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관하여 -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과 대표 단편들 펭귄클래식 70
안톤 파블로비치 체홉 지음, 안지영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10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처음 접한 체호프의 작품인데

솔직히 표지에 혹하지 않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초기작에 속하는 굴, 진창,구세프

중, 후기작에 속하는 검은 수사, 로실드의 바이올린

체호프 스스로가 소 3부작이라고 한 상자 속의 사나이, 산딸기, 사랑에 관하여

그리고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

총 9개의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굵게 표시한 것은 특히 마음에 들었던 작품들)

 

이 중에서 검은 수사와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이 가장 알려져 있는 것 같다.

당시 러시아 시대상을 반영하는 사회적 문제의식을 드러낸 단편들이 많다. 내가 느끼기엔 등장인물들의 말을 빌어서 문제 의식을 직접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생각했는데, 작품들을 발표할 당시에는 답을 제시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주제의식이 부족한 작가라고 비평가들한테 비난의 소리를 들어야 했다는게 좀 의아하지만 시대 분위기는 다른 법이니깐.

 



 

짧지만 강렬한 시각적, 후각적 인상을 통해, 세상 물정도 잘 모르는 아이의 상상과 행동을 통해

굶주리고 있는 비참한 현실을 극명하게 보여 주고 있는 작품이다.

오랜 기간동안 굶어서 쓰러질 것 같은 상태의 아버지와 아이가 있다.

굴이 뭔지도 모르지만 굶주림에 지친 아이의 상상 속에서 굴의 이미지는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것에서 맛없고 이상하고 징그러운 것으로 변해간다. 하지만 아이는 그저 식탁에 앞에 앉아 미끌미끌하고 짭짤하고 곰팡이 냄새를 풍기는 날것을 먹는다. 씹지도 보지도 않고, 뭘 먹고 있는지도 모른채 게걸스레 먹어댈 수밖에 없다.


 

이 순간이 지나면 언제 또 먹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을지도 모른다. 어른인 아버지가 체면때문에 도와달라는 말을 하지 못한 것과 대조적으로 아이는 보다 기본적인 욕구에 충실하다. 부모는 아이에게 기본적인 의식주를 해결해 주어야 한다. 구걸을 해서라도 말이다. 그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해 아이는 어른들도 취향 타서 못 먹는 사람들이 많은(내가 그 부류에 속해서 그런지 몰라도 더 공감이 갔다) 특유의 비릿한 내음과 얼핏 보면 누가 토해 놓은 가래 같기도 한 이상하게 물컹거리게 생긴 "굴"을 눈 질끈 감고 먹을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었다. 아버지와 아이를 러시아 정부와 당시 배고픔을 겪고 있던 러시아 국민들로 대입해서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배고픔 앞에선 개인의 취향 따윈 존중받지 못한다. 그야말로 배부른 소리인 것이다.

어린 아이가 굴을 게걸스레 먹을 정도로 배고픈 건 얼마나 굶었다는 걸까?




 
진창
 
꽤나 흥미롭게 읽었다.
인간의 은밀하면서 잠재되어 있는 원초적인 욕망을 솔직하게 드러낸 작품으로 누구나 평온하고 순탄한 삶을 원하고 정숙한 배우자와 사랑스런 자식들을 원하지만 무료한 일상은 어쩐지 지겨워 일탈을 꿈꾸는 인간의 심리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 작품에서 압권인 부분은 중위의 사촌형인 크류코프가 혼외정사를 한 달에 한번쯤 권태로운 일상의 활력쯤으로 간단하게 자기 합리화하면서 그 뻔뻔하고 냉소적이면서 묘한 색기를 흘리는 수산나를 다시 찾아간 자리에서 비슷한 목적을 가지고 찾아온 지역 유지와 자신의 사촌동생인 중위를 만났을 때이다. 자신의 속마음을 숨김없이 드러낸 일기장을 남에게 들킨 것같은 당혹스러움 그 자체인 장면
수산나는 '겉으로는 신사인 척 점잖고 많이 배운 체하지만 너희도 결국은 똑같다! 그렇게 쉽게 욕망에 굴복할 거면서' 라고 생각하며 그런 상황을 즐겼을 지도 모른다.
이 작품이 발표되었을 당시 꽤 논란이 있었다고 하는데, 불편한 진실을 대면했을 때 당혹스러움을 느낀 이들의 견해였으리라. 그러한 논란에 체호프는 인간에게는 선한 욕망만 있는 게 아니라 악한 욕망도 있는 법이라면서 응수했다고 한다.
읽으면서 극 중 수산나의 매력은 아쉽게도 여자인 내가 느끼기는 좀 힘들었지만 당시 세침하고 정숙한 척 하는 숙녀들과 달리 너무 솔직하다 못해 천박해 보이기까지 하지만, 그래서 넘쳐나는 열정과 에너지가 신선했을지도 모르겠다. 시골 생활에서는 느끼기 힘든 활력이었을테니
 
 

검은 수사

 

좀 난해한 작품

코브린은 검은 수사의 환영을 볼 땐 행복했다. 활기가 넘기고 유머가 넘치고 여유로웠다. 하지만 환영을 보지 않게 되자 활기가 없어지고 신경질적이고 난폭해졌다. 가까운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불행하게 만들었다.

여기서 코브린이 검은 수사를 보게 되는 의미는 무엇일까?

일반 사람들이 보기에 코브린은 과대망상증에 걸린 미친 사람이며, 검은 수사를 보는 것은 치유해야 하는 질병이다. 하지만 본인에겐 그렇지 않았다. 조금 더 삶의 기쁨, 충만함을 느끼게 해 주는 것이었다. 코브린은 나중에 원망하면서 말한다. 자신을 평범한 사람으로 만들어 버렸다고.

현실에서 평범하지 않은 사람을 보면 비정상으로 보고 불편함을 느끼고 그들을 우리와 같은 평범한 사람으로 만들고자 한다.

단순히 미쳐서 타인에게 해를 가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런 것에 대한 체호프의 반발이 아니었을까 싶다. 예술가들이나 조금은 남들과 다르지만 남다른 재능을 가지고 있는 이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세상의 틀에 끼워 맞추려고 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향한.

특히 우리나라처럼 튀는 사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회에서는 더욱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한다.

 
 
로실드의 바이올린
 
야코프는 관 짜는 남자이다. 온갖 핑계를 대면서 그다지 성실하게 인생을 살아왔다고는 할 수 없다. 부인인 마르파의 죽음을 계기로 사는 것은 온통 손해투성이라고 불만만 늘어놓고 부인은 구박하고 이유없이 유대인인 로실드를 미워했던 일을 반성하게 되고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야코프가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강가가 자작나무숲 대신 자작나무 한 그루가 쓸쓸히 서 있는 곳으로 변할 동안 야코프의 영혼도 더 이상 싱그럽게 반짝이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손해만을 기억하는 늙은이로 변해버린 것이다.
우리들의 삶도 야코프의 삶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어렸을 때 가졌던, 젊었을 때 가졌던 그 싱그러움이 빛을 점점 바라게 되는건 비단 육체만이 아닌 것이다.
긍정적인 것을 기억하기 보다는 부정적인 것을 기억하고 이해타산적이 아닌 마음으로 대해야 할 가족간에도 내가 입은 이해득실을 은연 중에 따지는 모습을 보면서 흠칫 놀라게 되는 일이 잦아지는 것을 보면 말이다. 더 늦기 전에 자작나무 숲을, 금빛 솜털이 난 아기를 기억해야 겠다.
야코프는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진심을 담아 바이올린을 연주하게 된다. 그 전까지는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연주했을 뿐이다. 기교는 뛰어났지만 울림을 주지 못했던 연주는 어느새 듣는 이들로 하여금 뜨거운 눈물을 흘리는 연주로 변해 있었다.
그 영혼이 담긴 바이올린은 로실드에게 주어지고 로실드의 연주를 통해 그 감동은 계속 전해지게 된다.
이 작품이 나에겐 로실드의 바이올린 연주같았다. 1894년에 발표된 작품이지만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울림을 전해주고 2010년 나한테까지 왔으니 말이다. 체호프의 영혼을 느낄 수 있었던 소중한 작품이다.
 
 
산딸기
 
체호프의 사회적 문제에 대한 시각을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는 작품
 
이반의 동생은 시골생활을 오랫동안 갈망하다 현재 시골생활을 하고 있다. 실제가 자신이 꿈꿔 왔던 이상과 다르다는 것을 알지만 그 현실에 적응하고 타협하면서 자신이 산딸기를 마음껏 먹기 위해 희생된 다른 사람들의 고통과 가난을 상징하는 산딸기의 딱딱하고 신 맛을 외면한 채 맛있다, 즉 "나는 행복하다"고 자기 최면을 걸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반 이바니치는 이러한 자신의 동생의 모습을 보면서
만족을 느끼며 행복하게 사는 인간의 문 뒤에 누군가 작은 망치를 들고 서서 계속 두드리며 이 세상에는 불행한 인간들이 있고 그가 지금 아무리 행복해도 삶이 언젠가는 자기 발톱을 드러내 병, 가난 등 끔찍한 일이 일어날 것이고 그 때가 되면 지금 그가 다른 이들의 불행을 보지도 듣지도 못했듯이, 아무도 그의 불행을 보거나 들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이를 부르킨이나 알료힌에게 말하지만 그들에겐 재밌는 얘기도 아니고 궁금한 얘기도 아니었다. 무겁고 진지하고 안타깝고 분노해야 하는 얘기보다는 가볍게 즐길 수 있는 얘기를 나누고 싶었던 것이다.
체호프는 이러하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도 소리치지 않고 아무도 분노하지 않고 침묵해 버린다면 그 끔찍한 침묵, 고요 이면에 감추어져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불행과 고통은 그렇게 쌓여만 갈 것이라는 것을. 그래서 마지막으로 이렇게 외면하는 이들에게 외친다.
 
"행복은 존재하지 않고(누군가의 불행 위에 서 있는 행복이므로)존재할 수도 없지만, 만일 삶에 의미와 목표가 있다면, 그 의미와 목표는 우리의 행복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 더 합리적이고 위대한 것에 있는 겁니다. 선한 일만 하십시오!" (p.185)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

 

사랑이 뭔지 제대로 몰랐던 두 사람이 만나서 진정한 사랑을 알게 되고 그동안 스스로를 속이면서 삶의 핵심은 잊은 채 무의미한 일상을 반복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한번 알게 된 이상 예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그들은 오랫동안서로 다른 새장에 갇혀 살게 된 두 마리의 암수 철새였다. 이제 그 굴레에서 벗어나 보려고 한다. 그 길은 복잡하고 어렵겠지만 동시에 새롭고 아름다울 것이기에.

 

시작은 흔한 불륜이지만 어딘가 결핍된 채 살아가고 있던 두 사람은 서로에 의해 그 공허한 마음을 채울 수 있었다. 그리고 사랑하게 되었다. 두 사람이 사랑을 느끼게 된 건 서로에게서 자신의 그런 모습을 보았기 때문일까?

겉으로는 평온한 듯, 누가 보기에도 명백한 삶을살아가고 있었지만 스스로를 속이면서 거짓이자 껍질인삶을 살아가고 있는 두 사람을 닮아 있기에 그러기에 끌렸던 것 같다.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하고 결혼해서 한평생을 살 수 있다는 건 축복이다. 하지만 현실에서 그런 경우가 얼마나 되겠는가. 사랑이 뭔지 모를 때는 모른 채로 살아가는 게 크게 잘못되었다고 느껴지지 않는다. 마음 한가운데 구멍이 조금씩 커져갈 뿐. 

 

물론 그들의 사랑도 언젠가는 시들어 버릴 지도 모른다. 이뤄지지 않아서 더욱 애틋한 무언가가 있었다고 보기 때문에.

만약 그들의 사랑이 시들어 버리게 되면 결과론적으로는 시들어 버릴 사랑을 위해 그렇게 모든 것을 내던지고 복잡하고 어려운 길을 갔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들의 사랑이 시들어서 말라 비틀어질지라도 한평생을 거짓인 채로 숨기고 살아가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후회하지 않을 거라고 본다. 한순간이라도 온전히 자신들의 감정을 대면하고 그것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자신에게 씌워진 굴레를 벗어나 보고자 노력했기 때문에. 불륜이 아니었음 물론 더 좋았겠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불륜이다 아니다가 아니다. 자기 자신에게 솔직하지 못했던, 핵심이 아닌 껍질만을 추구했던 두 사람이 그 껍질인 삶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도덕적인 잣대로만 그들의 사랑을 평가하기는 어려운 것 같다.

 

사실 나는 단편을 그다지 선호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체호프의 단편들은 짧지만 강한 울림을 주는 작품이 많았다.

삶과 사랑에 대해 보다 깊은 생각을 하는 계기를 준 소중한 작품으로 기억할 것이고

그의 다른 작품들도 만나 보고 싶어졌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