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미래나 이런저런 것에 마음을 쓰지 않았다. 미래가 없는 것처럼 혹은 이미 미래가 쓰인 텍스트를 읽어버린 것처럼 말이다. 삶이무엇을 제시할지, 미래의 목표나 야망,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나 질문조차 전혀 알고 싶은 눈치가 아니었다. 인생이 이미 결정된 사람, 포로가 되어 탈출구가 사라진 사람, 그래서 주어진나날을 무심하게 바라보는 사람, 예컨대 엄청 즐겁고 놀라운 일은 절대 자기에겐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과 함께살고 있는 느낌이었다. 어떤 의미에선 글자 그대로, 밤이 가고아침이 밝아오는 것을 바라기보다는 낮이 끝나고 저녁이 오는것을 기다리는 늙은이의 모습 같았다. - P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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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에서, 뭔가 결정을 하고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사람은3인칭 화자이지. 그렇지만 그에게는 질문을 던질 수도 말을 걸수는 없어. 이름도 없을 뿐만 아니라 특정 인물도 아니지. 1인칭 서술자와는 달리 말이야. 그래서 우리는 그를 믿고 의심하지도 않아. 그가 어떻게 그것을 알고 있는지도 따지지도 않고, 왜 생략하고 입을 다무는지도 그냥 지나치지. 한마디로 왜 그에게 모든 것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이 부여되었는지따지지 않을뿐더러, 절대 미심쩍은 듯한 눈길을 보내지 않지. 여기에서도 분명히 ‘그‘가 있긴 한데 존재하진 않아. 반대로 분명히 존재하긴 하는데 눈에 띄진 않는다는 거야. - P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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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계속 앞으로 나아가며 우리 몸뿐만 아니라 의식에 작용한다. 시간은 우리가 숙면하는지, 아니면 눈을 부릅뜬 채 경계하고 있는지 전혀 개의치 않는다. 잠을 자지 않고 돌아다니는지, 야간 경비에 나선 ‘보충병‘이라 불리는 신병처럼의지와는 상관없이 저절로 감기는 눈꺼풀을 억지로 부릅뜨고있는지 전혀 개의치 않는다. - P11

베르타는 토마스와 마찬가지로 자기가 어떤 부류의 인간인지, 어떤 부류의 여자인지, 그리고 미래엔 어떤 부류의 여자가될 것인지 어렸을 적부터 잘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최소한 자기 인생에서는 자신의 역할이 조연이 아니라 주연이라는 사실을 추호도 의심해 본적이 없었다. 하긴 아무리 모든 사람의 인생이 유일한 것이라고 해도 자기 인생은 다른 사람이 거론할만한 가치가 없다는 사실을, 혹은 기껏해야 주목받을 만한 파란만장한 삶을 영위한 다른 사람을 이야기할 때 살짝 곁가지로언급될 만큼의 가치밖엔 없다는 사실을 태어나면서부터 잘 알고 있어서 자기 인생에서조차 조연으로 보일까봐 두려워하는 사람도 있다. 저녁식사 이후 이어진, 혹은 잠을 이루지 못해 벽난로 옆에서 벌이는 심심풀이 잡담거리조차 되지 않을까봐 말이다. - P27

영어와 스페인어의 억양, 동사 변화, 문법, 악센트 등을 완벽하게 정복한 상태였다. 그뿐만 아니라, 프랑스어 역시거의 결점을 찾지 못할 정도로 완벽하게 구사했고 이탈리아어실력도 믿을 만했다. 옥스퍼드에 들어와 프랑스어와 이탈리아어 실력은 비약적으로 발전을 이뤘다. 1971년 20살 나이로 대학 3학년이 되었을 땐 슬라브어에도 도전해보라는 설득에 넘어갔고, 덕분에 러시아어 역시 능숙하게 다루게 되었다. 더 나아가 폴란드어와 체코어 그리고 세르비아-크로아티아어까지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정도의 수준에 이르렀다. - P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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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 액체가 잔 속에서 천천히 맴돌았다. 향이풍부하고 기름진, 만족으로 이끄는 이 열쇠. 그녀는단숨에 삼켰다. 배 속이 데워지며 술기운이 서서히 몸에 퍼졌다. 떨리는 손이 가라앉았고, 알 수 없는 힘이그녀를 가득 채웠다. 따뜻하고, 편안했다. 세상 하나뿐인 연인. 그녀는 손을 뻗어 잔 가득 술을 따랐다. - P191

주디스는 감실을 바라보며 일어섰다. 그리고의자 사이를 빠져나왔다. 무릎은 끓지 않았다. 그녀는 제단을 외면한 채 천천히 성당 밖으로 걸어 나왔다. 그리고 오랫동안 익숙해진 습관대로 성수반에 다가가손가락 두 개를 담갔다. 하지만 성호는 긋지 않았다.
계시를 보여 주세요. 그녀가 말했다. - P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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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그 어색한 상황을 무마하려 공허한 얘기를 떠들어 대면, 매든 씨는정중히 경청하다가 그녀의 눈동자에 비친 히스테리와그녀의 뺨 위에서 뜨겁게 번져 가는 그 지긋지긋한 홍조를 보게 될 터였다. 그러면 매든 씨도 이곳을 떠날터였다. 그보다 먼저 그녀를 두고 빠져나갔던 그 모든남자들처럼.
그래서 그녀는 기다렸다. 그녀는 식탁 가장자리를 두 손으로 꾹 누르고 있었다. 조금 지나자 얼굴이 점점 달아올랐고, 지긋지긋한 홍조와 타는 듯한 감정이 목을 타고 올라오는 듯했다. - P48

하지만 이방인이나 다름없는 사람한테 이렇게사적인 얘기를 털어놓다니 좀 의아하긴 해. 마치 소설같잖아. 잘 모르는 사람끼리 만나 공감대를 이루다가연애나 사랑의 불꽃이 팍 튀는 그런 이야기 말이야. 비록 어리석은 상상일 뿐이라는 걸 그녀 자신도 알고 있었지만, 주디스는 다시금 공상에 빠져들고 말았다. - P108

그 말은 그녀의 오래된 실수였고, 오래된 자랑이었으며, 동정심을 막는 방패였다. 이 특별한 날에아무도 당신을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말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방패. 그리고 오래된 실수. 이제 이 남자는 가 버리겠지. - P129

남자들은 늘 이런 식이야. 그녀는 생각했다. 다들 나랑단둘이 있는 게 싫은가 봐. 마치 도망치려는 것처럼. 무슨 소리야, 숀은 그냥 애잖아. 쟤 아기 때 네가 작은털 양말 떠 준 거 잊었니. 하지만 숀은 남자야. 다른 모든 남자와 마찬가지로 남자야. 그리고 지금 나를 떼어 내고 싶어 하고. 남자들은 주변에 붙잡고 싶은 여자가 없으면 어디로든 달아나서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려 들잖아. 다들 그래. 두려워해. 나랑 짝이 될까두려워하지. - P151

버스는 빙빙 돌아 마지막 정류장에 이르렀다. 외로운밤, 외로운 방에. - P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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