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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금고를 열다 - 진보의 눈으로 국가재정 들여다보기
오건호 지음 / 레디앙 / 2010년 10월
평점 :
저자 오건호는 ‘특이한’ (?) 이력을 가졌다. 서울대 사회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지만 남들처럼 강단으로 가지 않고 2001년 민주노총 연구원으로 이력을 시작했고 그 후 민노당 심상정 의원 보좌관을 거쳐 공공노조 부설 사회공공연구소에서 일하고 있다.
이 책 또한 그의 이력만큼 특이하다. 보수, 진보 할 것 없이, 그리고 정치인, 일반인 할 것 없이 국가재정은 그 누구도 열심히 들여다보려고 하지 않는 분야이다. 복잡하고 규모가 커서 일선에 있는 극소수의 실무자가 아니라면 그 누구도 이해하기 쉽지 않은 게 국가재정이다. 그런데 저자가 그 국가재정에 대한 책을 냈다. 심상정 의원 보좌관 시절 국가재정을 들여다 볼 기회가 있었던 그는 맨땅에 헤딩하는 식으로 모으고 분석한 자료를 가지고 기어이 책을 낸 것이다. 그쪽 분야 전공자도 아닌 그가 이 정도까지 분석한 책을 냈다는 것은 그 자체로 박수 받을 만하다. 저자는 진보 진영이 국가재정에 친숙해지고 보수 정권에 좀더 효과적으로 대항할 수 있도록, 지금껏 본 적도 없는 가공할 만한 무기를 제공한다.
1980년대 이후 시장만능주의의 확산에도 불구하고 국가의 역할이 크게 변하지 않은 것이 바로 재정이다. 한국에서는 국가재정이 늘 사람들의 관심 밖이었는데, 금융 위기에 따른 재정 적자, 부자 감세, 4대강 사업 등을 계기로 2009년부터 쟁점으로 떠올랐다. 이것이 저자가 이 책을 쓰게 된 상황적 배경이다.
재정을 보면 정권의 계급적 성격을 알 수 있다. 이명박 정부의 2009-2013년 분야별 재정투자계획안을 보면 복지 지출이 역대 최고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사회복지 형성기에 필요한 제도적 증가분과 물가상승률을 고려하면 거의 증가하지 않은 것이다. OECD 국가 평균 복지 지출이 GDP 20%인 데 비해 한국은 9% 정도에 불과하므로 복지 지출은 현상 유지가 아니라 크게 증가되어야 옳다. 그런데 이명박 정권은 부자 감세로 인해 생긴 재정적자를 지출 축소로 만회하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이명박 정권은 재정 계획, 관리, 보고에 각종 편법과 보수성을 드러낸다. 예컨대 2010년 이자소득 법인세를 한 해 앞당겨 징수하면서 부자 감세에도 불구하고 마치 세수 감소가 별로 없는 듯 보이도록 만들었다. 다른 예로는, 노무현 정권 때 처음 도입된 파격적인 ‘성인지 예산제’는 이명박 정권에서 말장난 같은 해석과 무성의한 계획으로 유명무실해져 버렸다.
저자는 직접세(소득세, 법인세 등)와 사회보장기여금(4대 사회보험 보험료)을 합친 것을 ‘총직접세’로 부르면서 한국에서 재정문제는 바로 이 총직접세가 낮은 데서 비롯된다고 시종일관 주장한다. 부유층을 압박하기 위해서 중간계층이 총직접세 증세 참여를 실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울러 사회복지세 도입과 건강보험료율 인상을 제안한다. 사회복지세 도입은, 한국에서 소득세율 인상에 대한 반대 정서가 심하므로 직접세와 개별소비세 등에 누진적으로 부가되는 일종의 우회로인 셈이다. 건강보험료율 인상은, 어차피 저소득층마저 사보험에 상당 부분 가입하고 있는 현실에서 시장서비스가 아닌 공공서비스로 이를 대체하는 것이 훨씬 낫다는 가정에 기초한다. 진보 진영이 국가재정 확충 방안에 ‘국가와 기업의 책임’만 강조하는 동안 사보험이 서민층에까지 파고들고 있는 실정이다.
어떤 분석과 제안은 매우 흥미롭다.
저자는 OECD 국가들의 GDP 대비 국가재정 비율과 복지 예산 비율을 한국과 비교한다. OECD 기준과 상식에 맞게 한국의 복지 예산을 재구성한 후에 OECD 평균과 비교했을 때 2009년 한국의 GDP 대비 예산규모 부족분(11% 포인트, 110조 원)가 정확히 한국의 복지 예산 부족분과 맞아 떨어진다는 점을 밝혀 낸다.
다른 예로, 민간투자사업에 대한 비판과 해결책을 보자. 저자는 김영삼 정부 이후 한국에서 수익형 및 임대형 민간투자사업이 증대하고 있다면서 민간투자사업이 정권 임기 초기 건설재정 부담을 줄이면서 실적을 늘릴 수는 있을지 몰라도 중장기적으로는 국가재정 부담을 가중시킨다고 말한다. 민간투자사업을 줄이는 한가지 방법으로 저자는 국민연금기금을 사회기반시설 건설에 활용하는 방안을 제안한다. 특히 임대형 사업은 정부가 기본 수익을 보장하므로 국민연금기금의 공공성, 안정성, 적정수익성을 동시에 충족시킬 수 있다. 다른 한가지 방법은 국채를 발행하는 것이다. 비록 한국의 국가채무가 선진국 수준으로 높아지고 있기는 하지만 최소운영수입 보장제 혹은 이와 유사한 보장제로 민간투자사업에 돈을 대주느니 장기적인 전망에서는 국채 발행이 국가채무를 줄이는 방법이다.
프로그램예산제 항목 재편에 대한 제안도 깊은 분석 끝에 도달한 결론이다. 노무현 정부 때인 2004년 예산안부터 프로그램 예산제도가 적용되었다. 이에 따라 유사한 부처사업들이 하나의 프로그램으로 통합 편성되어 중앙 부처 약 9,000개 사업이 행정, 국방, 교육, 사회복지 등 16개 분야로 재편성되었다. 현재 복지 지출액은 사회복지 분야(8번)와 보건 분야(9번)를 합한 금액을 일컫는다. 그런데 저자는 국토해양부 주택 부문 지출이 복지 재정 계상에서 제외되어야 하며 오히려 건강보험 지출은 포함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친절하게도 저자는 결론에서 본론의 내용과 주장을 간략하게 요약하고 있다. 국가재정을 늘리고 복지 예산을 확보하기 위해서 1) 부자 감세 원상회복, 2) 사회복지세 도입, 3) 사회보험료 상향 등을 제안한다. 그리고 재정 지출 구조 개혁을 위해 복지 특별회계를 신설하고 사회적 약자 인지적 예산을 강화할 것을 주장한다. 복지 지출의 방향은 취약계층 복지(기초생활보장, 저소득층 지원 등), 사회보험 복지(질병, 고용, 산재, 노후 대비), 전략적 보편 복지(기초연금, 교육, 보육 등) 등 세 가지 측면에서 전략적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재정에 관해서 문외한인 사람이라면 이 책의 전반부가 다소 딱딱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저자 또한 전공자가 아니어서인지 용어들을 쉽게 설명하고 본론에서 같은 용어와 설명들이 몇 차례 반복되기 때문에 어느덧 독자들도 부담 없이 읽을 수 있게 된다. 게다가 분량이 많지 않고 챕터별로 주제를 짤막하게 다루고 있어 ‘진보의 눈으로 국가재정’을 볼 수 있는 입문서로 무난하다. 책이 진보를 위한 제언의 형식을 띄어서 그렇지, 비단 ‘진보의 눈’이 아닌 ‘비판적 눈으로 국가재정’을 살펴보기에도 좋은 책이다.
분량이 짧다 보니 설명이 부족한 단점도 있다. 예컨대 책에서는 한국의 GDP 대비 재정규모와 지출(특히 복지 지출)이 OECD 국가 평균에 비해 11% 포인트 낮다는 점을 여러 번 강조한다. 재정을 다루는 책이다보니 숫자를 가지고 비교하고 분석하는 건 이해가 가지만, 단순히 수치 차이만이 아닌 사회구조와 문화의 차이를 고려해서 이 정도의 차이가 얼마나 큰 차이인지(혹은 작은 차이인지)를 지적해주는 것도 필요할 듯하다. 구조적 설명이 매우 제한적인 것이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