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담 : 두 번째 아이는 사라진다 문학동네 청소년 13
방미진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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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이 켜지고, 무대에 막이 오른다. (P. 16)

 

  수시로 화장실을 드나드는 남자아이. 적당한 간격을 두고 뒤따라가 딴청을 피우며 지켜봤더니 오랜 비행 끝에 깃을 고르는 새처럼 머리칼을 정돈하는 데 여념이 없다. 어디서 구했는지 유분을 흡수하는 하늘색 종이로 얼굴을 찍어내기도 한다. 한참 후에야 흡족한 표정으로 화장실을 나서는, 그 녀석 세계에선 첫 번째 아이.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그 아이 뒤통수에 지난날의 내 뒤통수가 겹쳐졌기 때문이다. 집을 나서기 전 족히 삼십 분은 거울 앞에서 투덜거리곤 했다. 문을 열자마자 조명이 쏟아질 텐데, 그 조명을 고스란히 받으며 집을 나서야, 아니 무대에 올라야 하는데 머리 모양이 엉망이다. 내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볼 모든 이들에게 미안하고 부끄러운 일이다. 내 모양새가 흐트러지지 않았나, 확인할 겸 주차된 자동차의 새까만 창에 얼굴을 들이밀다 운전석에 앉은 아저씨와 눈이 정통으로 마주친다. 이런, 제길!

  방미진 소설 <괴담> 안에 들어가자 수많은 상상 속의 청중이 소리 없이 사위를 메우더니, 연두가 학교 복도에 들어설 때 일제히 일어나 환호하기 시작했다. 상상 속의 청중은 청소년기에 겪게 되는 과장된 자의식에서 출발한, 타인이 집중적인 관심이 내게 쏟아지고 있다고 믿게 되는 자아중심적사고이다.

 

너도 똑같구나. 너도 결국은 두 번째 아이구나, 라는 동질감과 연민. (P. 236)

 

  누구나 각자의 세계에선 첫 번째 아이이다. 나만을 바라보는 상상 속의 청중을 즐겁게 해주려고 용을 쓰며 행복해하지만 청중은 눈치 채지도 못하는 실수나 혼자만의 염려가 생기면 괜찮은 곳이라 여겼던 세계가 조금씩 흔들린다. 내가 두 번째일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첫 번째가 될 수 없다는 자괴감이 청소년의 의식을 잠식하면서부터 그 곳은 고통스러운 무대가 된다. 첫 번째 아이와 두 번째 아이가 사진을 찍으면 두 번째 아이가 사라지고 만다는 괴담은 이러한 심리 과정에서 만들어진 셈이다.

  괴담은 트라이앵글 인물 구도로 현실이 된다. 자신을 첫 번째로 믿고 싶은 연두, 두 번째일 수 있음을 깨달아가는 지연, 잊히는 게 두려워 죽음으로 기억을 선택한 연주로 꼭짓점을 이룬 트라이앵글. 남자 하나 여자 둘의 기묘한 애정 관계로 청중을 확보하는 데 성공하지만 위태로웠던 균형은 이내 깨지고 말아 청명한 음을 잃은 치한·보영·미래의 트라이앵글. 이밖에도 끝없이 인정받기 위해, 혹은 인정받을 수 없어 좀처럼 불안을 떨쳐낼 수 없는 요한·지연·연지의, 자식을 좋은 배경이나 도구로 활용하려는 세파에 닳고 닳은 성혜·수경과 제자가 첫 번째가 될까봐 저주하는 경민의, 보이소프라노의 맑은 고음(아들)과 음울해지는 음색(딸)과 이유를 잃어버린 울음(엄마)으로 연주되는 삼중주의……. 삼각형 안에서 이들이 마침내 알아낸 진실은 모두가 첫 번째가 될 수 없다는 씁쓸한 자각. 그래서 중간에 끊긴 다리 같은 연못의 전망대는 이들의 해방구가 된 것이다.

 

“미 끼아마노 미미, 마 일 미오 노메 에 루치아(Mi chiamano Mimi, mail mio nome e Lucia).” (P. 52~53 / P. 142)

 

  이 소설의 중심인물을 꼽자면 단연 지연이다. 오래전부터 괴담으로 자기의 거짓 생을 구축한 아이의 핸드폰 벨 소리는 푸치니의 오페라 <라 보엠> 중 아리아 ‘내 이름은 미미.’ 아리아의 첫 소절을 무려 두 번이나 소설에 실은 작가의 의도는 무엇일까.

  미미는 파리에 올라온 시골 처녀다. 공장에서 장시간 노동에 시달려도 생활은 여전히 곤궁하다. 반반한 얼굴로 부르주아에게 몸을 파는 롤레트가 되고 마는데, 롤레트로 활동하는 가명이 미미다. 사랑하고 싶은 상대에게 본명을 밝히고서야 희망을 엿보는 루치아.

  루치아처럼 지연도 진솔해지고 싶지 않았을까. 꼬깃꼬깃 숨겨놓은 내면의 번민을 드러내면 서로가 서로의 배경이 되어* 무대에 설 수 있음을 깨닫게 되지 않았을까. 그런 열망으로 지연은 핸드폰 벨 소리를 선택하고 때때로 미미가 아닌 루치아가 되어 아리아를 부르지 않았을까. 지연의 상상 속의 청중은 꽤 오래전부터 박수칠 준비를 하고 있지, 않았을까.

 

 

 

* 안도현의 <연어> 중 “그러면 연어 떼가 아름다운 것은 서로가 서로의 배경이 되어주기 때문인가요?”에서 인용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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