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풍당당 - 성석제 장편소설
성석제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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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겁게 산들바람 맑은 물결 위에 발을 적실 때

- 론타니, ‘아름다운 시냇물’


  강, 이라고 쓴다. 그러자 내 기억에 저장된 모든 강물 소리가 순식간에 거대한 강줄기를 만든다. 바닥을 애무하듯 흐르다 여울을 만나면 여울의 형태를 소리로 쓰다듬는. 그 맑은 소리를―때로는 세찬 소리를― 품었음에도 불구하고 평상시에는 묵묵히 흐르는 것을 미덕으로 알고 있는. 저물녘 붉은 빛의 산란을 그대로 수면에 담아내어 넋을 잃게 하는.

  바람이 물결에 발 담그는 소리가 귓전을 울린다. 그 청명함에 놀라 감았던 눈을 화들짝 뜨고 만다.


미소 띤 평온이 네 맘에 우러나 오만도 두려움도 사라지게 해

- 모차르트, ‘미소 띤 평온이’


  성석제의 장편소설 <위풍당당>은 강의 속성을 닮은 이야기이다. 아무리 급한 여울을 건너왔어도 이내 평온을 찾는.

  세파에 밀려 흐르고 흐르다 용소에 이른 사람들로 자연스레 마을이 형성된다. 한때 인기리 방영되었던 드라마의 여파로 지역 관광지가 될 뻔했으나 바람만이 드나드는 촬영세트장은 그들의 새로운 생활 무대가 된다. 출렁임을 멈추지 않던 과거로부터 서서히 자유로워진다. 외관만 번지르르한 촬영세트장의 가식적인 공간에서 지난 삶이 이와 다르지 않았음을 깨달으며, 세상과의 단절이 주는 평온을 만끽한다.

  강마을에서의 생활은 지난 시간을 견뎌낸 보상일까. 부모의 비명횡사로 균열이 일기 시작한 ‘나’ 중심의 가족 체계는 조부의 충격사와 친족의 계략으로 영필의 황금숟가락을 물고 태어난 운명을 바꾸어버린다. 배고픔이라는 원초적인 본능을 뒤늦게 몸으로 깨달은 그는 결핍이 주는 활력과 절제가 주는 자족의 균형을 찾아가며 여생을 즐기려 한다. 지금까지의 삶이 환영에 지나지 않았음을 남편이 죽은 이후에야 깨달은 소희도, 남편의 성적 학대가 낳은 비극을 견딜 수 없어 죽음의 문턱을 넘어서려던 이령도 강마을에 이르러서야 오만과 두려움을 내려놓는다.


위로하며 희망을 가져라. 새로운 사랑 또한 즐길 수 있으리

- 스카를라티, ‘위로하며 희망을 가져라’


  또 다른 강의 속성은 낮은 곳을 채우지 않고서는 차오를 수 없다는 점이다. 가끔은 폭우로 범람하며 먹장구름의 배경이 될 순 있어도 강물의 밑바닥에 허공은 있을 수 없다.

  어머니가 사랑하는 남자와 성폭행하는 양아버지 사이에서 갈등하다 돌이킬 수 없는 일을 저지른 새미와 그의 동생 준호. 가출하여 강마을에 정착한 남매는 마을을 위기로 몰고 갈 사건에 휩싸인다. 새미에게 음욕을 품었던 조직폭력배를 때려눕힌 것이다. 이 소설의 발단이다. 뒤탈이 저어된 영필은 남매를 잠시 떠나보내는 것이 현명한 판단임을 주장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고, 조폭의 보스인 정묵은 조직의 자존심과 기강을 세우기 위해 수륙 양쪽으로 강마을에 난입한다. 전개이다. 야산과 야산에서 자라는 식물의 결실과 그 결실을 먹고 사는 사람들과, 심지어 동식물이 소화기관을 거친 증거물까지 가세하여 승승장구하는데, 안타깝게도 도중에 어리숙한 준호가 뒷덜미를 잡히고 만다. 위기다. 준호를 살리기 위해 위험을 감수한 마을 사람들의 가장격인 여산과 정묵의 예사롭지 않은 결전을 지켜보는 마을 사람들은 서로를 위로하며 애써 끌어모은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절정. 그렇다면 결말은?


항상 너의 옆에 있어, 맑은 기쁨 네게 주리

- 아르디티, ‘입맞춤’


  강물은 한결같이 흐른다. 이것이 이 소설에서 발견한 마지막이자 보편적인 강의 속성이다.

  좀처럼 피딱지가 형성되지 않는 생채기에도 미끌미끌한 물이끼가 가득한 강바닥인 양 틈 없이 닿는 위무의 손길, 마을 사람들의 마음은 어느새 강물처럼 흐르고 있었다. 내 옆에 네가 있으므로 자신의 존재감을 찾게 된 사람들은 ‘나’ 중심의 세계에서 벗어나 ‘너’ 중심의 세계에 이른다. 그들의 이러한 흐름은 자연발생적인 가족에 가까워진다. 타인의 시선에 어떻게 비칠까 급급해 하는 동시에 자기의 안위와 이익 챙기기에 혈안인 조직과 대조를 이루면서 신생 가족은 햇살에 무방비로 노출된 강물처럼 반짝인다. 반짝인 채로, 여전히 흐른다.


하느님이 당신을 강하게, 더 강하게 만드네

- 엘가, ‘위풍당당행진곡’


  인생을 가까이서 바라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바라보면 모두 희극이다. 희대의 희극배우 찰리 채플린의 말이다. 하나 둘 강마을에 모여든 사람들이 거쳐온 방을 바라보면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삶과 죽음 사이에서 길항할 수밖에 없는 측은한 인생이다. 같은 강물에 두 번 들어갈 수 없다는 헤라클레이토스가 유일한 위안으로 여겨질 만큼. 그러나 멀찍이서 바라보면 그네들은 각자의 역경과 고통을 나름의 방법으로 이겨낸 인생이다. 스스로를 단련시키는 시간도 흐름을 멈추진 않는다.

  독자로 하여금 울음을 자아내게 하는 것은 고된 작업이다. 울음 대신 웃음으로 감동을 주는 것은 한층 고된 작업이다. 웃음으로, 그것도 해학에서 비롯된 건강한 웃음으로 감동을 줄 수 있는 자는 울음은 아는 사람이다. 작가는 누구보다 채플린의 눈물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지 않을까.

  소통과 이해로 사랑을 일궈나가는 강마을 사람들은 거짓된 공간에서, 머잖아 허물어질지 모를 터전에서 진실된 삶과 마주한다. 그러면서 강해진다. 이제 그 누구도 이들을 막을 수 없을 터. ‘덜컹대는 오토바이(세상) 위에서 자연스럽게 덜렁대지 않으면 자빠질 염려가 있다(P.97)’는 것쯤은 이미 짐작하고 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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