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을 둘러싸고있던 정체불명의 ‘당연함‘은, 그것이 그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확실하게 알려주는 ‘명료함‘으로 바뀌어야 했다. 전체적인 윤곽을 지린 그 무엇인가로 응집되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의 인생에 다른그 어떤 것보다도 더 많은 영향을 주었던 학생들의 목록처럼 이제막 역을 출발하는 기차가 뒤에 남겨놓은 것은, 그레고리우스 자신의 한 부분이었다. 그는 자기가 지금 약한 지진 때문에 떨어져 나- 빙산 조각 위에 서서, 차고 넓은 바다 위를 부유하는 중이라고각했다. - P47

그레고리우스는 이 일을 그 후에도 잊을 수 없었다. 이 문장은그가 현실 세계에서 입 밖에 낸 첫 번째 포르투갈어였고, 실제로효력이 있었다. 그는 말이 어떻게 사람들을 움직이게 하거나 멈추게하는지, 어떻게 울거나 웃게 할 수 있는지 어릴 때부터 늘 궁금했다. 이런 의문은 어른이 된 뒤에도 쉽게 풀리지 않았다. 말이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을까? 마치 요술 같지 않은가? 그러나 지금 이 순간, 말의 위력에 대한 신기함은 다른 그 어느 때보다도 컸다. 어제아침까지만 해도 그가 전혀 모르던 언어가 아니었던가. 몇 분 후 이룬의 플랫폼에 발을 내딛을 때 그의 불안감은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 P61

그것은 불가능했다. 더 이상 안 될 일이었다.
그러면 무엇 때문인가 새어버리는 시간과 죽음에 대한 생각? 원하는게 무엇인지 갑자기 모른다는 것? 자기 소망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는 것? 자기 의지가 지녔던 지극히 당연한 익숙함을 잃은 것? 그래서 이런 식으로 스스로에게 낯설어지고 문제가 되었다는 사실? - P101

베른에 있는 집의 열쇠를 만져보았다. 심한 허기를 느끼듯 갑자기 그리스어나 헤브라이어를 읽고 싶다는 강렬한 욕구가 일었다. 알게 된 지 40년이 지난 후에도 동양적이고 동화 같은 우아함을 잃지 않은, 낯설고도 아름다운 철자를 보고 싶은 욕망, 이 글자들이말하려는 바를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혼란스러운 지난 엿새 동안잃어버리지 않았음을 확인하고픈 욕구………
코우팅뉴 노인이 준 그리스-포르투갈어 신약성서가 호텔에 있었다. 그러나 호텔은 너무 멀었다. 문이 열리기도 전에 그를 삼킬 것같은 파란 집을 지척에 둔 이곳에서, 바로 지금 이 순간 읽고 싶었다. 그는 급히 계산을 하고 바를 나와 그런 책이 있을 만한 책방을 찾았다. 그러나 오늘은 일요일이었다. 그가 유일하게 찾은 곳은그리스어와 헤브라이어로 된 제목의 책들이 진열창에 전시된 교회 책방이었다. 문은 닫혀 있었다. 그레고리우스는 안개에 축축하게 젖은 진열창에 이마를 대고, 곧장 공항으로 달려 취리히로 가는 다음 비행기를 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이 급박한 욕망은 불타는 듯하다가 떨어지는 열처럼 다행스럽게도 조금씩 사그라졌다. 그는 이 감정이 완전히 사라지도록 인내심을 갖고 기다렸다. 그러고는 파란 집 근처에 있는 바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 P128

사람들이 하는 말은믿을 만하지 못하다는 것을 아주 확실하게 이렇게 확실하게 아는건 인생에서 몇 개 안 될 정도로ㅡ안다고 했다. 그냥 말하기 위해말을 할 뿐이라고…………. 사람들은 택시에서만 이러는 게 아니라고, 사람들이 하는 말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려는 시도는 언어학자, 특히 움직일 수 없이 확실한 단어-수천 가지 주석이 달린-를 하루 종일 다루는 고전문헌학자들에게나 드는 생각이라고 했다.
사람들이 하는 말을 믿을 수 없다면, 그럼 말로는 도대체 뭘 해야 하느냐고 그레고리우스가 물었다. 독시아데스는 껄껄 웃었다.
"스스로 말을 하는 계기로 삼아야지요! 그래서 말이 계속 이어지도록." - P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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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욕을 자학으로, 울분을 망상으로 바꿔치기하며 현실을 받아들이는것이 이 남자가 세상을 사는 방식인 것이다. 모노이는 그렇게 생각해보았다. 사회와 조직과 인간의 일거수일투족이 곧 등을 떠미는 힘이 되고, 자학과 망상의 쾌감이 곧 일용한 양식이 된다는 것은 그 자체로도충분히 뒤틀려 있다. 요컨대 이 남자의 악귀는 그런 식으로 드러나고있는 것이다. 자신의 격정적인 악귀와는 상당히 다르지만, 한다에게도분명 악귀가 있다. - P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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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타노라는 사람에 대한 한다의 첫인상은 한마디로 표본상자 속 나비였다. 겉모습은 완벽하지만 그저 정물일 뿐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부서져버리는. 실제로도 곱게 자란 양갓집 도련님이 그대로 중년이 된 것같은 무심함, 지능지수만으로 이뤄진 듯한 무기질적 분위기, 상당히잡한 사고회로를 짐작게 하는 우울 등이 뒤섞인 외모는 다분히 차가워보였고, 묘하게 풍기는 공허함도 아들을 잃은 탓만은 아닌 듯했다. 눈동자의 움직임에서 심상치 않은 불안감도 조금 엿보였다. - P125

내일부터 계속 이런 식이려나.
주택가의 흐릿한 하늘을 올려다본 순간, 오랜 습관처럼 또 한 자락의 새로운 몽상이 한다의 가슴으로 미끄러져들어왔다. 어느 날 사직서라고 쓴 봉투를 상사의 책상에 내던진다는 유치한 몽상은 대단한 쾌감도 주지 못하고 금세 맥없이 사그라졌다. 지금의 한다는 사직서가 일대사건이 될 만한 조건을 하나도 갖추지 못했다. 사직서를 집어든 상사가깜짝 놀라고, 온 서내가 들썩거리고, 본청이 경악해서 어떻게든 철회시키라며 낯이 새파래질 이유는 아무것도 없다. 이 몸의 퇴직을 두려워하는 자, 아쉬워하는 자가 어디 있으랴. - P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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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손쓸 수 없는 까마득한 시공에서 기이할 정도로 새파랗게 젊은내가 지금의 나로서는 결코 원한 적 없는 방식으로, 원하기는커녕가장 두려워해 마지않는 방식으로 살았다는 사실이, 내게는 부인할 수도 없지만 믿을 수도 없는 일처럼 느껴졌다. 이런 게 놀랍지않다면 무엇이 놀라울까. 시간이 내 삶에서 나를 이토록 타인처럼, 무력한 관객처럼 만든다는 게. - P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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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워하지는 않고, 관심을 안 가지려고 할 뿐이야. 병석씨도 나한테 관심이 없었으면 좋겠고. 아니, 병석씨만이 아니라 아무도나한테 관심이 없었으면 좋겠어. 난 세상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않아. 눈에 안 띄고 싶어.
나도? 채운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니. 반희가 말했다. 채운씨만 빼고. 그러니까 내가 채운씨는만나잖아.
그래서 외갓집에도 안 가는 거야?
외가가 아니라 내 본가.
알았어. 엄마 본가.
나를 지키고 싶어서 그래. 관심도 간섭도 다 폭력 같아. 모욕 같고. 그런 것들에 노출되지 않고 안전하게, 고요하게 사는 게 내 목표야. 마지막 자존심이고, 죽기 전까지 그렇게 살고 싶어. - P75

엄마, 나 사랑하지?
반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알아. 엄마 보면 날 사랑하는 거 맞아. 날 사랑해서 힘든 게 보여. 나도 엄마 사랑해. 그래서 힘들어. 근데 엄마, 내가 머리가 나빠서 잘 모르는 거야? 사랑하는 게 왜 좋고 기쁘지가 않아? 사랑해서 얻는 게 왜 이런 악몽이야? 사랑하지 않으면 이렇게 안 힘들어도 되는데, 미워하면 되는데, 왜 우린 사랑을 하고 있어? 왜 이 - P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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