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 연주회는 하나의 연극이다. 객석 불빛이 어두워지고, 조명이 약 3미터 길이의 피아노를 환히 밝힌다. 정적이 찾아온다. 수천명의 관객이 거장으로 여기는 사람이 비밀에 싸인 깜깜한 윙에서 성큼성큼 걸어 나와 자리에 앉는다. 잠시 침묵이 흐르다 소리가 공간을채운다. 나는 아직도 이 연속적인 장면이 짜릿하다. 각 순서의 타이밍은 무용수가 도약하고 배우가 대사를 치는 타이밍과 비슷하다. 이드라마는 인간이 불가에 둘러앉아 서로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던 선사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 P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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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 못 이루며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의 세월, 빅토르 위고의만년필과 양철 기관차를 보러 다녔던 수년 동안 아버지와 공유했던 그 작은 세계와 친밀함을 추억했다. 나는 그것들을 평화와슬픔의 시절로, 소멸되어가던 세계로 기억했고, 그 세계는 아버지가 나를 ‘잊힌 책들의 묘지‘로 데려갔던 그날 새벽 이후 사라져가고 있었다. - P79

내가 아주 우연히 저무한한 묘지에 묻힌 이름 모를 한 권의 책에서 온 우주를 발견했다면, 수만 권의 다른 책은 알려지지 않고 영원히 잊혀진 채 남게 될 거라는 생각을 피할 수 없었다. 나는 버려진 수백만의 페이지들, 주인 없는 영혼들과 세계들에 둘러싸인 것 같았다. 도서관 바깥의 약동하는 세상이 잊으면 잊을수록 현명해진다는으로 날마다 부지불식간에 기억을 잃어가는 동안 그것들은 어두운 대양에 가라앉고 있었다. - P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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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가 우리에게 이 세상을 본래 의미 있는 곳으로, 여기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언제나 더 큰 목적에 부합하는 일들로바라보기를 권하는 것처럼, 작가들은 모든 세부사항이 결국 의미 있는 무언가가 되게 만들고, 그 일을 통해 일관성 있는 세계를 발명함으로써 이야기 속에서 그런 목적을 창조해낸다. 대학원생이면서 동시에 소설을 쓰고 있던 나는 이 부분을 읽고 자신을 격려해주었다. 봐, 난 그냥 논문을 미루고 있었던 게 아니었어. 나는 일관성 있는 세계를 발명해내고 있었던 거라고!
하지만 무엇이 문제인지는 제법 빠르게 알 수 있었다. 종교가 세상에 일관성을 부과한다는 이 견해는 내가 가장 잘 아는 종교에는 전혀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커모드의 주장은 서양의 종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결말"이라는 생각에 기초해 있다. 그가 말하듯 "성경은 역사의 친숙한 모델이다. 그것은 처음에 ‘태초에‘라는 말로 시작하고, 마지막에는 종말을 보여주는 환영과 함께 ‘그럼에도 오소서, 주 예수여‘라는말로 끝난다."
말할 필요도 없지만, 히브리어 성경은 이런 방식으로 끝나지 않는다. - P132

이디시어와 히브리어 현대문학을 공부하고 있던 나는 이런 유대 언어들로 된 주요 작품들에는 구원받는 인물이나 깨달음을 얻는 일, 혹은 은혜로운 순간의 경험이 거의 나오지 않는다는 점을 깨닫기 시작했다. 사실이 분야 문학의 토대가 되는작품들을 읽어나갈수록 나는 이디시어와 히브리어 현대문학가운데 고전으로 여겨지는 단편소설과 장편소설 다수에 결말이라 할 만한 것이 전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 P134

그 시대로부터 멀어진 사람들이 잘못된 질문들을, 난파 사고나 전염병에 관해 할 법한 질문들을 하게끔 강요한다. 이런 사고방식은 누군가는 죽어야 하며, 누가 구명보트의마지막 자리나 마지막 백신을 차지할지가 유일하게 남은 딜레마라는 생각이다. 하지만 이런 질문들은 제대로 된 것이 아니다. 가해자들이 그 죽음과는 관계가 없었다고 가정하기 때문이다. 이루어진 선택들을 문제 삼는다면, 우리는 홀로코스트가 아예 일어나지 않았을 가능성도 고려해야 하지 않나? 누군가가 A라는 사람을 구할지 B라는 사람을 구할지 선택하는 위치에 있었다면, 전 세계 사회는 집단 학살이라는 개념을 완전히 거부하는 위치에 있어야 했던 것 아닌가? 왜 모두가 덴마크처럼 행동하지 않았는가?" - P221

구조자들과 구조된 사람들의 경험 사이에 존재하는 엄청난 차이는 이런 수치스러움을 더해줄 뿐이다. 구조된 사람들에게 그 시기는 인생에서 최악의 시기이자 자기 삶에 가장 의미가 없었던 시기였다. 반면 구조자들에게 그 시기는 인생에서최고의 시기이자 자기 삶의 의미가 가장 컸던 시기였다. - P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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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 문화유산지구‘라는, 대체로 유대인들이 살지 않는지역에서 인기 있는 관광산업 콘셉트가 있다. 이 용어는 참으로 기발한 마케팅 작품이다. ‘유대인 문화유산‘은 전적으로 무해하게 들리고, 아마도 유대인들에게는 아주 조금 의무적으로들릴, 꼭 가봐야 하는 장소(아무튼 여기까지 왔는데 어떻게 안 가본단 말인가?)를 추천할 때 쓰이는 구절이다. ‘사망하거나 추방된 유대인들로부터 압수한 재산보다는 훨씬 나은 이름이다. 이런 장소들을 ‘유대인 문화유산지구‘라고 부르면 그 모든 성가신 도덕적 걱정거리 - 예를 들어 이런 ‘지구‘들이 애초에 왜 존재하는지 같은-는 선의의 안개 속에 증발한다. - P56

들어선 순간부터 스멀스멀 올라오는 ‘유대인 문화유산‘의 불편함을, 말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그 모든이른바 ‘선의‘에도 불구하고 무언가가 분명히 잘못됐다는 감각을 느꼈다. 하지만 그 순간 나의 유대인으로서의 진짜 문화유산이, 수세기 동안 쌓인 후성적 본능으로 이루어진, 나는 그저손님일 뿐이라고 일깨워주는 그 감각이 치고 들어왔다. 나는불편함을 삼키고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 P69

첫 번째 아이가 말했다. "히틀러는 너희 눈이 전부 검은색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당시 내가 이 말에 무엇을 느꼈을지 지금은 여러 가지로상상이 가능하지만 그 순간에는 그저 당혹스러울 뿐이었다. 나는 그 주 내내 두들겼던 퀴즈볼 버저 위에 올라간 내 손을 상상하고는 정답을 말했다. "히틀러가 한 말은 다 개소리야."
(중 략)
그날 밤 호텔 공중전화로 어머니와 통화하다가 불쑥 내뱉었다. "이해가 안 돼요. 전국 대회에 나온 애들이에요. 똑똑한애들이라고요! 그런데 히틀러한테서 정보를 얻고 있다뇨?" - P14

바보 취급을 당하면서 지속적인 긴장과 비틀린 자책으로 가득한 끔찍한 정신적 경험 속으로 슬로모션처럼 천천히 떨어져 내려가고 있었다. 그들은 타협과 순응이라는 오랫동안 지속되는 게임 속으로 이끌려 들어가면서 ‘살아도 된다는 허락‘이라는 가장 큰 상을 타내기 위해 아주 조금씩자신을 포기했다.
스포일러 주의: 그들은 그 게임에서 졌다. - P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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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먼은초판본을 소장했고 반어법을 이해했다. - P26

여기, 깊은 숲속은 언제나 고요했다. 헬렌이 음악을 틀 때만 빼고는하지만 자동차 대리점 광고, 교통 정보 안내, 독설을 쏟아내는 DJ들이 판치던 엄마의 라디오와 달리, 오페라는 거슬리지 않았다. 오히려아주 시끄러운 형태의 고요 같았다.
플로렌스에게는 헬렌과 오페라의 관계가 매혹적으로 여겨졌다. 어떻게 인구 3,200명(검색해서 알았다)의 미시시피주 하인스빌에서 태어난 헬렌이 베르디 작품의 가사를 외우고, 프랑스어로 토마토가 뭔지알고 있을까? - P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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