 달리 부자들은 세금을 많이 내는 데 거리낌이 적었고 국가의 적극적인 역할 속에 유럽 사회는 전례 없는 풍부한 삶의 기회를 누렸다. 그런데 68혁명이 상황을 전도시켰다. 68혁명 세대는 전후에 태어났거나 어린 시절을 보낸 전후 세대였다. 그들은 전전 세대와 많은 면에서 가치관을 달리 했다. 신좌파에게 복지국가는 자비로운 감시자에 불과했다. 이들은 집단주의, 하향식 통제와 조정을 거부하고 지나칠 정도로 개인의 권리를 옹호했다. “네 멋대로 해라.” 이러한 사고는 우파와 너무도 닮았다. 이때부터 10년 남짓한 시간이 지나는 동안 공적 담론 속에서 국가 개입과 공동선 추구는 힘을 잃고 말았다 (이것은 1970년대 이후 미국에서 사회적 자본의 감소를 분석한 퍼트남의 <나 홀로 볼링Bowling Alone> 리뷰 보기: Salad Bowling: Not Bowling Alone But Bowling Each이 나온 시대적 배경이기도 하다).

1970년대 후반과 80년대 초반 영국과 미국에서 본격적으로 신자유주의가 정책적으로 실시되었고, 그로부터 10년 뒤 현실 사회주의가 몰락함으로써 그 기세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20세기의 마지막 30년을 장식했던 지적 흐름은 한마디로 민영화에 대한 숭배라고 할 수 있다. 원래 민간부문이 떠맡기 힘든 사업을 국가가 떠맡았던 것인데, 이제는 거꾸로 효율성을 내세우면서 민영화가 진행되고 있다. 심지어 이윤은 민간기업에 보장해주고 손실은 국가가 떠안는 최악의 형태를 취하면서까지 말이다. 이러한 혼합경제는 당연하게도 도덕적 해이를 초래했고, 결국 2008년 경제 위기를 불러왔다.

시장에 대한 국가의 개입을 강조하는 주트는 2008년 세계 경제위기 이후 국가가 케인스주의 경제학으로 복귀한 것에 완전히 만족하지 못한다. 그는 이것이 일시적인 전략적 후퇴에 불과하다며 더 이상 국가와 시장 사이에서 선택하려 하지 말고 두 종류의 국가 사이에서 어떤 것을 선택할지 결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주트가 제시하는 해법은 매우 근본적이다. 5장은 레닌의 정치 팸플릿을 연상시키는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제목을 달고 있지만, 주트는 과격한 방법으로 제도나 체제를 바꾸자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가치나 도덕 같은 보다 근본적인 부분에서의 변화를 요청한다. 예전과 같이 공동의 목표를 추구하기 위해 공적 대화의 장을 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가장 시급한 공동의 목표는 단연 불평등의 해소이다. 불평등이 심한 곳에서는 다른 어떤 공동의 목표를 위한 담론이 형성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저자는 아주 쉬운 언어로 공동체적 삶의 중요성에 대해서, 복지의 필요성에 대해서, 국가의 필요성에 대해서 담담하지만 절절하게 이야기한다. 두꺼운 책이 아니지만, 그 가운데 할말은 다 하고 있다.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는 많은 책들이 있지만 이 책은 현학, 냉소, 독설 같은 것 없이도 강한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 (예컨대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리뷰 보기: Proletarians at Risk for Losing Everything As Well As Chains)나 <무너지는 환상>(리뷰 보기: Bonfire of Illusions: The Twin Crises of the Liberal World) 같은 책들과 비교가 된다). 책을 읽다 보면 그렇지, 사람 사는 세상이 이래서는 안 되는 건데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물질 만능주의, 불평등, 차별로 가득찬 현실은 사실은 어색하고 부자연스럽다. 그러나 그 부자연스러움이 언제부터인가 당연한 것으로,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겨져왔다. 부자연스러움을 자연스럽다고 자기 최면을 걸며 살아갈 것인가? 언제까지 자유 시장의 역기능과 사회주의에 대한 과장된 공포 사이에서우물쭈물 할 것인가?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 대개 1980년대 초반 이후에 영미에서 특징지워졌다는 것을 애써 상기하려는 이는 드물다. 1980년대에 당신이 너무 어렸거나 심지어 당신의 부모님이 만나기도 전이었다면, 비교의 대상이 없으므로 현 자본주의(신자유주의) 질서가 사상 유례 없이 불평등하다는 사실을 이해하기 어렵다. 만약 당신이 지금 40대 이상이라면 아마도 살아가기에 바빠 현실에 대한 비판과 저항은 젊은이들의 몫으로 넘기려 할지도 모르겠다. 지금 현실은 매우 부자연스럽고 불편하다. 그러나 거기에 맞서 싸우려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와 같은 책이 널리 읽혀야 되는 한가지 이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대한민국 금고를 열다 - 진보의 눈으로 국가재정 들여다보기
오건호 지음 / 레디앙 / 2010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저자 오건호는 특이한’ (?) 이력을 가졌다. 서울대 사회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지만 남들처럼 강단으로 가지 않고 2001년 민주노총 연구원으로 이력을 시작했고 그 후 민노당 심상정 의원 보좌관을 거쳐 공공노조 부설 사회공공연구소에서 일하고 있다.

이 책 또한 그의 이력만큼 특이하다. 보수, 진보 할 것 없이, 그리고 정치인, 일반인 할 것 없이 국가재정은 그 누구도 열심히 들여다보려고 하지 않는 분야이다. 복잡하고 규모가 커서 일선에 있는 극소수의 실무자가 아니라면 그 누구도 이해하기 쉽지 않은 게 국가재정이다. 그런데 저자가 그 국가재정에 대한 책을 냈다. 심상정 의원 보좌관 시절 국가재정을 들여다 볼 기회가 있었던 그는 맨땅에 헤딩하는 식으로 모으고 분석한 자료를 가지고 기어이 책을 낸 것이다. 그쪽 분야 전공자도 아닌 그가 이 정도까지 분석한 책을 냈다는 것은 그 자체로 박수 받을 만하다. 저자는 진보 진영이 국가재정에 친숙해지고 보수 정권에 좀더 효과적으로 대항할 수 있도록, 지금껏 본 적도 없는 가공할 만한 무기를 제공한다.

1980년대 이후 시장만능주의의 확산에도 불구하고 국가의 역할이 크게 변하지 않은 것이 바로 재정이다. 한국에서는 국가재정이 늘 사람들의 관심 밖이었는데,  금융 위기에 따른 재정 적자, 부자 감세, 4대강 사업 등을 계기로 2009년부터 쟁점으로 떠올랐다. 이것이 저자가 이 책을 쓰게 된 상황적 배경이다.

재정을 보면 정권의 계급적 성격을 알 수 있다. 이명박 정부의 2009-2013년 분야별 재정투자계획안을 보면 복지 지출이 역대 최고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사회복지 형성기에 필요한 제도적 증가분과 물가상승률을 고려하면 거의 증가하지 않은 것이다. OECD 국가 평균 복지 지출이 GDP 20%인 데 비해 한국은 9% 정도에 불과하므로 복지 지출은 현상 유지가 아니라 크게 증가되어야 옳다. 그런데 이명박 정권은 부자 감세로 인해 생긴 재정적자를 지출 축소로 만회하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이명박 정권은 재정 계획, 관리, 보고에 각종 편법과 보수성을 드러낸다. 예컨대 2010년 이자소득 법인세를 한 해 앞당겨 징수하면서 부자 감세에도 불구하고 마치 세수 감소가 별로 없는 듯 보이도록 만들었다. 다른 예로는, 노무현 정권 때 처음 도입된 파격적인 성인지 예산제는 이명박 정권에서 말장난 같은 해석과 무성의한 계획으로 유명무실해져 버렸다.

저자는 직접세(소득세, 법인세 등)와 사회보장기여금(4대 사회보험 보험료)을 합친 것을 총직접세로 부르면서 한국에서 재정문제는 바로 이 총직접세가 낮은 데서 비롯된다고 시종일관 주장한다. 부유층을 압박하기 위해서 중간계층이 총직접세 증세 참여를 실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울러 사회복지세 도입과 건강보험료율 인상을 제안한다. 사회복지세 도입은, 한국에서 소득세율 인상에 대한 반대 정서가 심하므로 직접세와 개별소비세 등에 누진적으로 부가되는 일종의 우회로인 셈이다. 건강보험료율 인상은, 어차피 저소득층마저 사보험에 상당 부분 가입하고 있는 현실에서 시장서비스가 아닌 공공서비스로 이를 대체하는 것이 훨씬 낫다는 가정에 기초한다. 진보 진영이 국가재정 확충 방안에 국가와 기업의 책임만 강조하는 동안 사보험이 서민층에까지 파고들고 있는 실정이다.

어떤 분석과 제안은 매우 흥미롭다.

저자는 OECD 국가들의 GDP 대비 국가재정 비율과 복지 예산 비율을 한국과 비교한다. OECD 기준과 상식에 맞게 한국의 복지 예산을 재구성한 후에 OECD 평균과 비교했을 때 2009년 한국의 GDP 대비 예산규모 부족분(11% 포인트, 110조 원)가 정확히 한국의 복지 예산 부족분과 맞아 떨어진다는 점을 밝혀 낸다.

다른 예로, 민간투자사업에 대한 비판과 해결책을 보자. 저자는 김영삼 정부 이후 한국에서 수익형 및 임대형 민간투자사업이 증대하고 있다면서 민간투자사업이 정권 임기 초기 건설재정 부담을 줄이면서 실적을 늘릴 수는 있을지 몰라도 중장기적으로는 국가재정 부담을 가중시킨다고 말한다. 민간투자사업을 줄이는 한가지 방법으로 저자는 국민연금기금을 사회기반시설 건설에 활용하는 방안을 제안한다. 특히 임대형 사업은 정부가 기본 수익을 보장하므로 국민연금기금의 공공성, 안정성, 적정수익성을 동시에 충족시킬 수 있다. 다른 한가지 방법은 국채를 발행하는 것이다. 비록 한국의 국가채무가 선진국 수준으로 높아지고 있기는 하지만 최소운영수입 보장제 혹은 이와 유사한 보장제로 민간투자사업에 돈을 대주느니 장기적인 전망에서는 국채 발행이 국가채무를 줄이는 방법이다.

프로그램예산제 항목 재편에 대한 제안도 깊은 분석 끝에 도달한 결론이다. 노무현 정부 때인 2004년 예산안부터 프로그램 예산제도가 적용되었다. 이에 따라 유사한 부처사업들이 하나의 프로그램으로 통합 편성되어 중앙 부처 약 9,000개 사업이 행정, 국방, 교육, 사회복지 등 16개 분야로 재편성되었다. 현재 복지 지출액은 사회복지 분야(8)와 보건 분야(9)를 합한 금액을 일컫는다. 그런데 저자는 국토해양부 주택 부문 지출이 복지 재정 계상에서 제외되어야 하며 오히려 건강보험 지출은 포함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친절하게도 저자는 결론에서 본론의 내용과 주장을 간략하게 요약하고 있다. 국가재정을 늘리고 복지 예산을 확보하기 위해서 1) 부자 감세 원상회복, 2) 사회복지세 도입, 3) 사회보험료 상향 등을 제안한다. 그리고 재정 지출 구조 개혁을 위해 복지 특별회계를 신설하고 사회적 약자 인지적 예산을 강화할 것을 주장한다. 복지 지출의 방향은 취약계층 복지(기초생활보장, 저소득층 지원 등), 사회보험 복지(질병, 고용, 산재, 노후 대비), 전략적 보편 복지(기초연금, 교육, 보육 등) 등 세 가지 측면에서 전략적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재정에 관해서 문외한인 사람이라면 이 책의 전반부가 다소 딱딱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저자 또한 전공자가 아니어서인지 용어들을 쉽게 설명하고 본론에서 같은 용어와 설명들이 몇 차례 반복되기 때문에 어느덧 독자들도 부담 없이 읽을 수 있게 된다. 게다가 분량이 많지 않고 챕터별로 주제를 짤막하게 다루고 있어 진보의 눈으로 국가재정을 볼 수 있는 입문서로 무난하다. 책이 진보를 위한 제언의 형식을 띄어서 그렇지 비단 진보의 눈이 아닌 비판적 눈으로 국가재정을 살펴보기에도 좋은 책이다.

분량이 짧다 보니 설명이 부족한 단점도 있다. 예컨대 책에서는 한국의 GDP 대비 재정규모와 지출(특히 복지 지출) OECD 국가 평균에 비해 11% 포인트 낮다는 점을 여러 번 강조한다. 재정을 다루는 책이다보니 숫자를 가지고 비교하고 분석하는 건 이해가 가지만, 단순히 수치 차이만이 아닌 사회구조와 문화의 차이를 고려해서 이 정도의 차이가 얼마나 큰 차이인지(혹은 작은 차이인지)를 지적해주는 것도 필요할 듯하다. 구조적 설명이 매우 제한적인 것이 아쉽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탐욕의 종말 - 한 권으로 읽는 세계 금융 위기의 모든 것
폴 메이슨 지음, 김병순 옮김 / 한겨레출판 / 2009년 7월
평점 :
절판


“우리는 오늘 여기서 글라스-스티걸법을 폐기하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정부가 해답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유와 경쟁이 해답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는 경쟁과 자유를 통해 경제 성장을 촉진하고 안정화를 이룬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미국 경제가 성장일로를 치닫던 1999 11 11, 대공황 때 제정된 낡은 법을 폐기하면서 어느 공화당 상원의원이 축하하며 한 말이다. 이외에도 각종 ‘현대화법’이 제정되어 금융시장의 무한한 성장을 조장했다. 그러나 그의 바람과는 달리 ‘경제 성장’은 거품에 불과했고 따라서 ‘안정화’는 결코 이루지 못했다. 2008년 세계 경제위기가 터져나온 지 몇 년이 지났건만 아직 경제가 회복될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며칠 전 열린 다보스 포럼도 세계경제를 회복시킬 뚜렷한 해답을 못 찾은 채 우울하게 막을 내렸다.

무엇이 문제인가? 저자는 신자유주의가 이데올로기로서, 경제 모델로서 수명을 다했다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지금이 위기이면서 기회이기도 하다고 주장한다. 세계가 1929년 대공황에서 교훈을 얻었듯이 2008년 경제위기에서도 교훈을 얻을 수 있고 얻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폴 메이슨은 1부에서 2008년 경제위기와 그에 따른 미국와 유럽의 대응을 아주 상세하게 시간 순서대로 생생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2부에서는 경제위기가 발생하기까지 지난 10년간 금융시장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비판적으로 살펴본다. 마지막 3부에서는 신자유주의의 문제점과 불균등한 세계경제 구조를 지적하면서 시장을 제어할 민중과 국가의 의지를 요청한다.

저자는 BBC 뉴스나이트 경제 담당 에디터다. 책의 앞부분은 2008년 경제위기의 실시간 취재기 비슷한 내용이지만, 이내 꽤나 분석적이고 비판적인 내용으로 이어진다. 학자가 아니기 때문인지 책의 내용은 덜 딱딱하고, 어떤 부분은 자못 문학서 같기까지 하다.

원서의 부제는 ‘탐욕의 종말’(The End of the Age of Greed)이. 그리고 이 제목을 그대로 번역서의 제목으로 차용했다. 이 제목만 보자면 이 책이 구조주의적 설명보다는 인간성에 대한 설명에 가까울 것 같은 뉘앙스를 풍긴다. 그러나 저자는 신자유주의 정책을 역사적으로 비판함으로써 구조-본성 간의 균형적인 접근법을 취할 뿐만 아니라, 신자유주의의 오용이나 남용이 아닌 신자유주의 그 자체의 실패에 대해서 주장한다. 저자의 기본적인 입장은 탐욕스러운 신자유주의로는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2008년 경제위기가 발발했을 때 워싱턴에서 내놓은 해결책은 가진 자들의 여전한 탐욕을 보여주었다. 1930년대 대공황의 경험에 비추어 미국 정부는 투매된 대출채권들을 최저 가격에 사들여 파산한 주택융자업체들을 살리고 채권들을 나중에 높은 가격에 되파는 윈윈 전략을 추구할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월가를 난처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던 미 재무부는 월가의 부실채권들을 조건 없이 최고 가격으로 사들였고, 이는 결국 미국 경제에 심각한 손상을 초래하고 말았다. 부자들에게 조금도 손해를 끼치지 않으려는 미봉책이 결국 국민 전체에게 부담으로 전가된 셈이다.

월가에 대한 미국 국민들의 분노는 구제금융 법안에 대한 반대로 나타났다. 구제금융 법안 제정과 관련하여 2009 9월 말 처음 실시된 미 하원투표에서 법안이 부결되었다. 하원의원들은 한 달 남짓 남은 하원선거를 의식해 유권자들의 반대 의견을 무시할 수 없었던 것이다. 미국 국민들 사이에서 구제금융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가 대개 그와 같았다. 미국에서 국민들이 투표 이외에 일상적으로 정치에 참여하는 한가지 방법은 법안이 상정되었을 때 지역구 의원에게 전화를 걸어 찬반 의사를 표시하는 것이다. 의원 사무실에서는 그런 전화를 응대하는 직원이 상주하면서 수집된 찬반 수를 기록해 민심의 지표로 삼는다. 거대한 도덕적 해이를 목격한 직후 경제위기 원흉 기업의 총수들을 정죄하기는커녕 그들의 이권을 온전히 보장해주면서 국민들이 낸 막대한 세금을 쏟아붓는 구제금융에 찬성할 국민은 좌우를 막론하고 거의 없었다. 그러니 하원투표에서 구제금융안이 부결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그렇다면 국가는 무엇을 해야 할까? 저자는 책의 여러 부분에서 국가의 시장 개입을 주장한다. 그러나 사정이 위와 같다면 국가가 개입하려 한들 어떻게 가시적인 해결책을 세울 수 있을 것인가? 여전히 풀리지 않는 문제점이다.

책의 본문에 나타난 분석과 비판의 정도에 비해 So what?에 대한 해답은 다소 모호하다. 저자의 해답은 주로 간접적으로 나타나며 ‘~을 해야 한다’보다는 ‘~을 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많다.

결국은 금융자본주의 자체가 문제라는 게 내 생각이다. 실재하지 않는 것에 부여된 가치를 사고파는 행위를 통해 그 가치가 증폭되는 시스템에서는 고급 정보, 권력, 인력, 기술 등을 동원할 수 있는 자들이 가치를 얼마든지 부풀려서 이득을 볼 수 있다. 그러다보니 이른바 도덕적 해이가 문제가 되곤 하는데, 그런 문제는 이미 시스템에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투자은행들은 1980년대 신자유주의 금융정책을 특징지은 금융 규제 완화, 정보기술의 혁신적인 발달, 80-90년대를 휩쓴 민영화의 물결, 세계화로 인한 외환시장의 성장 등에 힘입어 몸집을 부풀릴 수 있었다. 이제 그들은 실물경제의 가치를 교묘하게 부풀릴 수 있는 조작기술을 갖추었고 이런저런 이름도 외우기 어려운 온갖 파생상품을 무한정 만들어대도 언제든지 팔아치울 수 있는 고객들이 있었다.

사실 주식이란 그 자체로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종이쪼가리다. 주식에는 교환가치만 존재하며, 실제적 가치보다는 잠재적 가치에 따라 교환되기로 ‘약속’되어 있다. 예컨대 어떤 기업이 신기술을 개발하면 주식 한 주당 더 많은 이윤을 낼 것이 예상된다. 그리고 그 ‘교환’이라는 것도 필요에 따른 당사자들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증권시장이라는 (자본가들을 위한) 돈놀이 시장에서 인위적으로 끊임없이 이루어진다. 없는 가치가 있는 것처럼 조작되고 있는 위험은 없는 것처럼 조작된다. 헛소문 한마디를 퍼뜨려서 치고빠지는 것쯤은 정보와 권력을 가진 자들에게는 식은죽 먹기이다. 가진 자들은 (금융)시장에 대한 정부의 규제를 최소화하고 어떤 상황에서건 가능한 한 많은 이득을 취하려 한다. 따라서 금융자본주의 체제에서 노동자들은 작업장에서만 착취당하는 것이 아니라 주식시장에서도 착취당한다. 여름 내내 열심히 일한 개미투자자들에게 따뜻한 겨울은 보장되지 않는다. 겨울맞이를 하고 있던 개미들의 집에 찾아온 베짱이는 육식곤충이었던 것이다.

이런 자본주의는 썩은 자본주의다. 비생산적, 아니 반생산적인 자본주의이다. 멸망이 예정되어 있는 자본주의이다. 이번 기회에 탐욕스런 신자유주의를 대대적으로 손보지 않는 한 자본주의는 머지 않아 대규모 파국의 상황에 직면하여 극소수의 타락하고 배부른 자들에 대한 대다수의 분노하고 굶주린 자들의 반란으로 끝날 가능성이 크다. 맑스가 예견했던 자본주의의 전면적인 붕괴는 세계화된 썩어 빠진 신자유주의의 조건 속에서 더욱 현실성이 커지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증오의 세기 - 20세기는 왜 피로 물들었는가
니얼 퍼거슨 지음, 이현주 옮김 / 민음사 / 2010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은 시기적으로 주로 1914년부터 1945년까지를, 소재로는 인종 학살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20세기 전반기에 전세계를 휩쓴 폭력의 배경으로 19세기 말 유럽 제국의 붕괴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9세기 말까지 유럽의 주요 국가들의 지배층은 복잡한 친족관계로 서로 얽히고 섥혀 있었다. 그래서 이들 사이에 주요 가족모임이라도 있게 되면 흡사 유럽의 정상회담이라도 열리는 듯했다. 왕족의 혈연관계로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었던 유럽 제국은 지금은 상상도 못할 정도로 자본과 노동이 세계화되어 있었다. 그러나 1914 1차 세계대전과 함께 모든 것이 변해 버렸다.

1차 세계대전은 특히 동유럽에서 다인종 제국과 다인종 사회 집단으로 구성된 구체제를 해체시켜 버렸다. “서로 부딪칠 줄 알면서도 맹렬한 기세로 달리는 기관사들처럼, 유럽 제국들은 1914년 대열차 충돌을 일으켰다. 그 결과 네 왕조가 막을 내리고 열 개의 민족 국가가 탄생(p. 287)”했다. 1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 전역에서는 민족 국가라는 이상과 다민족 사회라는 현실이 충돌하고 있었다. 예전에는 오래된 왕조 제국의 느슨한 구조에 의해 다양성이 조정되었다. 하지만 이제 그런 시절은 가 버렸다(p. 263).” 왕가의 느슨한 연결관계에 생긴 균열을 비집고 민족국가가 출현했다.

1차 대전 직후 국가간 경계선이 확정되고 강화되어 감에 따라, 이전까지는 별다른 생각 없이 유럽 각지에 흩어져 살던 소수민족들은 새 국가에 복속할 것인지 떠날 것인지 선택을 강요 받았다. 당연하게도 전범국 국민인 독일인들이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 패전국 독일은 두 개의 제국을 잃고, 이제는 일곱 개가 넘는 나라들에 이주민들이 흩어진 데다가 두 공화국으로 나뉘기까지(p. 288)” 했다. 일부 독일인들은 새로 정해진 독일 국경선 안으로 되돌아갔지만 대다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프랑스 국민, 폴란드 국민, 루마니아 국민, 체코슬로바키아 국민 등이 될 것을 강요 받았다. 그러한 강요는 폭력과 학살이라는 극단적인 형태로 빈번하게 나타났다.

이런 현상은 독일인에게만 국한 된 것은 아니었다. 모국을 떠나 있던 우크라이나인, 헝가리인 등도 새 국경 속에 갇혔고, 무엇보다 이 책에서 저자가 강조하고 싶어하듯이 특히 유대인이 그러했다. 유대인, 아르메니아인, 그리스인 등의 소수인종에게는 이러한 현상이 더 극단적인 형태로, 즉 인종청소의 형태로 나타났다. 여러 민족이 뒤섞여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오던 유럽, 특히 동유럽은 1차 대전과 2차 대전 사이에 민족간 혐오에 휩싸이게 되었다. 유대계 독일 작가 알프레드 되블린이 말했듯이, “오늘날의 국가는 민족의 무덤(p. 289)”이 되었다.

()제국의 몰락한 자리를 메웠던 민족국가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새로운 제국에 휩쓸렸다. 러시아에서는 구()제국을 몰아낸 사회주의혁명이 더 거대한 제국을 형성했다. 독일은 감당할 수 없는 1차 대전 배상금 때문에라도 다시 제국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독일과 더불어 일본과 이탈리아는 경제적 요구 때문에 제국으로 나아갈 소지가 다분했다. “국내에서 얻을 수 있는 식량이나 원료가 한정된 상태에 인구 밀도까지 높았기 때문이다(pp. 400-401). 아직 구()제국의 공백은 다른 것으로 완전히 메워진 것이 아니었다. 잠재된 갈등을 잠재우기엔 아직 더 많은 피가 필요했다. 인종 학살이 재개되었고 2차 세계대전이 종결될 때까지 전보다 더 큰 규모로 학살이 자행되었다.

저자가 이 책에서 다루는 주제인 인종간 폭력은 구()제국의 붕괴 및 민족국가의 출현과 함께 시작되었다. 모든 것은 거기서부터 시작되었다. 물론 저자는 일반화나 인과관계를 구성하는 데  조심스러운 입장을 보이지만, 적어도 대량 학살의 시작을 민족의 발흥에서 찾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가 알고 있는 오늘날의 유럽 지도가 그려지기 위해서 지난 세기 초반의 유럽사는 민족간 갈등과 폭력으로 점철되었다. 현대 민족국가의 탄생기에 국경선 내 정치적, 인종적 동일성을 위해서 소수민족들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폭력이 이루어졌다. ()제국의 몰락에서부터 오늘날의 크고 작은 민족국가가 자리잡기까지 말이다. 에릭 홉스봄이 1914-1919년을 극단의 시대라고 부른 것을 염두에 둔 듯, 저자는 여기서 주로 다루는 1914- 1945년을 증오의 세기’(history’s age of hatred, 직역하자면 증오의 역사시대’)라고 부른다. 후에 다른 책에서 퍼거슨은 이러한 증오를 인간의 본성이라고까지 주장한다. 그러나 이 용어는 부제로까지 붙어 있지만, 본문에서는 중요하게 다루지 않는다.

니얼 퍼거슨은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유럽의 어디에서 어떤 이유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지를 설명한다. 20세기 전반기 내내 여기저기에서 학살이 꾸준히 이어진 탓에 만약 이 책을 영화로 구현한다면 스크린은 내내 피칠갑을 할 것이다. 저자가 처음부터 끝까지 붙잡는 것은 인종 학살이라는 소재이다. 그러나 증오와 그로 인한 학살에 대해 다루고 있지만 저자의 태도는 모호하다.  그의 접근법은 휴머니즘도 아니고, 역사변동론도 아니고, 사회사(social history)도 아니며, 정치경제학도 아니고, 민중사관은 더더욱 아니다. 저자의 강조점은 자본주의의 출현도 아니고, 민족국가의 탄생도 아니며, 세계대전 그 자체도 아니다. 홉스봄과 달리 저자는 구조변동에 관심이 없으며, 아마도 역사학자라는 출신적 한계(?) 때문인지 인과관계의 구성이나 일반화에 대한 욕심도 없어 보이며,  본인의 정치적 입장 때문인 듯 아래로부터의 역사는 전혀 보여주지 않는다. 때문에 원서의 부제이자 번역본의 큰제목인 증오의 세기라는 거창한 일반화는 공허해 보이기까지 하다. 저자가 처음부터 끝까지 인종 학살을 다루고 있을 뿐인데 이것은 지나친 소재주의로 보인다. 

그렇다면 구()제국의 몰락과 민족국가의 출현, 인종간 충돌의 동력은 무엇이었을까? 니얼 퍼거슨은 이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신흥 부르주아지, 노동자, 농민에 대한 언급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그런데 이런 식의 접근법도 가능하지 않을까? 부르주아지가 성장하면서 기존의 왕족을 대체할 정치권력을 확보하기 위해서 그들이 좀더 쉽고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민족)국가라는 틀 안에서 정치력을 동원하다 보니 배제와 폭력이 발생한 것으로 말이다. 그 속에서 노동자, 농민 등은 민족이라는 이데올로기에 현혹되어 쉽사리 폭력에 동원되었다고 부르주아지는 민족국가의 틀이 어느 정도 확립되자 자신들의 세력을 더 확장하기 위해 제국으로 나아가는 무리수를 둔 것으로 파악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한 가지 더 지적하고 싶은 것은 저자는 인종간 갈등의 원인을 설명하기 위해 인종의 밈(race meme)이라는 개념을 갖다 썼는데, 이러한 추상적이고 논란의 여지가 있는 개념을 전제로 삼는 것은 논지의 뼈대 전체를 취약하게 만든다. 서론에서 저자는 인종의 밈이 경제 활성화와 제국적 야망과 결합되면서 인종적 차이가 정치화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본문 전체를 관통하지 못한다. 1차 대전 이후 독일, 이탈리아, 일본이 제국으로 나아간 이유를 설명할 때에만 약간의 유효성을 지닐 뿐이다. 또한 이것이 누구의 경제 활성화와 제국적 야망인가에 대한 문제점도 제기할 수밖에 없다. 자본가? 국가 관료? 아니면 이름없는 대중들? 그렇다면 그들은 어떤 경로를 통해, 어떤 이해관계에 따라 인종 폭력에 연루되게 된 것일까? 이 책에서는 이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 결여되어 있다. 경제 활성화라는 변수와 인종 갈등이라는 변수가 그저 병렬적으로 나열되고 있을 따름이다. 오히려 본문을 읽다 보면 민족국가의 대폭발을 인종 학살의 직접적인 계기로 보는 듯한 인상을 주는데, 그렇지만 민족국가의 어떤 측면이 왜 그러한 학살을 가져왔는지에 대해서도 충분히 논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니얼 퍼거슨의 주장이 좀더 설득력을 가지려면 자본가의 성장, ()체제의 모순, 민중의 각성, 민족(인종) 의식의 성장, 민족 이데올로기, 경제적 경쟁, 전쟁으로 인한 정치적 공백과 대중의 불안심리, 국가의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등의 변수들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인종의 밈 같은 증명될 수 없는 요소를 주요 변수로 삼는 것은 설득력도 떨어질 뿐더러 위험부담도 크다.

[덧붙임] 저자는 이 책의 제목을 H.G. Wells The War of the Worlds(1898)에서 따왔다다만 이 책에서 World에 복수형(s)이 붙지 않는 것은, Wells의 책에서는 우주인과 지구인의 두 세계가 싸웠지만 퍼거슨의 책에서는 유럽이라는 하나의 세계가 자신들끼리 싸웠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인 듯하다. 인종간 갈등을 바라보는 안타까움이 베어 있는 작명이라고 할 수 있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