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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개의 고양이 눈 - 2011년 제44회 한국일보문학상 수상작
최제훈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최제훈, 소설집 <퀴르발 남작의 성>을 읽고선 관심가는 작가가 되었는데, 그의 첫 장편소설 <<일곱 개의 고양이 눈>>이 나왔다.

이 소설은 연작 소설과는 달리, 네 개의 중편이 모여서 하나의 장편을 이루는 픽스업이라는 독특한 형식으로 쓰여진 작품이다.

사실은 픽스업에 대한 개념이 별로 없어서 네 개의 중편을 하루에 하나씩 읽어나갈 예정이었다. 하지만 읽기 시작하면서부터 그런 계획은 유효하지 않음을 깨닫게 되었다. 여섯번째 꿈, 복수의 공식, 파이, 일곱 개의 고양이 눈, 네 개의 이야기들이 서로 얽히고 설켜서 읽을수록 명확해지는 게 아니라 모호해지기만 하고 결말이 대체 뭐야? 하는 심정으로 계속 읽어나갈 수밖에 없었다.

 

각각의 이야기들을 따로 떼어놓고 살펴봐도 충분히 흥미진진하고 멋지지만 그 이야기들이 밑바닥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는 점이 이 작품의 백미가 아닌가 싶다. 흩어진 조각들이 조합되고 끊임없이 연결되고 하는 이런 구성을 위해 작가는 얼마나 치밀하게 구상을 했을까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집중해서 따라가려니 처음엔 좀 머릿골이 아프긴 하지만 샘솟듯 쏟아지는 이야기들의 늪에 빠진 것을 어느 새 즐기고 있었다.

 

처음에 나오는 <여섯번째 꿈>은 누군가의 독백인지 아니면 대화인지로부터 모호한 것으로부터 시작되는데, 여타의 추리 소설에 많이 볼 수 있는 밀실 살인과 비슷한 양상으로 전개된다. 하지만 다 읽고 나도 범인이 누군지는 모호하기만 하였다. 사람들의 무의식이 악마란 것인가? 라는 생각과 함께 그 산장에 모인 여섯 사람들은 어떤 연관성을 가지길래 선택이 되었을까? 란 의문을 가진 채 그 다음 이야기인 복수의 공식으로 넘어가게 된다.

 

<복수의 공식>은 <여섯번째 꿈>에 나오는 전신마취(민규), 한니발(영수), 유혈낭자(세나), 왕두더지(태식), 불면증(현숙), 폐쇄회로(연우)의 등장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를 순차적으로 하고 있는 듯 하다. 자신의 가명과도 같은 그들의 사연들을 하나씩 들려주며 그 안에서 그들은 묘하게 인연을 맺고 있음을 알게 된다. 아무런 관계가 없어 보이던 그들이 왜 같이 선택되었는지가 서서히 드러난다. 하지만 방심해서는 안된다.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처음에 나왔던 사연이 뒤에 가서는 조금 뒤틀려서 다시 나오기 때문이다. 그것도 한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반복하다 보면 어떤 사연이 진실인지 알 수가 없어진다. 안개 속에 있는 것만 같다. 비슷하지만 조금씩 다르다. 예를 들면 처음에는 간질을 앓고 있는 어떤 남자가 강간당하고 자살한 자신의 쌍둥이 여동생에 대한 복수를 하는 사연이었다가 간질을 앓고 있던 쌍둥이 남동생이 도둑이 들었을 때 발작을 일으켜 죽어버리고 그에 대한 복수를 하는 사연으로 바뀌고 쌍둥이 남매가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는데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을 비관하여 같이 자살하려다가 여자만 죽고 남자만 살아남았지만 결국 그도 자살해 버리는 사연으로 변했다가 이마저도 환상에 불과하다는 식으로 끊임없이 변주된다.

 

<파이>는 이야기 속에 이야기가 존재하고 그 이야기 속에 또 이야기가 존재하며 뫼비우스의 띠처럼 되돌아올 뿐이다. 이야기를 번역하는 작가(연우로 추정되는)가 나오고 그 이야기에 등장하는 M도 작가이며 M이 번역하고 있는 소설의 내용이 여섯번째 꿈이며(등장인물들의 이름만 일본식으로 바뀐 설정) M이 이야기에 대한 압박을 느끼게 만드는 아르테미스같은 여자가 들려주는 하루의 이야기 속에 쌍둥이 남매에 대한 이야기가 들어가 있는 식이다. 이런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의도적인 데자뷰 현상을 집어 넣었다. 비슷한 문장들이 반복되어서 나오는 부분이 여러번 등장하여 이거 어디서 봤던 건데...라는 생각이 계속해서 들게 만든다. 예를 들면,

 

진홍빛 화염이 건조한 회청색 하늘을 거침없이 집어삼켰다. 기세가 꺾인 낮의 군대는 대열을 허물고 허둥지둥 퇴각했다. M은 눈도 깜빡이지 않고 노을의 고요한 진격을 응시했다. 그 절정의 한순간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선연한 붉은 빛이 하늘 끝까지 닿으려는 찰나 (파이 중 p.181)은 M이 본 것을 서술한 것이며

 

건조한 회청색 하늘을 거침없이 집어삼키는 진홍빛 화염. 하루는 우두커니 서서 눈도 깜빡이지 않고 노을의 고요한 진격을 응시했어. 그 절정의 한순간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선연한 붉은 빛이 하늘 끝까지 닿으려난 찰나......(파이 중 p.226)은 아르테미스같은 여자가 M에게 해주는 이야기의 한 부분이다.

 

머리가 터질려는 지점에서 마지막 편인 일곱 개의 고양이 눈으로 넘어간다. 화자가 도서관에서 우연히 미스터리 클럽 Q 제 1권- 일곱 개의 고양이 눈을 발견하는 것으로 시작된다.(내가 읽고 있는 소설의 제목과 동일한) 화자는 첫번째 등장하는 소설은 "폭우"를 읽다가 말았는데, 그 뒷 이야기를 자기 나름대로 상상하여 이어나가는 내용인데, "폭우" 자체로도 굉장히 매력적이었다. 화자는 그 책의 논리적으로 모순되는 점을 발견하고 그 책이 원주율 파이처럼 무한대의 수이지만 결코 반복되지 않는 하나의 완벽한 미스터리 소설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것은 세번째 편인 <파이>에서 M이 쓰길 원했던 것이기도 하고 내가 읽고 있는 이 작품 <<일곱 개의 고양이 눈>>의 저자인 최제훈이 원했던 것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네번째 <일곱 개의 고양이 눈>의 마지막 문장은 '자, 이야기를 계속해 봐. 잠이 들지 않도록' 인데, 이것은 작품의 맨 첫 문장으로 이어진다. 그야말로 뫼비우스의 띠. 이 작품을 읽고 있는 독자는 벗어나고 싶어도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이야기 속으로 들어와 버린 것이다. 벗어나길 체념하고 즐기는 편이 나으리라.

 

그리고 곳곳에 숨겨져 있는 소소한 묘미가 인상적이었는데, 네 개의 중편에 산재해 있는 연결고리를 발견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이 작품의 첫번째 편에 해당하는 여섯번째 꿈에 등장의 배경이 된 눈 쌓인 산장이 세번째 편인 파이에서 M이 번역하던 여섯번째 꿈이라는 일본소설의 표지로 나오고 네번째 편인 일곱 개의 고양이 눈 속 화자가 본 폭우"라른 소설에 등장하는 형사가 눈 쌓인 산장이 그려진 머그잔을 들고 나오는 식이다.

 

또한 이 작품은 재미뿐 아니라, 우리가 그동안 무의식적으로 외면하고자 하였던 죽음이 어떤 것인지 한번쯤 깊게 생각해 보는 기회를 준다. 남의 죽음을 유희의 대상으로만 바라보다 자신의 죽음 앞에서는 살고자 발버둥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고 창조자라도 된 듯 내 손으로 세상을 변형시키고 싶은 욕망의 하나로 살인을 하는 것을 보여주기도 하는 식으로 말이다. 죽음은 결코 유희의 대상이 될 수 없으며 공포로만 느낄 것도 아니다. 어둠이 대한 인식이 있을 때 빛은 더욱 밝게 빛난다고 하였다. 죽음의 실체에 대해 똑바로 바라볼 때 타자화된 죽음의 이미지를 극복하고 오히려 삶이 풍요로워질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근래 읽은 작품 중 가장 기묘한 이야기였는데, 최제훈의 작품엔 기발한 상상력을 뛰어 넘는 특별함이 있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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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을 읽는다
박희병 지음 / 돌베개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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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 박지원
그에 대해 북학파의 핵심 인물 정도로만 알았지 정작 아는게 별로 없었다. 
법고창신(법고해서 창신하다: 고를 바탕으로 재해석, 재창조하여 금을 만드는 것)이 어떤 것인지 제대로 보여준 대단한 문장가였다는 사실을 이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으며, 현학적이지 않고 진부하지 않아 지루하지 않고 생동감이 넘치는 점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저자 말로는 문장의 장대한 기에 의해서 그렇다고 한다.

서사와 묘사와 의론론에 두루 뛰어났던 연암의 글들 중 저자가 좋아하는 것 위주로 20편의 산문을 뽑아서 분석과 종합의 묘를 보여주는 방식으로 서술하고 있다. 먼저 한 편 전체를 보여주고 단락별로 깊이 음미하고 총평을 가하는 식으로 말이다. 이 책을 통해 연암의 산문 속에서 연암의 교우 및 가족관계, 글 읽기와 글 쓰기에 대한 생각, 경세의식, 당시 지배 세력에 대한 비판의식까지 두루 느껴볼 수가 있어서 연암에 대해 한층 다가간 기분이 들었다.

연암은 제문이나 기문, 묘지명을 쓸 때도 당시 정해져 있던 전형적인 형식에서 벗어난 파격적인 글을 많이 썼는데, 단지 기발함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글에 내재되어 있는 사유의 깊이와 통찰력이 바탕이 되어 진정성을 갖추고 있어 감동적이고 감탄하게 만들었다. 또한 연암은 글을 쓸 때, 대상과의 에피소드를 삽입하는 방식을 즐겨 사용하였는데,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그 적절한 에피소드 하나만으로 인물과의 관계, 인물의 성격이나 인격, 인물에 대한 자신의 심정 등을 매우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있어서 인상적이었다. 이는 스쳐 지나갈 수도 있는 경험에 대한 주의 깊은 통찰력이 없으면 불가능한 것이며, 숱한 경험 중에서 가장 적절한 것을 끄집어 내는 능력이 탁월했기에 가능했으리라. 우리는 통상 별다른 경험이 없어서 쓸 게 없다고 하지만 연암이 텍스트 내에서 예로 들고 있는 에피소드도 특별하거나 진기한 경험이 아닌 것을 보면 삶의 대한 깊은 사유를 바탕으로 한 통찰력의 차이라고밖에 할 수 없을 것 같다.

 

이 책의 단락별로 분석하는 부분이 연암의 산문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연암은 자신의 생각을 피력함에 있어 매우 적절한 고사 등도 많이 인용하였는데, 그런 고사를 알지 못하는 경우에는 이해가 잘 되지 않아 의아할 수 있는 부분을 해소시켜 주었다. 또한 연암 주변 인물들의 글 등 보충적인 텍스트 등도 적절하게 삽입하여 해석의 풍부함을 더하고 있어 연암의 글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고 있다. 사실 이 책에 나오는 연암의 글들은 그리 길지 않지만 분석하는 부분의 분량은 결코 짧지 않다. 연암의 글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기본 지식이 바탕으로 깔려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논어나 맹자, 대학, 중용, 주역, 사기열전을 이미 읽은 사람들이 좀 더 연암의 글을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그리하여 다시 한번 고전 필독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이 책에 나오는 20편의 산문들 모두 빼어나지만, 특히 술에 취해 운종교를 밟았던 일을 적은 글, 홍덕보 묘지명, 초정집 서문, 공작관 글 모음 자서, 발승암 기문 등이 기억에 남는다.

 

술에 취해 운종교를 밟았던 일을 적은 글을 보면 오가 등장한다. 오는 티베트산 개라고 한다. 일명 사자개라고 하며 4척이나 되는 무척 큰 개인데 연암은 오에 빗대어 세상에 영합하지 못하여 현실에서 소외되어 곤궁하게 살아가는 연암 일파의 처지를 나타내고 당시 사대부들의 청조 문화를 배격하는 일관된 태도도 비판하고 있다. 후반부는 공간의 이동과 시간의 이동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는데, 고즈넉한 분위기를 자아내며 매우 서정적이어서 아름답다. 하지만 이 글은 거기서 그치지 않기 때문에 더욱 뛰어나다고 볼 수 있는데, 혼탁하고 답답한 상황에서도 견지해야 할 선비의 자세를 새 아침을 여는 세 가지 동물들 소리에 비유하여 끝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개구리 소리는 백성을 잘 다스려 편안하게 살도록 해 주어야 하는 사대부의 자세, 매미소리는 글을 읽어 사람으로서의 도리를 배우는 사대부의 자세, 닭 우는 소리는 군주가 잘못할 경우 목숨을 걸고 직언해야 하는 사대부로서의 자세를 나타내며, 이는 모두 연암의 경제의식를 보여준다.

 

발승암 기문은 독자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연암이 김홍연이란 이름을 여기 저기서 볼 때마다 느꼈을 ’대체 김홍연이 누구야? ’라는 생각을 독자도 같이 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점차 그를 알아감에 따라 바뀌어 가는 연암의 심리 상태가 잘 서술되어 있어 독자도 비슷한 심리 상태를 경험하게 된다. 또한 연암은 통상적인 도덕적 관점으로 사람을 평가하지 않고 "돈을 쌓아 두고 쓰지 않으면 가난한 거지와 무어 다를까. 중생 사람들은 제각각 살면은 되지 억지로 남을 배울 건 없네. "라면서 협객 김홍연의 삶을 긍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고 세상으로부터 외면당한 그에게 연민을 느끼고 있다. 우리는 대부분 다른 사람의 시선이나 기준에 따라 스스로도 평가하면서 자신을 부정적으로 보거나 불행하다고 느끼는데 이는 삶을 살아나가는 바람직한 태도가 아닐 것이다. 이 글은 재미있을 뿐 아니라, 허상에 불과한 이름을 남기는 것에 집착했던 유교 문화를 반성적으로 성찰하는 태도도 보이고, 연암의 인간 존재에 대한 연민과 그 존재가 맞닥뜨리게 되는 운명에 대한 깊은 이해도 보여주고 있다.

 

초정집 서문은 글쓰기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뚜렷하게 보여주는 글이다. 연암은 법고와 창신의 미학적 논쟁에 쐐기를 박으면서 법고가 모방으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지변이 필요하다고 하였는데, 형편과 상황에 맞게 재창조하는 것을 의미하고 지편을 통해 법고는 진부함과 구태의연함을 벗어나 참신하고 창의적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또한 청신이 경박하지 않으려면 능전이 필요하다고 하였는데, 능전은 법도가 있다는 것이며 전통의 활용 위에서 창작 행위가 일어나 창작의 깊이와 두께를 확보해야 내면적 충실함을 가질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러면서 후반부에 법고창신의 네 가지 예를 들고 있는데, 공명선의 일, 한신의 일, 노나라 어떤 남자의 일, 우승경의 일이 그것이다. 네 가지 고사는 실질적으로는 글쓰기와 아무 관련이 없으나 법고창신의 타당성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사용하였는데 굉장히 기발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상투적으로 인용하지 않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 이 부분이야말로 연암의 법고창신의 자세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방식으로 법고창신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그리고 마지막의 "편협함과 공손하지 않음은 군자가 추구할 바가 아니다" 의 의미를 살펴 보면, 맹자에 나오는 말인데 연암은 이것을 글쓰기에 비유하고 있는 것이다. 편협함은 옛 틀에 얽매여 새로운 것을 창조하지 못하는 폐단을 가리키고 공손하지 않음은 새것 만들기에 급급하여 상도에 어긋나게 되는 폐단을 가리키는 말로 썼다. 연암은 이처럼 참신한 비유와 예시를 적절하게 사용할 줄 알았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의 "새것을 만들다가 공교해지기보다는 차라리 옛걸을 모범으로 삼다가 고루해지는 편이 나을 터이다." 라는 부분에 대해 저자는 이 글이 박제가의 초정집에 써 준 서문이며, 박제가에게서 창신의 폐단이 보이는 듯하여 이런 점을 눌러주기 위해서 고문을 강조했을 뿐 그 의미를 확대해석해선 안된다고 강조한다. 연암의 글은 당대에 창신파로 간주되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분법적인 사고로 인해 연암의 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니 정조의 문체반정때 연암은 경박하고 자잘한 소품문의 문체의 주범으로 지목받았던 것으로 연암 입장에서 얼마나 답답하였을까. 어떤 높은 경지에 오른 사람의 글을 꿰뚫어 보기란 쉬운 일이 아님을 다시 한번 느낀다.

 

공작관 글 모음 자서에서 보면, 글 짓기는 그럴듯하게 포장하기보다는 무엇보다 진실해야 된다고 하고 있다. 그리고 연암은 여기서 회화의 원리를 원용하고 있는데, 초상화를 그릴 때 근엄하게 꾸민 모습이 아닌 평소의 모습을 그리는 것이 생동감 있듯이, 글도 그래야 한다고 설파하고 있다. 또한 후반부에는 생활에서의 체험을 토대로 하여 구체적인 비유를 하고 있는데, 창작의 문제는 이명처럼 작가의 고심을 남들에게 온전히 전달되거나 이해될 수 없다는 점을 말하고 있고 비평의 문제는 코골이처럼 본인은 자신이 창작한 작품의 결함을 잘 알지 못한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 공작관 글 모음은 연암 자신의 글인바, 비평해주면 감사하게 받아들이겠다는 연암 평소의 성찰적이고 반성적인 태도를 엿볼 수가 있다. 코고는 사람에게 코 곤다고 지적하면 그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불쾌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많은데, 연암은 이명처럼 독자가 자신의 의도나 고심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더라도 자신의 부족한 점을 일깨워주기를 바라고 지적 당하는 일을 불쾌하게 여기지 않았다. 역시 뛰어난 사람은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이명과 코골이의 비유라니! 정말 이해가 절로 되는 그런 비유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연암은 여러 글에서 비판적 글읽기를 강조하고 있는데, 따라서 연암의 글도 비판적으로 읽을 필요가 있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모든 글은 넓은 의미에서 당파성이 개입되기 마련이므로 비판적인 대면이 요구된다. 비판적 글읽기란 주체적 글읽기와 다름 아니다. 비판적으로 읽지 않으면 텍스트에 속고 텍스트에 투항하게 된다. 텍스트에 투항은 인식의 해방이 아니라 인식의 마비를 초래하게 마련이다.(p.226) <기린협으로 들어가는 백영숙에게 주는 서>에서 보면 연암의 당파성을 엿볼 수 있다. 연암은 노론이었는데, 노론과 국가를 동일시하고 있는 당파성을 읽어낼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무비판적인 수용과 칭송도 역시 경계해야 마땅하다. 연암은 비교적 당파성이 강한 인물은 아니었으나 연암이라고 해서 그 시대 의식을 온전히 뛰어넘을 수는 없었다.(동시대인 중 뛰어난 학자인 정약용 등 남인과의 교류는 거의 없었다고 한다.)

 

또한 여기서 연암은 글읽기와 글쓰기에 있어 감수성과 상상력을 매우 강조하고 있는데(소완정 기문 참조), 윤석철 교수님의 삶의 정도에서도 목적함수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 매체의 개발에 있어 이를 강조하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고 보여진다. 감수성과 상상력은 완이라는 글읽기와 글쓰기에 필요한 것인데, 그러한 완(온 몸의 감수성을 동원하여 대상의 정수를 파악하는 것)은 텍스트의 외연이 확장되어 결과적으로 세상을 제대로 이해하고 현실을 제대로 읽어내는 것이며 완(수단 매체)을 통해 자신이 정립한 인생의 목적함수를 달성해 나가는 게 삶의 정도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완이라는 글읽기는 하루 아침에 완성되는 것이 아닐 것이다. 마음을 비우고 대상과의 비판적 거리를 유지한 채, 깊게 사색하면서 부단히 노력했을 것이다. 나도 완의 글읽기, 글쓰기를 할 수 있기를 바라며 부지런히 노력해야 겠다. 단순한 박람강기를 경계하면서 말이다.

 

진부하지 않으면서 참신하고 파격적이면서 결코 가볍지 않고 진중한 글을 쓰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기 때문에 연암의 글은 더욱 빛을 발한다.

게다가 벗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음악을 사랑하고 열린 마음으로 학문을 받아들이고 백성을 진정으로 위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던 그는 매우 매력적이다.

이런 멋진 연암에 대해 좀 더 빨리 알았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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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관하여 -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과 대표 단편들 펭귄클래식 70
안톤 파블로비치 체홉 지음, 안지영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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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접한 체호프의 작품인데

솔직히 표지에 혹하지 않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초기작에 속하는 굴, 진창,구세프

중, 후기작에 속하는 검은 수사, 로실드의 바이올린

체호프 스스로가 소 3부작이라고 한 상자 속의 사나이, 산딸기, 사랑에 관하여

그리고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

총 9개의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굵게 표시한 것은 특히 마음에 들었던 작품들)

 

이 중에서 검은 수사와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이 가장 알려져 있는 것 같다.

당시 러시아 시대상을 반영하는 사회적 문제의식을 드러낸 단편들이 많다. 내가 느끼기엔 등장인물들의 말을 빌어서 문제 의식을 직접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생각했는데, 작품들을 발표할 당시에는 답을 제시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주제의식이 부족한 작가라고 비평가들한테 비난의 소리를 들어야 했다는게 좀 의아하지만 시대 분위기는 다른 법이니깐.

 



 

짧지만 강렬한 시각적, 후각적 인상을 통해, 세상 물정도 잘 모르는 아이의 상상과 행동을 통해

굶주리고 있는 비참한 현실을 극명하게 보여 주고 있는 작품이다.

오랜 기간동안 굶어서 쓰러질 것 같은 상태의 아버지와 아이가 있다.

굴이 뭔지도 모르지만 굶주림에 지친 아이의 상상 속에서 굴의 이미지는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것에서 맛없고 이상하고 징그러운 것으로 변해간다. 하지만 아이는 그저 식탁에 앞에 앉아 미끌미끌하고 짭짤하고 곰팡이 냄새를 풍기는 날것을 먹는다. 씹지도 보지도 않고, 뭘 먹고 있는지도 모른채 게걸스레 먹어댈 수밖에 없다.


 

이 순간이 지나면 언제 또 먹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을지도 모른다. 어른인 아버지가 체면때문에 도와달라는 말을 하지 못한 것과 대조적으로 아이는 보다 기본적인 욕구에 충실하다. 부모는 아이에게 기본적인 의식주를 해결해 주어야 한다. 구걸을 해서라도 말이다. 그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해 아이는 어른들도 취향 타서 못 먹는 사람들이 많은(내가 그 부류에 속해서 그런지 몰라도 더 공감이 갔다) 특유의 비릿한 내음과 얼핏 보면 누가 토해 놓은 가래 같기도 한 이상하게 물컹거리게 생긴 "굴"을 눈 질끈 감고 먹을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었다. 아버지와 아이를 러시아 정부와 당시 배고픔을 겪고 있던 러시아 국민들로 대입해서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배고픔 앞에선 개인의 취향 따윈 존중받지 못한다. 그야말로 배부른 소리인 것이다.

어린 아이가 굴을 게걸스레 먹을 정도로 배고픈 건 얼마나 굶었다는 걸까?




 
진창
 
꽤나 흥미롭게 읽었다.
인간의 은밀하면서 잠재되어 있는 원초적인 욕망을 솔직하게 드러낸 작품으로 누구나 평온하고 순탄한 삶을 원하고 정숙한 배우자와 사랑스런 자식들을 원하지만 무료한 일상은 어쩐지 지겨워 일탈을 꿈꾸는 인간의 심리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 작품에서 압권인 부분은 중위의 사촌형인 크류코프가 혼외정사를 한 달에 한번쯤 권태로운 일상의 활력쯤으로 간단하게 자기 합리화하면서 그 뻔뻔하고 냉소적이면서 묘한 색기를 흘리는 수산나를 다시 찾아간 자리에서 비슷한 목적을 가지고 찾아온 지역 유지와 자신의 사촌동생인 중위를 만났을 때이다. 자신의 속마음을 숨김없이 드러낸 일기장을 남에게 들킨 것같은 당혹스러움 그 자체인 장면
수산나는 '겉으로는 신사인 척 점잖고 많이 배운 체하지만 너희도 결국은 똑같다! 그렇게 쉽게 욕망에 굴복할 거면서' 라고 생각하며 그런 상황을 즐겼을 지도 모른다.
이 작품이 발표되었을 당시 꽤 논란이 있었다고 하는데, 불편한 진실을 대면했을 때 당혹스러움을 느낀 이들의 견해였으리라. 그러한 논란에 체호프는 인간에게는 선한 욕망만 있는 게 아니라 악한 욕망도 있는 법이라면서 응수했다고 한다.
읽으면서 극 중 수산나의 매력은 아쉽게도 여자인 내가 느끼기는 좀 힘들었지만 당시 세침하고 정숙한 척 하는 숙녀들과 달리 너무 솔직하다 못해 천박해 보이기까지 하지만, 그래서 넘쳐나는 열정과 에너지가 신선했을지도 모르겠다. 시골 생활에서는 느끼기 힘든 활력이었을테니
 
 

검은 수사

 

좀 난해한 작품

코브린은 검은 수사의 환영을 볼 땐 행복했다. 활기가 넘기고 유머가 넘치고 여유로웠다. 하지만 환영을 보지 않게 되자 활기가 없어지고 신경질적이고 난폭해졌다. 가까운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불행하게 만들었다.

여기서 코브린이 검은 수사를 보게 되는 의미는 무엇일까?

일반 사람들이 보기에 코브린은 과대망상증에 걸린 미친 사람이며, 검은 수사를 보는 것은 치유해야 하는 질병이다. 하지만 본인에겐 그렇지 않았다. 조금 더 삶의 기쁨, 충만함을 느끼게 해 주는 것이었다. 코브린은 나중에 원망하면서 말한다. 자신을 평범한 사람으로 만들어 버렸다고.

현실에서 평범하지 않은 사람을 보면 비정상으로 보고 불편함을 느끼고 그들을 우리와 같은 평범한 사람으로 만들고자 한다.

단순히 미쳐서 타인에게 해를 가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런 것에 대한 체호프의 반발이 아니었을까 싶다. 예술가들이나 조금은 남들과 다르지만 남다른 재능을 가지고 있는 이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세상의 틀에 끼워 맞추려고 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향한.

특히 우리나라처럼 튀는 사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회에서는 더욱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한다.

 
 
로실드의 바이올린
 
야코프는 관 짜는 남자이다. 온갖 핑계를 대면서 그다지 성실하게 인생을 살아왔다고는 할 수 없다. 부인인 마르파의 죽음을 계기로 사는 것은 온통 손해투성이라고 불만만 늘어놓고 부인은 구박하고 이유없이 유대인인 로실드를 미워했던 일을 반성하게 되고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야코프가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강가가 자작나무숲 대신 자작나무 한 그루가 쓸쓸히 서 있는 곳으로 변할 동안 야코프의 영혼도 더 이상 싱그럽게 반짝이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손해만을 기억하는 늙은이로 변해버린 것이다.
우리들의 삶도 야코프의 삶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어렸을 때 가졌던, 젊었을 때 가졌던 그 싱그러움이 빛을 점점 바라게 되는건 비단 육체만이 아닌 것이다.
긍정적인 것을 기억하기 보다는 부정적인 것을 기억하고 이해타산적이 아닌 마음으로 대해야 할 가족간에도 내가 입은 이해득실을 은연 중에 따지는 모습을 보면서 흠칫 놀라게 되는 일이 잦아지는 것을 보면 말이다. 더 늦기 전에 자작나무 숲을, 금빛 솜털이 난 아기를 기억해야 겠다.
야코프는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진심을 담아 바이올린을 연주하게 된다. 그 전까지는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연주했을 뿐이다. 기교는 뛰어났지만 울림을 주지 못했던 연주는 어느새 듣는 이들로 하여금 뜨거운 눈물을 흘리는 연주로 변해 있었다.
그 영혼이 담긴 바이올린은 로실드에게 주어지고 로실드의 연주를 통해 그 감동은 계속 전해지게 된다.
이 작품이 나에겐 로실드의 바이올린 연주같았다. 1894년에 발표된 작품이지만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울림을 전해주고 2010년 나한테까지 왔으니 말이다. 체호프의 영혼을 느낄 수 있었던 소중한 작품이다.
 
 
산딸기
 
체호프의 사회적 문제에 대한 시각을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는 작품
 
이반의 동생은 시골생활을 오랫동안 갈망하다 현재 시골생활을 하고 있다. 실제가 자신이 꿈꿔 왔던 이상과 다르다는 것을 알지만 그 현실에 적응하고 타협하면서 자신이 산딸기를 마음껏 먹기 위해 희생된 다른 사람들의 고통과 가난을 상징하는 산딸기의 딱딱하고 신 맛을 외면한 채 맛있다, 즉 "나는 행복하다"고 자기 최면을 걸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반 이바니치는 이러한 자신의 동생의 모습을 보면서
만족을 느끼며 행복하게 사는 인간의 문 뒤에 누군가 작은 망치를 들고 서서 계속 두드리며 이 세상에는 불행한 인간들이 있고 그가 지금 아무리 행복해도 삶이 언젠가는 자기 발톱을 드러내 병, 가난 등 끔찍한 일이 일어날 것이고 그 때가 되면 지금 그가 다른 이들의 불행을 보지도 듣지도 못했듯이, 아무도 그의 불행을 보거나 들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이를 부르킨이나 알료힌에게 말하지만 그들에겐 재밌는 얘기도 아니고 궁금한 얘기도 아니었다. 무겁고 진지하고 안타깝고 분노해야 하는 얘기보다는 가볍게 즐길 수 있는 얘기를 나누고 싶었던 것이다.
체호프는 이러하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도 소리치지 않고 아무도 분노하지 않고 침묵해 버린다면 그 끔찍한 침묵, 고요 이면에 감추어져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불행과 고통은 그렇게 쌓여만 갈 것이라는 것을. 그래서 마지막으로 이렇게 외면하는 이들에게 외친다.
 
"행복은 존재하지 않고(누군가의 불행 위에 서 있는 행복이므로)존재할 수도 없지만, 만일 삶에 의미와 목표가 있다면, 그 의미와 목표는 우리의 행복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 더 합리적이고 위대한 것에 있는 겁니다. 선한 일만 하십시오!" (p.185)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

 

사랑이 뭔지 제대로 몰랐던 두 사람이 만나서 진정한 사랑을 알게 되고 그동안 스스로를 속이면서 삶의 핵심은 잊은 채 무의미한 일상을 반복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한번 알게 된 이상 예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그들은 오랫동안서로 다른 새장에 갇혀 살게 된 두 마리의 암수 철새였다. 이제 그 굴레에서 벗어나 보려고 한다. 그 길은 복잡하고 어렵겠지만 동시에 새롭고 아름다울 것이기에.

 

시작은 흔한 불륜이지만 어딘가 결핍된 채 살아가고 있던 두 사람은 서로에 의해 그 공허한 마음을 채울 수 있었다. 그리고 사랑하게 되었다. 두 사람이 사랑을 느끼게 된 건 서로에게서 자신의 그런 모습을 보았기 때문일까?

겉으로는 평온한 듯, 누가 보기에도 명백한 삶을살아가고 있었지만 스스로를 속이면서 거짓이자 껍질인삶을 살아가고 있는 두 사람을 닮아 있기에 그러기에 끌렸던 것 같다.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하고 결혼해서 한평생을 살 수 있다는 건 축복이다. 하지만 현실에서 그런 경우가 얼마나 되겠는가. 사랑이 뭔지 모를 때는 모른 채로 살아가는 게 크게 잘못되었다고 느껴지지 않는다. 마음 한가운데 구멍이 조금씩 커져갈 뿐. 

 

물론 그들의 사랑도 언젠가는 시들어 버릴 지도 모른다. 이뤄지지 않아서 더욱 애틋한 무언가가 있었다고 보기 때문에.

만약 그들의 사랑이 시들어 버리게 되면 결과론적으로는 시들어 버릴 사랑을 위해 그렇게 모든 것을 내던지고 복잡하고 어려운 길을 갔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들의 사랑이 시들어서 말라 비틀어질지라도 한평생을 거짓인 채로 숨기고 살아가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후회하지 않을 거라고 본다. 한순간이라도 온전히 자신들의 감정을 대면하고 그것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자신에게 씌워진 굴레를 벗어나 보고자 노력했기 때문에. 불륜이 아니었음 물론 더 좋았겠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불륜이다 아니다가 아니다. 자기 자신에게 솔직하지 못했던, 핵심이 아닌 껍질만을 추구했던 두 사람이 그 껍질인 삶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도덕적인 잣대로만 그들의 사랑을 평가하기는 어려운 것 같다.

 

사실 나는 단편을 그다지 선호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체호프의 단편들은 짧지만 강한 울림을 주는 작품이 많았다.

삶과 사랑에 대해 보다 깊은 생각을 하는 계기를 준 소중한 작품으로 기억할 것이고

그의 다른 작품들도 만나 보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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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싶은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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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수준의 한국기업에 도전한다
박철순.수만트라 고샬 지음 / 21세기북스 / 2003년 9월
평점 :
품절


우리나라 기업이 세계수준의 초일류 기업이 되기 위해서는 그들의 경영방식이 아닌 우리만의, 우리나라의 장점을 살릴 수 있는 경영방식으로 승부를 봐야 한다는 저자의 시각이 색다르고 돋보인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여러 가지 예를 많이 들었는데 특히 친숙한 우리 나라 기업이 실제로 행하고 성공한 사례를 꼼꼼하게 조사하고 분석, 평가하여 이해에 많은 도움이 되었으며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다.

초일류 기업이 되는 일은 정말 어렵고 힘든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불가능한 일도 아니라고 본다. 이 책에 나온 것처럼 변신을 두려워해서는 결코 이뤄낼 수 없다고 생각한다.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성공한 초일류기업이 되기 위한 논의와 방법에 관한 많은 경영서적들이 번역되어 출판되어 있지만 정작 우리에게 와닿고 필요한, 우리나라의 입장에서 분석한 책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그런 면에서 이런 책이 나오게 된 것이 반갑고 많은 사람들이 읽어봤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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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달 2022-08-02 0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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