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암을 읽는다
박희병 지음 / 돌베개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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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 박지원
그에 대해 북학파의 핵심 인물 정도로만 알았지 정작 아는게 별로 없었다. 
법고창신(법고해서 창신하다: 고를 바탕으로 재해석, 재창조하여 금을 만드는 것)이 어떤 것인지 제대로 보여준 대단한 문장가였다는 사실을 이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으며, 현학적이지 않고 진부하지 않아 지루하지 않고 생동감이 넘치는 점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저자 말로는 문장의 장대한 기에 의해서 그렇다고 한다.

서사와 묘사와 의론론에 두루 뛰어났던 연암의 글들 중 저자가 좋아하는 것 위주로 20편의 산문을 뽑아서 분석과 종합의 묘를 보여주는 방식으로 서술하고 있다. 먼저 한 편 전체를 보여주고 단락별로 깊이 음미하고 총평을 가하는 식으로 말이다. 이 책을 통해 연암의 산문 속에서 연암의 교우 및 가족관계, 글 읽기와 글 쓰기에 대한 생각, 경세의식, 당시 지배 세력에 대한 비판의식까지 두루 느껴볼 수가 있어서 연암에 대해 한층 다가간 기분이 들었다.

연암은 제문이나 기문, 묘지명을 쓸 때도 당시 정해져 있던 전형적인 형식에서 벗어난 파격적인 글을 많이 썼는데, 단지 기발함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글에 내재되어 있는 사유의 깊이와 통찰력이 바탕이 되어 진정성을 갖추고 있어 감동적이고 감탄하게 만들었다. 또한 연암은 글을 쓸 때, 대상과의 에피소드를 삽입하는 방식을 즐겨 사용하였는데,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그 적절한 에피소드 하나만으로 인물과의 관계, 인물의 성격이나 인격, 인물에 대한 자신의 심정 등을 매우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있어서 인상적이었다. 이는 스쳐 지나갈 수도 있는 경험에 대한 주의 깊은 통찰력이 없으면 불가능한 것이며, 숱한 경험 중에서 가장 적절한 것을 끄집어 내는 능력이 탁월했기에 가능했으리라. 우리는 통상 별다른 경험이 없어서 쓸 게 없다고 하지만 연암이 텍스트 내에서 예로 들고 있는 에피소드도 특별하거나 진기한 경험이 아닌 것을 보면 삶의 대한 깊은 사유를 바탕으로 한 통찰력의 차이라고밖에 할 수 없을 것 같다.

 

이 책의 단락별로 분석하는 부분이 연암의 산문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연암은 자신의 생각을 피력함에 있어 매우 적절한 고사 등도 많이 인용하였는데, 그런 고사를 알지 못하는 경우에는 이해가 잘 되지 않아 의아할 수 있는 부분을 해소시켜 주었다. 또한 연암 주변 인물들의 글 등 보충적인 텍스트 등도 적절하게 삽입하여 해석의 풍부함을 더하고 있어 연암의 글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고 있다. 사실 이 책에 나오는 연암의 글들은 그리 길지 않지만 분석하는 부분의 분량은 결코 짧지 않다. 연암의 글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기본 지식이 바탕으로 깔려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논어나 맹자, 대학, 중용, 주역, 사기열전을 이미 읽은 사람들이 좀 더 연암의 글을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그리하여 다시 한번 고전 필독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이 책에 나오는 20편의 산문들 모두 빼어나지만, 특히 술에 취해 운종교를 밟았던 일을 적은 글, 홍덕보 묘지명, 초정집 서문, 공작관 글 모음 자서, 발승암 기문 등이 기억에 남는다.

 

술에 취해 운종교를 밟았던 일을 적은 글을 보면 오가 등장한다. 오는 티베트산 개라고 한다. 일명 사자개라고 하며 4척이나 되는 무척 큰 개인데 연암은 오에 빗대어 세상에 영합하지 못하여 현실에서 소외되어 곤궁하게 살아가는 연암 일파의 처지를 나타내고 당시 사대부들의 청조 문화를 배격하는 일관된 태도도 비판하고 있다. 후반부는 공간의 이동과 시간의 이동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는데, 고즈넉한 분위기를 자아내며 매우 서정적이어서 아름답다. 하지만 이 글은 거기서 그치지 않기 때문에 더욱 뛰어나다고 볼 수 있는데, 혼탁하고 답답한 상황에서도 견지해야 할 선비의 자세를 새 아침을 여는 세 가지 동물들 소리에 비유하여 끝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개구리 소리는 백성을 잘 다스려 편안하게 살도록 해 주어야 하는 사대부의 자세, 매미소리는 글을 읽어 사람으로서의 도리를 배우는 사대부의 자세, 닭 우는 소리는 군주가 잘못할 경우 목숨을 걸고 직언해야 하는 사대부로서의 자세를 나타내며, 이는 모두 연암의 경제의식를 보여준다.

 

발승암 기문은 독자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연암이 김홍연이란 이름을 여기 저기서 볼 때마다 느꼈을 ’대체 김홍연이 누구야? ’라는 생각을 독자도 같이 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점차 그를 알아감에 따라 바뀌어 가는 연암의 심리 상태가 잘 서술되어 있어 독자도 비슷한 심리 상태를 경험하게 된다. 또한 연암은 통상적인 도덕적 관점으로 사람을 평가하지 않고 "돈을 쌓아 두고 쓰지 않으면 가난한 거지와 무어 다를까. 중생 사람들은 제각각 살면은 되지 억지로 남을 배울 건 없네. "라면서 협객 김홍연의 삶을 긍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고 세상으로부터 외면당한 그에게 연민을 느끼고 있다. 우리는 대부분 다른 사람의 시선이나 기준에 따라 스스로도 평가하면서 자신을 부정적으로 보거나 불행하다고 느끼는데 이는 삶을 살아나가는 바람직한 태도가 아닐 것이다. 이 글은 재미있을 뿐 아니라, 허상에 불과한 이름을 남기는 것에 집착했던 유교 문화를 반성적으로 성찰하는 태도도 보이고, 연암의 인간 존재에 대한 연민과 그 존재가 맞닥뜨리게 되는 운명에 대한 깊은 이해도 보여주고 있다.

 

초정집 서문은 글쓰기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뚜렷하게 보여주는 글이다. 연암은 법고와 창신의 미학적 논쟁에 쐐기를 박으면서 법고가 모방으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지변이 필요하다고 하였는데, 형편과 상황에 맞게 재창조하는 것을 의미하고 지편을 통해 법고는 진부함과 구태의연함을 벗어나 참신하고 창의적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또한 청신이 경박하지 않으려면 능전이 필요하다고 하였는데, 능전은 법도가 있다는 것이며 전통의 활용 위에서 창작 행위가 일어나 창작의 깊이와 두께를 확보해야 내면적 충실함을 가질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러면서 후반부에 법고창신의 네 가지 예를 들고 있는데, 공명선의 일, 한신의 일, 노나라 어떤 남자의 일, 우승경의 일이 그것이다. 네 가지 고사는 실질적으로는 글쓰기와 아무 관련이 없으나 법고창신의 타당성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사용하였는데 굉장히 기발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상투적으로 인용하지 않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 이 부분이야말로 연암의 법고창신의 자세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방식으로 법고창신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그리고 마지막의 "편협함과 공손하지 않음은 군자가 추구할 바가 아니다" 의 의미를 살펴 보면, 맹자에 나오는 말인데 연암은 이것을 글쓰기에 비유하고 있는 것이다. 편협함은 옛 틀에 얽매여 새로운 것을 창조하지 못하는 폐단을 가리키고 공손하지 않음은 새것 만들기에 급급하여 상도에 어긋나게 되는 폐단을 가리키는 말로 썼다. 연암은 이처럼 참신한 비유와 예시를 적절하게 사용할 줄 알았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의 "새것을 만들다가 공교해지기보다는 차라리 옛걸을 모범으로 삼다가 고루해지는 편이 나을 터이다." 라는 부분에 대해 저자는 이 글이 박제가의 초정집에 써 준 서문이며, 박제가에게서 창신의 폐단이 보이는 듯하여 이런 점을 눌러주기 위해서 고문을 강조했을 뿐 그 의미를 확대해석해선 안된다고 강조한다. 연암의 글은 당대에 창신파로 간주되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분법적인 사고로 인해 연암의 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니 정조의 문체반정때 연암은 경박하고 자잘한 소품문의 문체의 주범으로 지목받았던 것으로 연암 입장에서 얼마나 답답하였을까. 어떤 높은 경지에 오른 사람의 글을 꿰뚫어 보기란 쉬운 일이 아님을 다시 한번 느낀다.

 

공작관 글 모음 자서에서 보면, 글 짓기는 그럴듯하게 포장하기보다는 무엇보다 진실해야 된다고 하고 있다. 그리고 연암은 여기서 회화의 원리를 원용하고 있는데, 초상화를 그릴 때 근엄하게 꾸민 모습이 아닌 평소의 모습을 그리는 것이 생동감 있듯이, 글도 그래야 한다고 설파하고 있다. 또한 후반부에는 생활에서의 체험을 토대로 하여 구체적인 비유를 하고 있는데, 창작의 문제는 이명처럼 작가의 고심을 남들에게 온전히 전달되거나 이해될 수 없다는 점을 말하고 있고 비평의 문제는 코골이처럼 본인은 자신이 창작한 작품의 결함을 잘 알지 못한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 공작관 글 모음은 연암 자신의 글인바, 비평해주면 감사하게 받아들이겠다는 연암 평소의 성찰적이고 반성적인 태도를 엿볼 수가 있다. 코고는 사람에게 코 곤다고 지적하면 그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불쾌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많은데, 연암은 이명처럼 독자가 자신의 의도나 고심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더라도 자신의 부족한 점을 일깨워주기를 바라고 지적 당하는 일을 불쾌하게 여기지 않았다. 역시 뛰어난 사람은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이명과 코골이의 비유라니! 정말 이해가 절로 되는 그런 비유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연암은 여러 글에서 비판적 글읽기를 강조하고 있는데, 따라서 연암의 글도 비판적으로 읽을 필요가 있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모든 글은 넓은 의미에서 당파성이 개입되기 마련이므로 비판적인 대면이 요구된다. 비판적 글읽기란 주체적 글읽기와 다름 아니다. 비판적으로 읽지 않으면 텍스트에 속고 텍스트에 투항하게 된다. 텍스트에 투항은 인식의 해방이 아니라 인식의 마비를 초래하게 마련이다.(p.226) <기린협으로 들어가는 백영숙에게 주는 서>에서 보면 연암의 당파성을 엿볼 수 있다. 연암은 노론이었는데, 노론과 국가를 동일시하고 있는 당파성을 읽어낼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무비판적인 수용과 칭송도 역시 경계해야 마땅하다. 연암은 비교적 당파성이 강한 인물은 아니었으나 연암이라고 해서 그 시대 의식을 온전히 뛰어넘을 수는 없었다.(동시대인 중 뛰어난 학자인 정약용 등 남인과의 교류는 거의 없었다고 한다.)

 

또한 여기서 연암은 글읽기와 글쓰기에 있어 감수성과 상상력을 매우 강조하고 있는데(소완정 기문 참조), 윤석철 교수님의 삶의 정도에서도 목적함수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 매체의 개발에 있어 이를 강조하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고 보여진다. 감수성과 상상력은 완이라는 글읽기와 글쓰기에 필요한 것인데, 그러한 완(온 몸의 감수성을 동원하여 대상의 정수를 파악하는 것)은 텍스트의 외연이 확장되어 결과적으로 세상을 제대로 이해하고 현실을 제대로 읽어내는 것이며 완(수단 매체)을 통해 자신이 정립한 인생의 목적함수를 달성해 나가는 게 삶의 정도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완이라는 글읽기는 하루 아침에 완성되는 것이 아닐 것이다. 마음을 비우고 대상과의 비판적 거리를 유지한 채, 깊게 사색하면서 부단히 노력했을 것이다. 나도 완의 글읽기, 글쓰기를 할 수 있기를 바라며 부지런히 노력해야 겠다. 단순한 박람강기를 경계하면서 말이다.

 

진부하지 않으면서 참신하고 파격적이면서 결코 가볍지 않고 진중한 글을 쓰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기 때문에 연암의 글은 더욱 빛을 발한다.

게다가 벗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음악을 사랑하고 열린 마음으로 학문을 받아들이고 백성을 진정으로 위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던 그는 매우 매력적이다.

이런 멋진 연암에 대해 좀 더 빨리 알았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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