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 귄, 항해하는 글쓰기 - 망망대해를 헤매는 고독한 작가를 위한, 르 귄의 글쓰기 워크숍
어슐러 K. 르 귄 지음, 김보은 옮김 / 비아북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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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스토리텔러, 즉 서사 산문 작가를 위한 안내서다. 솔직히 말하자면 초보자를 위한 책은 아니다. 이미 글쓰기를 열심히 하고 있는 이들을 위해 쓴 책이다. (p. 4, 서문)'

이 책은 르 귄이 진행했던 글쓰기 워크숍에서 그가 했던 조언을 담았다. 저자가 서문에서 밝혔듯이 작가들을 위한 작법서여서 쪽글을 쓰는 나에게는 (특히 각 챕터 끄트머리의 연습 글쓰기를 따라가기가) 버거웠다.

하지만 르 귄은 흔히 창작의 영역으로 간주하는 글쓰기를 기술로 여긴다. 나 같은 글쓰기 초보자에게 희망을 주는 대목이다. 기술은 숙련을 필요로 하는 것이기에 방법을 알고 꾸준히 연습하면 되는 것이다. 다만 얼마나 연습을 해야 할지는 내 몫이다. 나머지 인생을 갈아 넣어야 할지도 모르겠지만 (물론 갈아 넣을 정도로 열정이 없어 그럴 리는 없지만) 아무튼 뭔가를 익히는 건 가치 있는 일이다.


글쓰기 방법에 있어 (몇 가지 안되는) 내가 알고 있던 것들과 다른 르 귄의 조언이 눈에 띈다.

'문장과 단락을 짧게 쓰라는 '규칙'은 "나는 문학적으로 들리는 문장은 다 버린다"라며 뻐기는 작가들에게서 나왔다. (p. 69)'

짧은 문장이 좋다고 들었고, 짧은 문장을 쓰려고 노력하는 중이어서 여러 번 곱씹어 읽은 글이다. 최적의 문장 길이라는 것은 없다고 르 귄은 말한다. 앞뒤 문장과 문장의 내용에 따라 길이가 정해져야 한다. 이 조언 때문에 짧은 문장이 좋다는 단순함이 복잡해져 더 어려워졌다.

'하지만 한 단락에서 같은 단어를 두 번 사용하지 말라는 규칙을 만들거나, 반복을 피하라고 단호하게 주장하는 것은 서사적 산문의 본성을 거스르는 일이다. (p. 73)'

한 단락에서 한 낱말을 반복하기 싫어서 같은 의미의 다른 말을 사전에서 찾곤 한다. 산문에서 리듬을 자아내기 어려운데 반복으로 그걸 할 수 있을뿐더러 글의 재미까지 줄 수 있다는 말이 그래서 더욱 흥미롭다. 낱말을 다양하게 사용하는 것이 유용한 건 맞지만 경우에 따라 사전에서 찾은 단어가 어울리지 않아 문장의 톤을 바꿀 수도 있다고 따끔하게 주의를 준다.


글쓰기 기술을 숙련하는 나에게 쏙쏙 들어오는 팁들도 가득했다. 글을 큰소리로 읽으면 리듬을 갖춘 생생한 글을 만들 수 있다. 원작자를 밝히고 모방한다면 이보다 더 좋은 글쓰기 연습은 없다. 지나친 형용사와 부사 사용은 의미를 희미하게 만든다. 글에는 표정과 억양이 없으니 언어가 명료해야 한다.

초고를 쓸 때는 서슴없이 꽉 '메우고' 퇴고 단계에서는 대담하게 잘라내고 '건너뛰기'하라는 조언은 나 같은 초보자에게 더없이 소중한, 항상 놓치지 말아야 할 글쓰기 기술이었다.


부록 '합평에 관해'는 합평뿐만 아니라 독서모임에 적용해도 좋을듯싶다. 6명 이하는 의견의 다양성이 부족할 수 있고 12명 이상이 될 경우 모임 시간이 길어질 우려가 있으니 모임의 적당한 인원수로 6~7명에서 10~11명 사이를 권한다.

'합평회는 구성원 모두의 실력이 비슷한 수준일 때 가장 효과적이다. 수준이 천차만별인 경우도 괜찮을 수 있고 심지어 귀한 경험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열심히 하지 않고 그저 재미로 글을 쓰는 사람들이 있으면 진지하게 글쓰기에 임하는 구성원들은 점점 의욕이 꺾일 수 있으며, 반대로 적당히 하는 사람들은 진지한 사람들 때문에 지루해질 수 있다. (p. 205)'


자기 그림을 완성하기 위해 화가가 선 긋기를 끝없이 연습하듯 창작의 바탕은 기술의 숙련이다. 규칙도 알아야 규칙을 깨뜨릴 수 있다는 역설처럼 말이다.

이 책이 글쓰기 초보에게도 자신감을 주는 건,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글쓰기도 창작의 영역에 이르기 전에 거쳐야 할 기술의 숙련의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숙련은 방법을 안 다음 그 방법을 반복하는 것이다. 누구나 맘만 먹으면 할 수 있는 반복. 그 결과로 내가 얻게 되는 건, 마법의 배를 내가 원하는 곳으로 이끄는 능력이다.

'내가 이 책에서 말한 모든 것은 이야기가 스스로 말할 수 있도록 놔두기 위한 준비사항이다. 기술을 갖추고 기법을 익힌다면 마법의 배가 왔을 때 거기에 올라타서 배가 가고 싶어 하고 또 가야 만하는 곳으로 이끌 수 있을 것이다. (p. 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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