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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전 난생처음 서평이라는 이름으로 글을 써 봤다. 나는 지금까지 글을 쓰면서 장르에 별로 구애받지 않았다. 그냥 자유롭게 느낌을 썼고 그게 시도 되었다가 소설도 되었다가 수필도 되었다가 논문도 되었다가 비평도 되었다. 그때 그때 글에 따라 적절히 장르가 형성되었다. 워낙 체질이 아웃사이드라 어느 특정한 사안이나 요구에 의해 글을 쓰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학문이 분화되기 이전처럼 크로스 오버 글들이 많다.

   그런데 서평할 책을 받아 서평이란 걸 쓰 보니 서평이 비평과 어떻게 다른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서평은 지나치게 비평적이어서는 안 되는 모양이었다. 서평은 책의 내용을 일목 요연 하게 설명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하는데 나는 다짜고짜로 비평적 안목으로 내용을 비틀면서 시작했으니 서평의 ABC도 모르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서평은 책을 아직 읽지 않은 독자가 책을 읽고 싶은 마음을 갖게 써야 하는데 숫제 책을 읽고 싶은 마음조차 들지 않게 비평을 하고 나섰으니 책을 다 읽은 사람들을 위해 쓴 김 빠지는 글이 되고 말았다. 이래저래 맞춤형이나 주문형 글은 내 체질에 맞지 않는 모양이구나 하고 만다.

   한데 또 한 편으로 곰곰 생각해 보면 책의 내용을 일목 요연 하게 적어 놓은 것이 그렇고 그런 대충 알만한 것들이라면 누가 그 책을 사 볼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나 같으면 그런 책은 사보지 않겠다 싶은 것이다. 서평을 읽는 것만으로 충분히 책을 다 읽은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그 내용이 아주 새로운 것이 아니라면 내용의 노출은 삼가해야 하며 외려 비평이 호기심을 자극할 수가 있다.

   내용을 적절히 숨기면서도 어떤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묘한 낚시밥이 걸려 있어야 살 마음이 생길 것이다. 하지만 그 낚시밥이 모든 것을 까발리는 비평일 때도 책 내용을 까발리는 것과 마찬가지 효과를 내는 게 아닐까 싶다. 비평의 속성이 뒤집어 까발리는 것이긴 하지만 착한 독자가 거부감을 일으킬 정도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서평은 책의 내용을 비평하는 것과 함께 책의 편집이나 디자인은 물론 작가의 말이나 기획의도도 읽어내야 한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혹평만은 삼가해야 하는데 내가 얼마나 그 예절에 부응할 수 있을 지는 의문이다. 아웃사이드는 비평을 비평하는 기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혹 혹평이 아니라 하더라도 자칫 혹평으로 비춰지기 쉬운데 독자는 결코 아웃사이드가 아니기 때문이다.

   독자는 책을 통해 배움을 얻고자 하지 새로움을 얻고 싶어하지 않는다. 새로움은 자칫 위험한 것일 수 있음이다. 비평이 여러가지 시각을 제시해 주는 것이기는 해도 새로움이 다양성을 지배하는 것이라면 독자는 이를 쉬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독자는 항상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넌다. 그래서 다양한 돌들 중에서도 고전에 해당하는 것에 대한 맹목적 신뢰가 있다. 비평은 그 고전의 돌 앞에 새로운 고전이 될 돌을 조심스레 독자 앞에 놓아주는 것이어야 한다.

   서평은 항상 새로운 고전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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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의사 장기려
손홍규 지음 / 다산책방 / 2008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어느날 문득 박사님이 보고 싶어 네이브에서 박사님 이미지를 클릭 했더니 '청년의사 장기려'라는 책 표지에 하얀 가운을 입은 박사님의 젊은 시절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얼마나 반가웠던지. 박사님의 젊은 시절을 소설로 그린 책이었는데 주문을 해 앉은 자리에서 단숨에 읽었다.  

   박사님의 젊은 시절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던 터라 박사님을 새롭게 만나는 느낌이었다. 박사님의 성품이나 인품을 아주 가까이서 접하는 듯했다. 박사님의 평전을 읽어보지 않아서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가상인지 모르지만 읽는 동안만은 모든 게 논픽션으로 느껴지듯 잘 읽혔다.

   책을 읽기 전에는 '쳥년의사 장기려'가 크로닌의 소설 '성채'의 주인공에 필적하는 인물이라 생각하고 개인적인 욕심을 부려 그 이상을 기대했었다. 그러나 충분한 가능성이 있는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작품성은 그에 따라주지 못했다. 무엇 때문일까.

   우선 인물소설이라는 틀에 너무 얽매여 전기나 평전 식의 생애를 나열하는 단순한 구조를 보이는 점이 소설의 이야기구조를 방해하고 있었다. 성격이나 성품을 잘 묘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연스런 흐름의 심리적 갈등을 인물의 것이 아닌 작가자신의 설명으로 처리 함으로서 형상화에 미흡한 감을 주지 않았나 싶다.

   워낙 유명하신 분이라 이광수, 조만식, 함석헌, 김일성 등 역사적 인물들과의 만남이 자연스레 녹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때문에 오히려 그 인물들과의 에피소드 모음집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는 것은 읽는 사람의 편견이나 선입견일까. 그러한 인물들에 대한 편견이나 선입견이 없는 외국인들이 읽었을 때 과연 나열식 에피소드 모음이 아닌 자연스런 이야기구조 속 감동으로 녹아 전달되는 것일까. 예술작품은 역사적 인물화의 수준을 뛰어 넘는 그 무엇으로 녹아 들어야 한다. 

   그와 반대로 작가가 창조한 인물인 듯한 평범한 사람들이 몇몇 등장하는데 그 인물들은 오히려 과장된 우연처럼 포진돼 있어서 유명인들과의 괴리를 느낄 정도로 작품성을 방해하고 있었다. 박의원과 그 아들 박종훈, 그리고 박대길이 설사 실재하는 인물이었다 해도 그 뒤 우연한 만남들이 억지처럼 포진돼 있음을 지울 수 없었다.

   이런 나의 느낌들은 박사님에 대해 내가 너무 많이 알고 있거나 역사적 인물들에 대한 나의 개인적 선입견 때문일 수도 있다. 단순히 설명조의 인물묘사에만 치중해 읽는다면 그 묘사들은 나무랄 데 없이 훌륭하게 감동적으로 읽힐 수 있다. 그러한 감동은 박사님의 인품에 대한 감동이지 소설적 감동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이다. 아무튼 인품에 대한 묘사는 감동적으로 쓰여졌음을 거듭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다.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그보다 더 이상 온전히 사랑할 수 없다는 게 내가 알고 있는 박사님이고 그러한 박사님을 잘 그려주고 있다는 점에서 작가의 수고와 노력에 깊이 감사한다. 차후에 청년의사 장기려의 후편에 해당하는 노년의 장기려를 집필해 줄 것을 부탁하며 그 작품은 부디 역사적 인물에 대한 강박을 떨쳐버리고 연애소설 같은 자유로운 필치로 쓰여진 문학다운 문학이 되었으면 하고 기대해 본다. 생전에 그 분을 기리는 기러기 같은 여인들이 많이 있었다고 알고 있다.

   평소에 박사님은 내가 박사님에 대해 띄워 올린 자유로운 글들에 공감을 표하셨다. 그처럼 박사님은 당신 자신을 공경하는 사람으로보다 자연인으로서의 당신으로 기려질 것을 원하셨다. 윤리로서의 사랑이 아닌 자유로서의 사랑을 늘 갈망하셨다.

   장기려, 만인이 쉴 수 있는 사랑의 숲으로 길이길이 기려졌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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