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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 좌파 - 민주화 이후의 엘리트주의 ㅣ 강남 좌파 1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1년 7월
평점 :
강준만에 따르면 ‘강남좌파’라는 표현이 처음 등장한 것은 2006년 이해찬 총리 3.1절 골프파동 직후 동아일보에 실린 칼럼에서라고 한다. 서민을 대표한다는 노무현 정권의 많은 고위 공직자들이 대놓고 골프 같은 귀족스포츠를 즐기는 이율배반적 행태를 비꼬면서 만들어낸 용어이다.
강준만은 노 정권이 자기편 인사를 대거 기용한 것을 두고 한국 정치의 고질적인 ‘승자 독식주의’라고 지적했는데, 개혁을 바랐으나 인재는 부족했던 노 정권으로서는 열린우리당으로 모여든 소위 ‘70%의 기회주의자들’까지도 아우를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그것은 견고한 보수 정치판을 개혁하는 데 수반되는 기회비용이 아니었을까? 문재인의 <운명> 서평에서도 말했지만 노무현은 한국정치에서 참 특이한 사람이다. 그는 한국정치 지형을 개혁하고픈 열망이 컸으나 현실적인 힘은 부족했고 시간도 턱 없이 모자랐다. 때문에 승자 독식주의의 오명을 얻으면서까지 판도를 바꾸려고 무리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그건 실패가 예정된 싸움이었다. 노무현 자신이 그런 속성을 지녔건, 그의 최측근 세력이 그런 속성을 지녔건, 그가 세를 불리기 위해 감싸안은 주변인사들이 그런 속성을 지녔건 간에 노무현 정권은 강남좌파적이었고, 그로 인해 서민들의 지지를 잃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2004년 6월, 노무현 전 대통령은 대선 공약이었던 아파트 분양원가 공개 계획을 철회함으로써 노 정권의 강남좌파적 정체성을 드러냄으로써 서민들의 신뢰를 잃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해마다 실시된 고위공직자 재산공개에서 노무현 정권의 공직자들의 재산이 크게 늘어난 것으로 밝혀짐에 따라 비판은 더욱 고조되었다. 5년간 주변세력을 공고히 할 것인가, 대중의 지지를 공고히 할 것인가? 노무현은 전자에 더 집중했고 이는 후자의 실패로 연결되었다. 결국 그것은 정권의 몰락을 의미했다.
다른 한편으로 노정권의 인사가 ‘영남 민주화 세력의 한’을 해소하는 방향으로 나아간 측면도 있다는 주장을 강준만은 지지한다. 1971년 대선에서 박정희와 김대중이 대권을 두고 다툰 이후 민주화세력=호남세력이 되어 버렸고, 영남 지역의 민주화세력은 (마치 예수처럼?) 고향에서마저 환영받지 못했다. 1990년 김영삼마저 3당합당으로 반민주화 대열로 돌아섬으로써 영남 민주화세력의 한은 증폭되었다. 노정권 내 소수파는 이런 한을 푸는 데 지나치게 집중했다는 것이다. 노무현이 집권 후반기에 한나라당과의 대연정을 제안한 것도 이러한 한의 연장선 상에서, 즉 영남 민주화세력이 입지를 공고히 하려 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자신을 대통령으로 뽑아주었건만 그 이후 총선, 재선에서 계속 한나라당만 뽑아주는 지역민들을 보며 한나라당과 대연정을 해야겠다는 생각은 노무현에게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었을지도 모른다.
노무현 정권에 대한 평가야 어찌 되었건, 보수언론이 처음에 비꼬는 말투로 노정권을 ‘강남좌파’라고 지칭한 이후 이 용어는 다소 의미가 넓어지고 긍정적인 뉘앙스마저 더해졌다. 서울대 조국 교수가 강남좌파로 불리는 것을 개의치 않는다고 밝혔을 때는 이미 강남좌파에 대한 부정적 의미는 많이 탈색된 뒤였다. 강남좌파 현상은 한국사회에서 무엇을 의미하는가?
강준만은 마지막 챕터에서 한국의 학벌주의에 대해 비판하면서 강남좌파 현상을 엘리트주의와 연결시켜서 바라본다. 진보, 보수를 막론하고 (심지어 민노당마저) 정치권 지도부는 일류대 출신들이 장악하고 있다. 학력사회인 한국에서 고학벌은 강남적 삶을 보장한다. 고학벌 강남 보수주의 정치인들에게 고학벌 강남 진보주의자들을 ‘강남좌파’로 비하하기란 무척 쉬운 일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보면 강남좌파란 결국 엘리트들끼리 밥그릇 싸움 하면서 나온 시기 섞인 표현일 뿐이라고 할 수 있다. 강남좌파라는 용어나 강남좌파 현상를 통해서 주목해야 할 더 근본적인 문제는 한국 정치(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가 고학벌 엘리트들이 장악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금까지 그래왔듯 지들끼리 다 해먹으면 별문제가 없을 텐데 노무현 정권 때부터 주머니에 넣은 송곳처럼 삐져나오는 세력들 때문에 보수 엘리트는 심기가 불편했을 법도 하다. 그렇다면 강남좌파 현상은 한국사회 정치엘리트 내에 나타난 조그만 일렁임인가? 그저 그뿐인가? 강준만의 시각은 여기에서 멈춘다.
강준만은 신문방송학 전공자답게 글은 잘 쓴다. 말도 그럴듯하고 글 속에 이런저런 생각을 많이 반영한다. 그러나 글의 화려함에 비해 깊이는 떨어지는 것 같다. 뭔가 그럴 듯한 주장을 하기는 하지만 확실한 논거는 없다. 최근에 벌어진 사건들에 대한 사설들을 조목조목 비판하지만 거시적, 역사적 안목에서 종합적인 분석을 제시하지는 못한다. 그게 신문방송학이라는 학문적 특성인지 한계인지는 모르겠다. 이 책은 마치 긴 신문사설 같다. 신문사설은 짧은 지면에 할말을 다 담아야 하기 때문에 주장과 논거가 매우 압축적이다. 사설에서는 특히 깊이 있는 논거를 제시할 공간이 부족하다. 이 책은 지면을 400쪽 넘게 늘렸음에도 여전히 사설 같다.
그렇지만 이 책은 게으른 독자들에게 고마운 책이다. 강준만은 최근에 실렸던 여러 신문의 사설들을 지루할 정도로 길게 인용하고 쭉 연결해 놓았다. 책 참 쉽게 만들었다는 느낌도 든다. 그렇지만 독자들은 이 책만 읽으면 그 많은 사설들을 다 섭렵한 셈이 된다. 물론 강준만의 시각에서. 주제와 관련된 사설들을 찾아서 붙여놓고 중간중간 해설을 달아 준 정성도 물론 인정해주어야 할 것이다.
엄밀히 말해 책의 많은 챕터들은 강남좌파 논쟁과는 직접적 상관이 없다. 몇 챕터를 제외하면 강준만이 계속 해오던 인물비평, 시사평론과 크게 새로울 것이 없다. 오히려 ‘강남좌파’라는 이 책의 제목보다는 부제인 ‘민주화 이후의 엘리트주의’가 제목으로 적합하다.
글은 술술 잘 썼는데 어법에 안 맞는 표현이 자꾸 거슬렸다.
- ‘데’를 잘못 띄어쓴 경우가 있었다. 저자나 편집부에서 착각한 걸로 보인다. 이런 초보적인 실수는 안 했으면 좋겠다.
- 사람과 직함을 붙여서 언급할 때 대개 ‘직함+이름’으로 쓰다가 가끔씩 ‘이름+직함’으로 쓰기도 했다. 일관성이 없는 것도 문제이거니와, 저자는 ‘직함+이름’은 상대를 낮춰부르는 것이고 ‘이름+직함’은 높여부르는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것 같다(참고로 아무개 교수, 아무개 국회의원, 아무개 아나운서라는 식으로 자기를 소개하는 건 예의가 아니다. 자기를 소개할 땐 직함을 이름 앞에 붙여야 한다).
강준만이 사실 확인에 그친 ‘강남좌파’ 현상을 좀더 거시적이고 역사적인 안목에서 분석하고자 한다면 다음과 같은 점들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강남좌파’ (혹은 다른 무엇으로 부르건)는 하나의 필연적인 시대현상인 듯하다. 특히 1980년대 이후 민주화의 세례를 받은 세대들(80년대에 30대였건 그즈음에 태어났건 간에)이 보수로 점철된 기존의 정치판에서 만족을 느끼지 못하고 기성정치세대와 스스로를 차별화하면서 사회적 현상으로 부각된 것이 아닐까? 한국의 정치는 한국전쟁 이후 산업화를 거치면서 보수주의적 구세대와 민주화 이후를 대변하는 신세대로 나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치는 여전히 구세대의 수중에 있었고 영남당과 호남당의 대립구도 속에 세대간 차이는 다소 희석되어 왔다. 어쨌건 기존 정치판도를 수용해야 정치판에 뛰어들 수 있는 것이므로. 그러다가 결국은 구세대와 다른 신세대의 가치가 점차 수면 위로 부각되기 시작한 것이다. 구세대는 그것을 좌파라고 (잘못) 부르고, 심지어 강남좌파라는 악의 섞인 비아냥까지 한다. 구세대가 구축한 물질을 누리고 살면서 구세대의 가치를 부정하는 것이 우습다는 것이다.
강준만은 모든 정치인은 강남좌파라고 다소 파격적인 주장을 한다. 모든 정치인이 강남적 삶을 사는 것이야 당연하고 보수, 진보를 막론하고 겉으로는 서민을 위하는 정책에 목소리를 높이기 때문이다. 내가 위에서 지칭한 신세대를 위해서는 강남좌파 말고 다른 용어가 필요할지 모르겠다. 아무튼 내가 말하려는 건 한국 근대사가 짜놓은 정치틀, 가치관, 의제, 정당체제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려)는 사람들이다. 그 중 엘리트에 돈도 많고 기존의 정치판에 이미 포섭된 사람은 이 책에서 보는 전형적인 강남좌파의 범주에 들 것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정치적 허무주의자나 반정치주의자 등의 범주에 속할 것이다. ‘강남좌파’라는 용어가 보수세력에서 먼저 나왔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보수세력이 그들이 ‘강남좌파’라고 부른 어떤 세력의 존재로부터 위협을 느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 ‘어떤 세력’이란 전통적인 보수주의 제도권 정치의 아성에 끼어든 이질적인 존재이다. 그 존재만으로도 한국정치가 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강남좌파 현상은 반세기 동안 이어져온 견고한 한국정치의 틀에서 움트는 세대변화의 일면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강남좌파’라는 비아냥은 사회에 비해 그 변화속도가 느릴 수밖에 없는 정치권의 현실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리라. 새로운 가치관과 정치의식을 가진 새로운 세대들에 의해 영향을 받은 자들이 (혹은 그 세대들 자신이) 정치권에서 구세대와 다른 가치를 표방하고 나서는 것은 일단은 긍정적이라고 본다. 문제는 그들의 표방가치를 현실적 힘으로 강제할 추진력이다. 기존 정치판도가 혁명적으로 변할 수 없는 한, 그 힘은 진짜 좌파세력이나 민중에게서 나올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