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랜드는 표준 중국어 어학 강좌에 등록했다. 성조 때문에 교사의 도움 없이는 배우기가 불가능하다는 이유도 있어서 어려움의 화신인 언어였다. 음반을 듣는 것만으로는 부족했고, 직접 발음하고 또 발음하며 계속 교정을 받아야 했다. 그는 한 글자 한글자, 성조 하나 하나 읽기 시작했다. 하루에 열 개씩 배운다 쳐도1천 자를 공부하려면 석 달 이상이 걸렸다. 비이성적이고 정신 나간 일이지만 몰락과 사라지는 시간에 대한 저항이었다. 그는 광기를 느끼고 그 광기 속에서 이를 악물었다. 종양이 자라는 뇌는 그가 불굴의 의지, 단어 영역에서 모든 장애물을 넘어서는 집중력, 숙련된 기억력으로 무장하고 맞서는 적이었다. 범죄자이자 독재자, 악령이었다. 2주 후, 아침 여명에 찌르는 두통을 느끼며 그는결국 중국어를 포기했다. - P93

두 사람은 에스파냐어 ‘펠리시다드 felicidad‘가 그 시기의 행복에어울리는 유일한 단어라고 생각했다. 이탈리아어 ‘펠리치타Felicita‘는? 너무 현란하고 깊이가 없었다. 사탕 색깔이나 싸구려 젤라토같은 울림이었다. 프랑스어 ‘보뇌르Bonheur‘는? 너무 평평하고 너무 들척지근하고, 향수를 슬쩍 뿌린 것 같았다. 그럼 영어 ‘해피니스Happiness‘? 귀엽고, 레이랜드 집에 있는 장식품을 떠올리게 했다. 독일어 ‘글뤼크 Glück‘는? 유행가 제목 때문에 돌이킬 수 없이유치해졌다. 그러니까 에스파냐어가 정확하게 어울렸다. 끝의 드미는 거의 영어 ‘th‘처럼 발음해야 했다. 레이랜드와 리비아는 단어에서 다른 사람들이 듣지 못하는 것을 들었다. 두 사람은 자기들만의 울림과 의미 공간에, 타인에게는 닫혀 있는 지극히 사적인공간에 산다는 생각도 가끔 했다. - P156

입하는 걸까?" "그런데 단어들에 관한 이런 이야기를 나누다가불현듯, 솨솨 소리를 내는 바다에 대고 네 아버지가 나더러 결혼하겠냐고 물었지." 리비아가 말했다. "아무 맥락도 없이, 목소리도높이지 않고, 날 바라보지도 않고 정말 지나가는 말처럼 묻더라. 처음에는 영어로, 그다음에 이탈리아어로" - P157

이런 음색은 시간을 바꾸는 능력이 있었다. 불현듯 시간은 언어들이 앞서거나 뒤서거나 하며 줄지어 맞추어 들어가야 하는 외적인틀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가 되었다. 시간은 안드레이의 문장에서 솟아났고, 그의 언어가 시간을 만들어내고 흐르게 했다. 적어도 낭독하는 동안 그는 시간의 창조자이자 주인이었으므로, - P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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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지하철의 밝은 신호음은 빛바랜 추억이나 환각 또는 순수한 상상 속 일화 같았다. 번역을 하면서 알맞은 단어를 부단히 찾을 때만 현실감이 흐려지지 않고 온전했다. 오로지 그때만 모든것이 괜찮았고 완벽한 현재였다. - P10

이제까지 중요한 것은 언어였다. 모든 것은 이름이 불리고 이야기된후에야 실제로 존재했다.레이랜드가 찾아 나선 게 아니라 그게그에게 와서 부딪쳤다. 처음부터 그랬다. 언어 없이 사물에 도달하기를, 사물과 사람과 감정과 꿈에 닿기를 원할 때도 자주 있었지만 언제나 그 사이에 언어가 다시 끼어들었다. 언어로 이해해야제대로 경험할 수 있다고 말할 때면 사람들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곤 했다. 리비아와의 경우에만 언어가 필요하지 않았다. - P21

세월이 지난 후에 아내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일 때 집중하는 방식은 그를 사로잡고 불길에 휩싸이게 했다. 20년이 지나도마찬가지였다. 트리에스테 집에서 둘은 계단 제일 위쪽 층계에 앉아 단어와 그 의미에 대해서, 그리고 그걸 독일어와 영어, 이탈리아어와 프랑스어, 가끔은 트리에스테 사투리로 어떻게 번역해야하는지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워런 숀의 침실에서 왔다갔다 걸으며 톰 커트니의 문장을 허공에 대고 말하는 지금도 그는 그때계단에서처럼 자신의 언어를 나눔으로써 삶을 함께하던 리비아 - P23

온갖 단어와 책을 향한 시위였을까? 구체적인 일과 구체적인고통, 피와 상처가 충분히 언급되지 않는 세상을 향한 시위? 그렇게 나갈 때면 딸은 집 뒤쪽의 높다란 삼나무에 여러 번 오르락내리락했는데, 마치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하려는 것 같았다. 단어에헌신하는 것 말고 다른 삶도 있다고. 지극히 생생하고 강력한 삶, 근육과 행동하는 손과 송진 냄새가 있는 삶, 얼굴에 바람이 불어오고 무릎이 생채기투성이인 삶, - P31

언어적 상징만 정신의신비인 게 아니라, 어떤 장면과 감정을 수십 년 이상 유지하는 능력 또한 못지않은 수수께끼였다. 마늘과 세제 냄새가 기억났다. - P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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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사춘기에 접어든 그녀는 모든 사람이 엄마와아빠 중 한 명을 선택해야만 하는 상황에 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알 만큼은 영리해졌다. 오랜 시간이 흐른 후 그녀는 어쩌면 미국에 갈 때마다 자신이 원했던 것은 엄마의 불행한 모습을 보는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엄마가 사라지고 난 이후 그녀에게 생긴 커다란 구멍처럼 엄마에게도 메워지지 않는 구멍이 생겼음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그녀는 엄마가 한순간 잘못된선택을 했지만 실은 그녀를 떠난 것을 후회하고 있기를 바랐다. 그렇지만 어느 순간, 엄마 역시 선택을 했다는 것이, 그 선택의 순간에 그녀는 우선순위에서 밀렸다는 것이, 세상의 모든 엄마들과달리 엄마는 자식보다 자신을 더 사랑한다는 것이 그녀에게 명확해졌다. 그녀는 열네 살의 여름방학을 끝으로 더이상 미국에 가지않기로 결심했다. - P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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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데우는 기차를 좋아했어요. 기차는 그에게 삶의 상징이었어요. 난 같은 칸에 함께 타고 싶었지만, 그가 원치 않았어요. 아마데우는 내가 플랫폼에 있기를, 그래서 창문을 열면 내가 언제든지 자기가 묻는 말에 대답해주길 원했어요. 그리고 그는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하면 플랫폼도 함께 떠나길 바랐어요. - P460

그레고리우스가 창세기를 읽었다. 문두스인 그가 폐허가 된 포르투갈의 한 중등학교에서 어제까지만 해도 알지 못하던, 그리고 헤브라이어를 한마디도 하지 못하는 여든 살짜리 노파 앞에서 창세기를 읽는다………. 그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했던 일들 가운데 가장 이상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 순간을 즐겼다. 예전에 한 번도 느끼지 못한 기쁨이었다. 곧 다가올 종말을 예감하고, 단 한 번만 거침없이 세차게 쳐부수기 위해 마음속으로 모든 사슬을 끊어버리는 성서 속의 사내가 된 듯한 느낌이었다. - P462

그 단어는 떠오르지 않았다. 떠오르지 않았다.
그 단어가 있기는 한 건가? 예리하게 틈이 벌어진 것은 기억이아니라 이성이었나? 단 하나의 단어, 단 한 번 나오는 단어를 잊었다고 해서 어떻게 거의 이성을 잃을 수 있을까? 단어를 잊은 것이강의실에서 시험지 앞에 앉아 있는 상황이라면 고통스러울 수도있겠지만, 사납게 울부짖는 바다를 마주하고서도 저기 앞에서 밤하늘로 스며드는 검은 바다는 이런 불안을 완전히 무의미한 것으로, 쓸데없는 것으로, 균형 감각을 모두 잃어버린 사람이나 신경 쓰는 것으로 쓸어가야 마땅하지 않은가? 기 - P510

사람의 정체성은 언제 유지되는가. 늘 그래왔던 그 모습일 때? 스스로를 바라보았을 때처럼? 아니면 들끓는 생각과 감정의 용암이 온갖 거짓과 가면과 자기기만을 묻어버릴 때? 달라졌다고 불평을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스스로가 아닌 다른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사실 이 말은, 어떤 사람이 이제 더이상 우리가 원하는 그 모습이 아니라는 뜻인가? 그러니까 타인의 안녕에 대한 걱정과 염려라는 가면을 썼을 뿐, 결국 익숙한 것이 흔들릴까봐 대항하는 투쟁문구의 일종인가? - P537

베른에 도착하고 싶지 않았다. 독시아데스가 수화기를 들고 병원에 예약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않았다. 제네바까지는 아직 스물네 개의 역이 남아 있었다. 스스로내릴 수 있는 기회도 스물네 번이었다. - P5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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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강장 대기실에서는 포르투갈어만 들려왔다. ‘포르투게스라는단어가 들렸다. 이제 이 단어는 그에게 공포처럼 들렸지만, 무엇을향한 공포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는 랭 골목의 자기 침대에서 자고 싶었고, 분데스테라세와 키르헨펠트 다리를 걷기 원했으며, ‘절대 탈격‘과 『일리아스』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가 잘 아는 부벤베르크 광장에 서 있고 싶었다. 집에 돌아가고 싶었다. - P299

스스로를 다시 발견하기 위해 불러오려던 친숙한 사물들이 이제 그 스스로를 잃게 만든다는공포, 여기서도 아침 여명이 트는 리스본에서와 똑같은 일을 겪는다는 공포가 몰려왔다. 그러나 리스본 뒤에는 베른이 있었지만, 잃어버린 베른 뒤에는 더 이상 다른 베른이 없었으므로 지금 느끼는공포는 더 불안했고 무척이나 위험했다. 그는 단단하면서도 뒤로물러나는 듯한 바닥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다가, 지나가던 사람과부딪혔다. - P306

"난 가끔 오빠의 영혼이 다른 그 무엇보다도 언어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했어요."

"오빠는 누군가 지나가다, 흘러가다, 흘러가 없어지다 등과 관련이 있는 단어를 말할 때마다 깜짝 놀랐어요. 지금 특히 기억나는단어는 ‘코헤르(correr: 흐르다)‘와 ‘파사르(passar: 지나가다)‘예요. 꼭 그단어들이 아니더라도 오빠는 말에 격렬하게 반응했어요. 말이 사물보다 훨씬 중요하다는 듯이 이게 오빠를 이해하려는 사람이 알아야 할 가장 중요한 점이었지요. 오빠는 잘못된 단어의 독재와 올바른 단어의 자유, 유치한 말 때문에 생기는 보이지 않는 감옥과시의 광채에 대해 말하곤 했어요. 오빠는 언어에 정신을 잃은 언어강박관념을 지녔던 사람이라 잘못된 단어 하나에 칼로 찔린 것보다 더 큰 상처를 받았어요. - P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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