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병모 <파과>와 김영하 <살인자의 기억법>연쇄살인범 소재라는 공통점과 여성/남성 인물이라는 차이가 일차적으로 눈에 띈다. 그러나 세계를, 인간을, 시간을 바라보는 관점이 매우 날카롭게 다르다는 점이 이 두 소설의 가장 결정적인 차이이다. 이 차이는 두 작가의 전작들에서 죽 이어진 작가의식을 설명해 줄 수 있다.
뭐니뭐니 해도 일본에 대한험담을 하는 동시에 일본인과의 유대를 유지하고 일본어도 쓰고 싶었을 것이다. 당시는 아직 두 아들이 어렸기 때문에 아침부터 흑인 메이드가 와서 일해주는 팔자 좋은 생활이었다. - P55
거무스름한 양복을 입은 형상이 내 앞을 지나 화장실로 갈 때, 순긴 만다린 같은 달콤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날 듯 말 듯 희미해 미국인들이 풍기는 코를 찌르는 것 같은 자극성 강한 냄새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일본인으로서는 드문 일이었다. 불쾌하지 않은 냄새엿음에도 나는 혼자 수치심을 느끼고, 수치심을 느꼈다는 사실에 또 수치심을 느꼈다. - P67
일본에서 온 주재원이 완전히 일본식으로, 아 네, 저런, 하면서 까만 양복을 입고허리를 구십 도로 구부려 인사를 되풀이하고, 서로의 명함을 바쁜 듯이 교환할 때, 그들은 단지 미국에 있는 일본인에 지나지 않았다. 그것을 미국식으로 만들려 하는 순간, 그들이 지닌 미국인의 것이 아닌모든 요소 - 모습, 얼굴 생김새, 표정, 동작, 말…….… 하다못해 납작한 가슴과 가느다란 목에서 짜내는 깊이 없는 목소리에 이르기까지모든 것이, 그들이 절대 미국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드높이 주장하기어버리고 있었다. - P83
나는 오랫동안 내가 부모를 쫓아 미국에 온 것을 극히 개인적인 운명 역사의 흐름과는 무관한 극히 개인적인 운명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사실은 그 반대였다. 우리 가족이 미국에 온 것은 역사의 흐름과 무관하기는커녕, 역사의 톱니바퀴에 편승해 일본 경제의 고도성장이라는 거대한 파도를 탄 것에 지나지 않았다. - P91
내가 마지막으로 사람을 죽인 것은 벌써 25년 전, 아니 26년 전인가, 하여튼 그쯤의 일이다. 그때까지 나를 추동한 힘은 사람들이흔히 생각하는 살인의 충동, 변태성욕 따위가 아니었다. 아쉬움이었다. 더 완벽한 쾌감이 가능하리라는 희망, 희생자를 묻을 때마다나는 되뇌곤 했다.다음엔 더 잘할 수 있을 거야.내가 살인을 멈춘 것은 바로 그 희망이 사라졌기 때문이다.강렬한 서두 - P7
책장에서 괜찮은 시를 발견했다. 감탄하여 읽고 또 읽으며 외우려 애썼는데, 알고 보니 내가 쓴 시였다.
매일 이어지는 대화의 향연.죽지 않기 위한, 사랑에 빠지지 않기 위한, 마침내 그와 사랑을 하시 위한 서로 치고 받는 말들.도대체 이 소설에서 어떻게 계급적 관점으로 읽을 때 더 생생(낭만서점 정이현)하다고 해석할 수 있는지 난 참으로 의문스럽다. 아름다움에 대한 성속적인 해석, 귀족적 섬세함이 주는 사랑 이상의 고양감, 예술이라는 절대성 이런 것들이 아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