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지하철의 밝은 신호음은 빛바랜 추억이나 환각 또는 순수한 상상 속 일화 같았다. 번역을 하면서 알맞은 단어를 부단히 찾을 때만 현실감이 흐려지지 않고 온전했다. 오로지 그때만 모든것이 괜찮았고 완벽한 현재였다. - P10
이제까지 중요한 것은 언어였다. 모든 것은 이름이 불리고 이야기된후에야 실제로 존재했다.레이랜드가 찾아 나선 게 아니라 그게그에게 와서 부딪쳤다. 처음부터 그랬다. 언어 없이 사물에 도달하기를, 사물과 사람과 감정과 꿈에 닿기를 원할 때도 자주 있었지만 언제나 그 사이에 언어가 다시 끼어들었다. 언어로 이해해야제대로 경험할 수 있다고 말할 때면 사람들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곤 했다. 리비아와의 경우에만 언어가 필요하지 않았다. - P21
세월이 지난 후에 아내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일 때 집중하는 방식은 그를 사로잡고 불길에 휩싸이게 했다. 20년이 지나도마찬가지였다. 트리에스테 집에서 둘은 계단 제일 위쪽 층계에 앉아 단어와 그 의미에 대해서, 그리고 그걸 독일어와 영어, 이탈리아어와 프랑스어, 가끔은 트리에스테 사투리로 어떻게 번역해야하는지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워런 숀의 침실에서 왔다갔다 걸으며 톰 커트니의 문장을 허공에 대고 말하는 지금도 그는 그때계단에서처럼 자신의 언어를 나눔으로써 삶을 함께하던 리비아 - P23
온갖 단어와 책을 향한 시위였을까? 구체적인 일과 구체적인고통, 피와 상처가 충분히 언급되지 않는 세상을 향한 시위? 그렇게 나갈 때면 딸은 집 뒤쪽의 높다란 삼나무에 여러 번 오르락내리락했는데, 마치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하려는 것 같았다. 단어에헌신하는 것 말고 다른 삶도 있다고. 지극히 생생하고 강력한 삶, 근육과 행동하는 손과 송진 냄새가 있는 삶, 얼굴에 바람이 불어오고 무릎이 생채기투성이인 삶, - P31
언어적 상징만 정신의신비인 게 아니라, 어떤 장면과 감정을 수십 년 이상 유지하는 능력 또한 못지않은 수수께끼였다. 마늘과 세제 냄새가 기억났다. - P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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