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집에 불났어
아리엘 도르프만 지음, 한기욱 옮김 / 창비 / 199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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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하사탕'은 시원하게 말하지 못했던 20년 동안의 아픈 이야기를 차근차근하게 되집어간 괜찮은 영화였습니다. 특히 같은 시대를 겪어온 386세대들이 많은 눈물도 흘리고 좋은 영화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하지만 90학번 이후 세대에게는 별다른 감동을 주진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내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이 있겠지만 더 큰 이유는 관객들로부터 보편적인 공감을 끌어내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주인공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영화적 장치가 부족하였고 주인공 역을 맡은 설경구의 부담스런 표정연기도 관객과의 심리적인 거리를 좁히는데 도움을 주지 못하였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관객들을 먼저 슬프게 한 다음 나중에 생각하게 '박하사탕'을 만들었다면 어땠을까요? 주인공 개인의 가슴아픈 이야기를 보며 관객들이 자연스럽게 슬퍼하게 만들고 무력한 주인공의 운명은 우리의 폭력적인 현대사에서 비롯하게 되었다고 생각하게 했다면 좋았을텐데라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칠레의 작가 아리엘 도르프만의 작품집 <우리집에 불났어>는 먼저 느끼게 한 다음 나중에 생각하게 만든다는 점에서는 '박하사탕'보다 충실합니다. 아리엘 도르프만 역시 칠레의 현대사 속에서 상처를 받은 개인의 이야기를 전 작품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독자'에서는 악명높은 검열관이 무명작가의 소설 때문에 적에서 동지로 변모해가는 모습을 실감나게 그리고 있으며 '뿌따마드레'에서는 미국에 하루동안 머물게 된 해군사관생도들이 여자와 섹스를 하기 위해 결국 강간을 선택하는 과정을 통해 마초적 기질과 반공사상으로 무장된 칠레 젊은이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한 '상담'에서는 고문수위를 조절하기 위한 방법과 다이어트 방법을 고문받고 있는 의사에게 천연덕스레 묻는 중위가 등장합니다. 중요한 것은 주인공들이 '적'이냐 '동지'이냐 편가르기가 아니라 모두 역사의 파도 속에서 떠내려 갈 수 밖에 없는 어쩔 수 없는 개인들이란 점입니다.

작품 속 주인공들의 삶을 만나며 슬퍼하기도 하고 분개하기도 하면서 자연스레 칠레의 어두운 과거를 알게되고 왜 피노체트가 재판을 받아야 하는지, 힘없는 노인을 단죄해야 되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현실을 작품으로 승화시켜 칠레를 전혀 모르는 서울 한 구석에서 책을 읽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것도 문학작품만이 가진 힘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런 뜻에서 정말 슬프고 아름다운 제2의 '박하사탕'을 만나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작품의 해설에 대해 한 마디.

역자인 한기욱 씨가 '망명지에서 꽃피운 상상력의 연대'라는 제목을 붙인 해설은 아주 훌륭합니다. 칠레의 현대사와 함께 작가를 소개하고 있어 작품을 보다 선명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또한 각 작품에 대한 역자의 꼼꼼하고 명쾌한 해설도 덧붙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작품을 읽기 전에 해설을 읽는 우를 범하진 마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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