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게르마늄의 밤
하나무라 만게츠 지음, 양억관 옮김 / 씨엔씨미디어 / 1999년 4월
평점 :
절판


<게르마늄의 밤>은 선정적이고 폭력적인 묘사로 가득차 있습니다. 주인공에게 동정을 허락하는 수녀, 원생에게 오랄섹스를 강요하는 수도원장, 얼굴에 가래침을 맞으며 자위하는 원생 등 도무지 정상이라고 할 수 없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몇몇 장면은 구역질이 치밀어 오를 만큼 역겹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이 작품에는 독특한 매력이 있습니다. 단순히 말초신경만 자극하는 포르노하고는 조금 다릅니다. 읽기 시작하면 쉽게 놓을 수 없게 만듭니다. 이런 강력한 흡입력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요?

<게르마늄의 밤>에서는 놀랍게도 변태에서 종교를 찾습니다. 즉, 정상이 아닌 섹스와 신성한 종교를 천연덕스럽게 비유하고 있습니다. 작가는 사디즘과 메조히즘을 신과 인간의 관계를 만들어주는 기본원리와 같다고 말합니다.

신에 대한 자발적이며 무조건적인 복종에서 종교가 시작되듯 메조히즘도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메조키스트란 내가 좋아서 상대방에게 무조건적으로 내 몸을 맡기는 사랍들이니까요. 자발적이고 무조건적인 복종을 즐기는 신이란 어찌보면 사디스트와 같다는 거죠.

또한 벨트나 스타킹, 여자의 속옷, 손톱 등 특정한 물건이나 신체의 일부를 통해 성적 흥분을 느끼는 소위, 페티시즘에 대해서도 한마디 합니다. '자신 이외의 누군가를 미치도록 갈구하면서 그 관계성의 상징이 될 수 있는 물질을 자신의 것으로 삼으려 한다.' 이건 페티시즘에 대한 정확한 해석입니다. 그럴까요? 허나 작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자신 이외의 누군가를 미친듯이 갈구한다는 것은 어딘지 모르게 종교적인 기도와 닮았다.' 이런...

변태심리와 종교를 동일선상에서 놓고 태연하게 주절대는 작가의 기지가 놀랍기도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대단히 악마적인 수법이란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이 작품이 더 재미있는건지도 모르겠습니다. 하긴 신께 기도하는 성처녀상(像)의 표정은 놀랍도록 포르노 여배우의 절정의 표정 - 물론 연기겠지만 - 과 닮았으니까요. 소름끼치는 논리입니다.

작가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갑니다. 신의 존재에 대한 맹랑한(?) 결론을 냅니다. 한마디로 신은 '모호하기 때문에 위대하다'는 것입니다. 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없지만 반대로 신의 부재도 증명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일단 신이란 말을 사용하기만 하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쉽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걸 신의 탓으로 돌릴 수도 있습니다. 말이란 본래 현실을 해석하는 도구지만 현실 그 자체와 종종 헷갈리기도 합니다. 그래서 언어는 강력하고, 언어 속에 숨어있는 신도 강력한 것입니다. 결국 신은 순수언어이자 말씀, 로고스인 것입니다.

하지만 신은 아무래도 좋을 때만 신이고 정작 애타게 찾을 때는 없습니다. 이렇게 모호하기만한 신이 미워 주인공은 말 한마디 않고 거친 폭력을 휘두릅니다. 섹스 속에서 존재감을 찾습니다. 그리고 번뇌를 탐합니다.

신이 정말 존재한다면 의도적으로 죄를 짓고 돌아다니는 내게 제발 벌을 내려달라는 주인공의 고해성사는 신을 찾기 위해 온갖 고행을 선택하는 수도자의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요컨데,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섹스와 폭력에서 현존하는 신의 의미를 되새기고 있습니다.

내가 싫어한다고 다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게르마늄의 밤'에는 내가 싫어하는 주먹질, 썩은 시체의 냄새, 동성애, 항문성교, 돼지의 교미, 피범벅인 얼굴, 발가락 냄새, 가래침, 이중인격자, 변태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하지만 그 속에는 인정하기 싫지만 솔직한 내 모습이 담겨 있었습니다. 작가는 마지막 한마디 말로 내 마음을 후비고 떠납니다. 악마적인 웃음을 지으면서 말이죠.

'나는 소설을 통해 나의 독자를 건강하게 만들고 싶지 않다. 오히려 우울하게 만들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내가 신이다
프랑코 페루치 지음 / 문학동네 / 1998년 5월
평점 :
품절


하나. 인간은 신도 믿지 못하는 신을 믿는다

'과연 신은 있는걸까? 있다면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사실 종교의 역사는 인간의 역사와 괘를 같이 합니다. 종교의 역사가 바로 두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로마에 있는 장엄한 베드로 성당에 모셔져 있는 예수 그리스도 상에서부터 우리네 마을 어귀에 있던 투박한 천하대장군까지 모두 위 질문에 대한 나름대로의 답이라 할 수 있죠.

하지만 몇 세대에 걸친 숱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신은 여간해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습니다. 단지 신을 만났다고 하는 극소수 사람들의 개인적인 체험을 제외하곤 말이죠. 그래서 다시 한번 신에 대해 의심하게 됩니다. 혹시 신은 단지 우리가 이러이러한 신이 있으면 좋겠다고 바라는 것에 불과하지 않을까? 아님 신은 분명 있긴 하지만 우리가 믿고 있는 신과는 전혀 다를 수도 있지 않을까? 이러한 색다른 의심에서부터 이 작품은 시작하고 있습니다.

작가가 상상하는 신은 첫째, 매우 불완전합니다. 불완전성의 대표적인 예가 신도 인간처럼 성장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전지전능하지 못합니다. 인간이 만들었지만 백 퍼센트 통제하지 못하고 있는 것들이 - 예를 들면 네트워크, 자동차, 심지어 1000피스짜리 퍼즐까지 - 오히려 당연하듯 말이죠. 때로는 신도 세상을 완전히 통제하지 못하고 그저 무력하게 바라보기만 합니다. 정말 믿을 수 없는 신이죠.

둘. 신도 외롭고 인간도 외롭고

참 실망스럽죠. 그럼 인간은 누구를 믿고 이 세상을 살아야 하나요? 이러한 당연하지만 절박한 질문에 신은 이렇게 답합니다.

'나야말로 세상에 단 하나뿐인 외톨이다. 어디서부터 왔으며 어디로 가는지 난 알지 못한다. 그 대답을 찾고 싶어 나와 이야기할 수 있는 인간을 만든 것 뿐이다.'

셋. 성인이란 신을 만나서 불행해진 사람들

역사 속에서 등장하는 위대한 성인들은 모두 신과 만난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모두 진짜 신을 만나고는 실망합니다. 어떻게 신이 저 모양일까. 전지전능은 커녕 되레 우리 인간들의 도움을 절실하게 바라고 있으니... 그래서 아예 못본척 눈을 질끈 감아버리거나(세네카) 아예 신이 세상을 만들기 직전의 상태인 무로 돌아가길 애쓰거나(부처) 세상 사람들에게 신에 대한 희망의 불씨를 꺼뜨리지 않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음을 선택합니다(예수). 최후의 만찬을 준비하기 전 진짜 신을 만난 예수 그리스도의 취중진담을 한번 들어보죠.

'이걸 아십니까, 아버지? 사람들은 누군가를, 또는 무언가를 숭배해야 한다고 확신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못한다는 걸 아십니까? 저는 사람들이 저를 기억하도록 십자가에 저를 못박게 해야 합니다. 얼마든지 그것을 피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제 설교의 일부나마 구하고 싶으면 그 길을 택해야 합니다. 저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

막연한 공포와 종말의 공기가 감돌던 세기말이 아무 일 없이 지나간다면 새 천년에는 믿음이 사라질 것이라는 어느 작가의 말이 이젠 오늘의 모습이 되어 버렸습니다. 물론 여전히 실감나지 않지만 말이죠. 다시 한번 처음의 질문을 떠올립니다. '과연 신은 있는걸까? 있다면 어디에 있는걸까?'

당신은 무어라 대답하시겠습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리집에 불났어
아리엘 도르프만 지음, 한기욱 옮김 / 창비 / 1998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박하사탕'은 시원하게 말하지 못했던 20년 동안의 아픈 이야기를 차근차근하게 되집어간 괜찮은 영화였습니다. 특히 같은 시대를 겪어온 386세대들이 많은 눈물도 흘리고 좋은 영화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하지만 90학번 이후 세대에게는 별다른 감동을 주진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내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이 있겠지만 더 큰 이유는 관객들로부터 보편적인 공감을 끌어내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주인공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영화적 장치가 부족하였고 주인공 역을 맡은 설경구의 부담스런 표정연기도 관객과의 심리적인 거리를 좁히는데 도움을 주지 못하였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관객들을 먼저 슬프게 한 다음 나중에 생각하게 '박하사탕'을 만들었다면 어땠을까요? 주인공 개인의 가슴아픈 이야기를 보며 관객들이 자연스럽게 슬퍼하게 만들고 무력한 주인공의 운명은 우리의 폭력적인 현대사에서 비롯하게 되었다고 생각하게 했다면 좋았을텐데라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칠레의 작가 아리엘 도르프만의 작품집 <우리집에 불났어>는 먼저 느끼게 한 다음 나중에 생각하게 만든다는 점에서는 '박하사탕'보다 충실합니다. 아리엘 도르프만 역시 칠레의 현대사 속에서 상처를 받은 개인의 이야기를 전 작품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독자'에서는 악명높은 검열관이 무명작가의 소설 때문에 적에서 동지로 변모해가는 모습을 실감나게 그리고 있으며 '뿌따마드레'에서는 미국에 하루동안 머물게 된 해군사관생도들이 여자와 섹스를 하기 위해 결국 강간을 선택하는 과정을 통해 마초적 기질과 반공사상으로 무장된 칠레 젊은이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한 '상담'에서는 고문수위를 조절하기 위한 방법과 다이어트 방법을 고문받고 있는 의사에게 천연덕스레 묻는 중위가 등장합니다. 중요한 것은 주인공들이 '적'이냐 '동지'이냐 편가르기가 아니라 모두 역사의 파도 속에서 떠내려 갈 수 밖에 없는 어쩔 수 없는 개인들이란 점입니다.

작품 속 주인공들의 삶을 만나며 슬퍼하기도 하고 분개하기도 하면서 자연스레 칠레의 어두운 과거를 알게되고 왜 피노체트가 재판을 받아야 하는지, 힘없는 노인을 단죄해야 되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현실을 작품으로 승화시켜 칠레를 전혀 모르는 서울 한 구석에서 책을 읽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것도 문학작품만이 가진 힘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런 뜻에서 정말 슬프고 아름다운 제2의 '박하사탕'을 만나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작품의 해설에 대해 한 마디.

역자인 한기욱 씨가 '망명지에서 꽃피운 상상력의 연대'라는 제목을 붙인 해설은 아주 훌륭합니다. 칠레의 현대사와 함께 작가를 소개하고 있어 작품을 보다 선명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또한 각 작품에 대한 역자의 꼼꼼하고 명쾌한 해설도 덧붙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작품을 읽기 전에 해설을 읽는 우를 범하진 마시기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해부학자
페데리코 안다하시 지음, 유혜경 옮김 / 창작시대 / 1998년 7월
평점 :
품절


하나. 뭘 해부하자는 거야?

어떻게 보면 참으로 황당한 소재이죠. 여자의 깊은 곳 클리토리스를 발견한 해부학자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소설이라니... 어찌 보면 지극히 외설적인 느낌을 주는 작품입니다만 실제로 읽어보면 생각보다 점잖습니다. 뭔가 야한 걸 잔뜩 기대하셨다면 다른 책을 찾아 보는 게 낫습니다.

그러나 오해하진 마시길... 지극히 야하지 않다고 했지 재미없다는 말은 안 했으니까요. <해부학자>는 재미있답니다. 무엇보다도 여자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고 만질 수 있는 것을 중세를 배경으로 탁 까놓고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이 참 재미있습니다.

해부학자의 클리토리스 발견은 참 어처구니 없는 동기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성을 한방에 만족시키려는 묘약을 발견하려는 의도에서 시작되었으니까요. 그러다가 알 수 없는 병에 걸린 귀부인 이네스를 치료하다 실로 우연치 않게 그곳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여성의 기쁨과 사랑이 모두 숨겨져 있다고요. 그래서 그곳에 '비너스의 사랑'이란 이름을 붙였답니다.

둘. 참을 수 없는 정액의 무거움

그런데 때가 때인지라 중세를 지배하고 있던 종교계에서는 그의 발견이 악마에게 힘을 실어주는 발견이라고 그를 재판하기에 이릅니다. 자칫 악마 숭배로 몰려 죽기 일보 직전까지 간 해부학자의 한 마지막 변론... 참 재미있습니다.

한 마디로 그의 발견은 창조의 업적과 영광을 드러낸 신의 역사라고 강변합니다. 성경의 창조론에 입각하여 남성과 여성의 본질을 '정액'과 '비너스의 사랑'으로 해석합니다. 정액은 모든 생명의 근원으로 형이상학적인데 반해 여성은 그 정액을 받아 육체를 만드는 영혼이 없는 몸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따라서 여성에겐 나 자신이라고 주장할만한 영혼이 근본적으로 없다는 논리이지요.

이리하여 해부학자는 자신의 결백을 인정받아 화형을 면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네스에겐 다른 불행이 찾아오게 되지요. 해부학자가 병을 고쳐준 이네스는 병의 근원이 '비너스의 사랑'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된 후 그것을 과감히 도려냅니다. 그리고 '비너스의 사랑'에서 해방되어 여성의 자유로운 영혼과 주체성을 세상에 주장합니다. 결국 그녀에게 돌아온 것은 처참한 화형이었답니다.

클리토리스에 종교가 필요하고 자유가 필요하고 죽음이 요구되었다니 참 재미있죠? 또 정액은 형이상학적이고 여자는 영혼이 없다는 주장 때문에 해부학자가 죽지 않았다고 하니 여성이라면 발끈할 내용이지죠.

셋. 섹스와 권력이라는 성(性)정치학까지...

결국 이 이야기를 하는군요. 섹스는 권력, 지배하는 자와 지배당하는 자의 관계에 대한 가장 원초적인 비유라고. 클리토리스를 절개하는 행위로 대표되는 섹스에서 해방된 여자가 죽임을 당하는 건 지배자의 논리를 거부한 피지배자가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결론 아니었을까요? 그래서 작가는 이렇게 말했답니다.

'내가 만일 이 소설을 군사독재 시절에 썼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작가는 아르헨티나 출신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