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폰서 업체의 텀블러에 녹차라테를 담아놓고 블루베리 치즈케이크를 곁들여 셀카를 찍었다. 내 창백한 피부 톤과 투명한 텀블러에 담긴 녹차라테의 초록빛이 썩 잘 어울렸다. 테이블 옆에세워둔 은색 리모와 캐리어에 새로 산 보스턴백을 올려두고 찍은사진도 함께 업로드했다. 부산, 여행과 스타벅스, 부산국제영화제, 데일리, 같은 의미 없는 단어를 해시태그로 달아두었다. 치솟는 하트 수가 꼭 내 맥박처럼 느껴지던 때가 있었다. 이제는 그조차 무감각해져버렸다. - P87

김의 차를 타고 역으로 향했다. 김이 조수석으로 손을 뻗어 내뒤통수를 쓰다듬었다. 이럴 때면 김이 꼭 내 부모나 반려인 같았다. 김이 친절할 때마다, 몸에 잘 맞는 옷처럼 내 마음이 접히는곳을 알아차릴 때마다 마음이 영 불편했다. 김에게 엄마의 병을알리지 않은 것도 그런 이유인지도 몰랐다. 그가 내 고통이나 힘든 부분까지 다 알아버리고 나면 정말로, 가족 같은 게 되어버릴것만 같아서. 떼어낼 수 없는 가족은 하나로 족했다. 김이 습관적으로 내 손을 잡았다. 언젠가 이 뜨거운 손이 당장이라도 날아갈것 같은 내 마음을 단단히 붙들어준다고 믿었던 때가 있었지. 그믿음이 마치 종교나 신화처럼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슬그머니 손을 빼서 치마에 닦았다. 땀이 나는 것 같았다. - P89

나는 내 주변의 모든 것들을 그저 나를 위한 장식품처럼 여겨왔던것일지도 모르겠다. 지겹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망쳐버렸을 땐상대방 탓을 하며 도망쳐버리면 그만이었는데, 내가 나에게서 도망칠 수는 없었다. 그것만큼 절망적인 일은 없다. - P132

근데 왜 샤넬 향수만 뿌려? 거기서 남자 향수 나오는지도 몰랐네. 샤넬이 뭐 대단한 게 있나?
샤넬이니까. 나는 그런 게 좋아. 그냥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거. 다른 걸로 대체될 수 없는 것들..
샤넬을 뿌린다고 네가 샤넬이 되는 건 아니지 않니, 말하려다.
말았다. 뭔가, 촉이 왔다. 왕샤가 우리 쪽 사람 같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 P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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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럼 되었지만, 사실 프로이트의 모델은(결점은 있지만) 훌륭하다.
루어만의 표현을 빌자면, 거기엔 "인간의 복잡성과 깊이에 대한 인식, 자신의 거부들에 대항하여 싸워야 한다는 절박한 요구, 인생의겨움에 대한 존중"이 들어 있다. 사람들은 프로이트가 이룬 업적의세부 사항들에 대해 옥신각신하고 당대의 편견들에 대해 그에게 비난의 화살을 퍼붓느라 인간은 살아가면서 자신의 동기들에 대해 모르는경우가 많으며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것의 포로라는 그의 글의 기본 진실을, 그의 숭고한 겸손을 간과한다. - P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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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동면을 지속해야 겨우 살아남을 수 있던 시절은 다 잊은 봄날의 곰처럼, 아니면 우리가 완전히 차지할 수 있는 것이란 오직 상실뿐이라는 것을 일찍이알아버린 세상의 흔한 아이들처럼. - P93

그렇게 해서 나는 밧줄도 잡을 것도 없는 비탈길을 엉거주춤 균형을 잡아가며 내려왔다. 눈발은 전보다 더 세어져 있었지만 그래도 젖은 눈이라 앞사람이 밟고 지나간 뒤에는 그 발자국만큼 눈이 녹아 있었다. 그렇게 눈을 녹이는 것이었다. 붙들 것이 없다면그냥 자기가 걸어서. 이만하면 그래도 나쁘지 않고 무사한 안녕이아닌가. 골목을 다 내려온 나는 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내 찢었고꽃가루처럼 공중으로 뿌렸다. - P59

"아니 그렇지는 않았어."
"아니야, 한심했어." .
"아니 그렇지는 않았어. 그 정도는 아니었어." - P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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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중순 어느 날 오전 열한시경, 태양은 보이지 않고 한결 뚜렷해진 언덕들이 폭우를 예고했다. 나는 담청색 양복에 암청색 와이셔츠를받쳐 입고, 넥타이를 매고, 장식용 손수건을 꽂고, 발목에 암청색 수를놓은 검은색 모직 양말과 검은색 단화를 신고 있었다. 이렇게 깨끗하고단정한 차림새에 면도까지 한데다 술에 취하지도 않았으니 누가 좀 알아줬으면 싶었다. 그야말로 말쑥한 사설탐정의 모범답안 아닌가. 사백만 달러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 P7

스무 살쯤 되었는데 몸매가 작고 가냘프지만 야무져 보였다. 하늘색슬랙스가 잘 어울렸다. 허공에 떠다니는 듯한 걸음걸이다. 요즘은 머리끝을 안으로 마는 페이지보이 스타일이 유행인데 그녀의 섬세한 황갈색 곱슬머리는 그보다 훨씬 짧았다. 청회색 눈은 나를 볼 때도 무표정에 가까웠다. 그녀가 내 곁으로 다가오더니 입만 움직여 미소를 지었다. 육식동물을 연상시키는 작고 뾰족한 이가 갓 벗긴 오렌지 속껍질처럼 새하얗고 도자기처럼 반짝거렸다. 지나치게 힘을 주어 얄팍해진 입술 사이에서 이가 빛났다. 얼굴에 핏기가 없어 그리 건강해 보이지는않았다. - P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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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우울증을 제거하려면 우리를 인간이게 하는 정서적 메커니즘들을 손상시키는 방법밖에 없다고 믿는다. 따라서과학이든 철학이든 미봉책을 통해 접근해야 한다.
"이 고통에 이른 것을 환영하노라. 그대는 이것으로부터 배움을 얻으리니." 일찍이 오비디우스("변신 이야기』로 유명한 로마 시인]가 한말이다. 미래에 (당분간은 힘들겠지만) 우리 인간은 화학적 조작을 통해 두뇌의 고통의 회로를 찾아내어 그것을 통제하고 제거할 수 있게될 것이다. 나는 영원히 그렇게 되지 않기를 희망한다. 그것을 제거하는 것은 경험을 무미건조하게 만들고 복잡성을 침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그것의 일부가 우리에게 고통을 주는 것보다 심각한 문제다.)나는 세상을 9차원으로 볼 수만 있다면 기꺼이 커다란 대가를 치를 용의가 있다. 나는 고통받는 능력을 포기하느니 차라리 평생 막연한 슬픔 속에서 살 것이다. 그러나 고통과 심한 우울증은 다르다. 사람은격심한 고통 속에서도 사랑하고 사랑받을 수 있으며 살아남을 수 있다. 내가 근절하고자 하는 것은 우울증으로 인해 살아 있는 시체처럼살아가는 것이며 이 책도 그런 목적을 위해 쓰인 것이다. - P59

침대에 꼼짝도 못하고 누운 채 샤워하기가 너무 두려워서, 그러면서도 샤워는 두려운 일이 아니란 걸 알기 때문에 울던 기억이 난다. 나는 마음속으로 계속 샤워의 단계들을 밟아 가고 있었다. - P81

암의 경우와도 같다. 삽화를 너무 많이 겪게 되면 신체의생화학적 작용 자체가 나쁜 쪽으로 변화하며 그 변화는 영구적인 것이 될 수도 있다. 그런데도 많은 치료 전문가들이 여전히 엉뚱한 방향을 보고 있다. 이제 삽화가 자동적으로 일어나는데 애초에 병을 유발한 스트레스 요인에 대해 걱정해 봐야 무슨 소용이겠는가? 그러기엔이미 너무 늦은 것이다." - P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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