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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종교 이야기 -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믿음과 분쟁의 역사
홍익희 지음 / 행성B(행성비) / 2014년 8월
평점 :
책 제목이 세 종교 이야기이긴 하지만, 사실 이 책은 세 종교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분명 이 책에선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의 신학적 차이와 유일신에 대한 입장차를 다루는 비교 종교학적인 부분들이 존재하지만, 그보단 그 세 종교를 만들어낸 국가와 사회들 면면의 차이점을 다룬다고 해야 이 책의 내용을 더 넓게 포괄하는 말이 될 것입니다. 이처럼 종교를 만들어낸 국가와 사회를 다루기에 이 책은 각 국가와 사회의 역사서가 되기도 하고, 문화서가 되기도 하며, 당연히 종교서적이 되기도 합니다. 굉장히 다양한 분야들을 종교란 키워드를 통해 꿰어냈다고 볼 수 있는데요. 그 사실은 종교란 것이 얼마나 우리 생활방식, 사고방식에 복합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방증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그 방증대로 이 책에는 역사, 정치, 문화, 신학 등등에 종교들이 미친 영향, 그리고 각 민족과 국가의 역사적 상황을 반영한 종교의 변화 과정이 나옵니다. 거기에는 세 종교 각자의 차이점이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고요. 그러나 그러한 차이점에도 불고하고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건 모든 종교는 혼란기에 탄생했으며, 그 혼란기에 어떤 공동체를 공동체로 유지시켜주는 구심점 역할을 담당했고, 때로 그 구심점을 유지하기 위해 공동체 안 이질적인 것들을 몰아내는 배타성을 지니기도 했다는 사실이지요.
그 사례는 세 종교 모두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유대교는 아브라함이 수메르 문명의 문란함과 우르의 몰락을 벗어나 광야로 떠나면서 시작되었다고 쓰여 있고,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었던 순간은 로마가 수많은 군인황제의 탄생과 암살로 극도의 혼란을 겪고 있을 때였습니다. 이슬람은 유목민족들의 숱한 분쟁과 전쟁 속에서 탄생했고요. 이처럼 모든 종교는 혼란스런 사회 속 새로운 가치체계가 나타나야 한다는 필요성의 반영이라는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필요성에 대한 강조를 세 종교는 모두 노아의 방주. 예수 재림, 심판의 날 등과 같은 멸망과 구원의 스토리를 통해서 확인받고자 하는 것일 테고요. 그리고 이처럼 혼란스런 사회를 진정시키고 공동체를 묶는 구심점 역할을 하기 위해서 종교가 탄생했다고 할 때, 우리는 종교가 필연적으로 정치와 함께 결탁할 수밖에 없는 운명임을 짐작할 수 있게 됩니다. 이스라엘 왕국이 처음 생겨났을 때 12지파의 느슨한 연맹체의 분열을 막는 최후의 보루는 유대교였고, 로마가 갈가리 찢길 위기에 처한 제국의 통합성을 제고시키기 위해 이용했던 것도 기독교의 재발견이었으며, 유목민족들을 한데 묶어 새로운 국가를 탄생시키는 데 결정적 일조를 했던 것도 이슬람의 움마(이슬람 국가) 건설을 제창한 메디나 헌장과 신정일치 체제였습니다. 정치는 자신들의 권위를 높이고 공동체를 결속시키기 위해 신이란 상징을 매우 적극적으로 이용하곤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랬기 때문에 종교는 우리들에게 중요한 제도가 되어갔고 큰 영향력을 미치는 제도가 되어갔던 것이겠지요.
그렇지만 다시 한 번 생각해봅시다. 공동체를 결속시키는 도구라는 건, 다른 말로 하면 공동체를 무너뜨릴 위험이 있다고 판단되는 것들로부터 공동체를 지키는 도구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즉, 공동체란 이름에 어울리지 않는 이질적인 것들을 자신들 무리 안에서 밀어내는 배타적인 성격을 종교가 분명 지니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 책에서 나오는 사례를 보면 알 수 있듯, 한 종교가 국가적인 단위로 성행하고 장려됐던 시절엔 반드시라고 할 정도로 이교도에 대한 탄압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주로 위기 상황에서 더욱 심해집니다. 유대인들이 고대 페르시아의 지배 하에서 이스라엘 자치권을 다시 얻었을 때 가장 먼저 했던 일이 에스라 개혁이란 이름으로 행한 이방인과의 혼인 금지였습니다. 바빌론 민족과 피가 섞인 사마리아인에 대한 철저한 멸시도 있었고요. 기독교라고 해서 다를까요? 로마가 태양신 신앙과 기독교 신앙을 적절히 섞어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선포했을 때, 했던 일은 예수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유대인들에게로 돌리는 일이었습니다. 이슬람은 무함마드가 국가수반이 된 후 이교도의 재물을 약탈하는 일은 죄가 아니라는 교시를 내린 적이 있지요. 유대교는 민족이란 이름과 종교란 제도가 결합되었을 때 ‘혼혈’에 대한 배타가 일어났고, 기독교는 제국과 종교가 결합되면서 제국 내 ‘배반자’에 대한 배타가, 이슬람은 국가와 종교의 결합으로 인한 국가 바깥의 ‘이교도’에 대한 배타가 일어났습니다. 물론 각자의 역사적 상황에 따라 이처럼 드러난 양상은 조금씩 다르지만(유대교는 민족이 사라질 위기에서 나타난 배타, 기독교는 제국의 통합성을 위해 적대감을 하나로 모으는 배타, 이슬람은 척박한 사막의 환경 속에서 국가를 유지시킬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일어난 배타), 종교의 강력한 상징성이 그 종교가 속해있는 공동체가 위기에 처했을 때, 그 공동체를 유지시키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을 지키고자 하는 정치적 목적과 결합하면서 나타난 현상이라는 데에는 다른 점이 없습니다. 그것이 유대인들에게는 민족을 지키기 위한 혈통이었고, 로마는 제국을 지키기 위한 내부의 적이었으며, 이슬람은 국가를 지키기 위한 재정이었던 차이가 있을 뿐이었지요. 종교는 이처럼 정치에 의해 호출되거나 적극적으로 정치와 결탁하는 방식으로 자신들의 영향력을 넓힙니다. 그것이 종교가 가진 힘이겠지요.
그렇지만 만약 종교가 단순히 정치하고만 연관이 되었다면 정치와 함께 스러졌을 것입니다. 종교는 자신들을 유지시키기 위해 교육과 문화라는 장치를 사용합니다. 수메르 문명 때부터 학교에서 했던 일은 신을 찬양하는 노래를 가르치는 일이었다고 하지요. 유대인들은 아이들에게 히브리어로 성경을 읽는 법을 가르치고, 기독교와 이슬람도 미션스쿨 등을 통해 자신들의 교리를 가르칩니다. 이것이 하나의 중요한 키워드를 알려준다고 보는데요. 종교라는 것은 결국 ‘동일한 기억을 가진 공동체’를 만들면서 유지된다는 것입니다. 성경, 코란, 토라 등등에 나오는 일들은 사실이냐 아니냐를 떠나서 전부 기본적으로 ‘역사서’의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옛날에 이런 신성한 일이 있었고, 이를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는 것이 종교에서 가르치는 중요한 내용 중 하나가 아닐까요. 그리고 그 기억을 대물림해주기 위해 만들어내는 여러 장치들이 결국 문화로 발전하는 것이겠지요. 유대교에서 독립 때의 성화 봉헌을 기억하기 위해 하누카 촛대를 만들고, 망국의 한을 기억하기 위해 통곡의 벽에 순례하며, 이슬람에서 아브라함의 제사를 기억하기 위해 메카의 카바를 순례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처럼 종교로 이루어진 공동체는 어떤 기억들을 계속 환기시키며 유지됩니다. 유대인들의 종교 공동체가 유독 끈끈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 신에 대한 기억만이 아닌 실제라고 훨씬 더 쉽게 믿을 수 있는 자신들의 고대 민족사 전체를 종교로 신성화(구약에 나오는 성스런 얘기들이 곧 자신들의 역사 이야기이기도 하니까요.)시켰을 때 나오는 강력한 유대감이 아닐까 합니다. 그래서 같은 신을 모시면서도 각각 조금씩 다른 경전을 쓰는 것이 아닐까요? 결국 종교 공동체는 ‘어떤 기억을 공유하고 있는가’로 결정 난다면, 다른 종교와의 차별성을 위해서라도 다른 기억을 공유해야 할 테니 말이지요. 그리고 자신들의 기억이 서로 맞다고 싸우는 게 종교 간의 교리 갈등이라고 보면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해 봤습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느낀 것이 있다면, 종교에서 한 시대를 반영하는 방식은 언어가 아닌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한 시대의 정치적 주도권만이 아닌 문화적 주도권까지 온전히 틀어쥔 실세가 어디였는지는 그 시절 경전이 어느 나라의 언어로 쓰였는지를 보면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 것입니다. 유대교의 경전이 처음에는 자신들의 언어인 히브리어로 쓰였지만, 알렉산더가 제국을 만들면서 그 영향력이 그리스 역 경전으로 드러났고, 로마 제국 때는 라틴어로 쓰이는 그 과정이 세계 판도와 맞아떨어져가면서 간다고 느꼈기 때문이지요. 다른 말로 하면, 그 시대의 문화적 주도권을 빼앗아오기 위해서는 우선 언어를 정복하라는 말이 될 것입니다. 루터가 독일어 역 성경을 펼쳐내면서 종교개혁의 횃불이 밝혀졌던 것처럼 말입니다. 유대인들이 아무리 사어화된 말이라고 해도 히브리 원어가 남아있는 경전만을 경전으로 인정하고 다음 세대에게 히브리어 가르치기를 결코 포기하지 않으며 이슬람교도들이 아랍어로 된 코란만을 진정한 코란으로 인정하는 그 모든 사례들이 종교의 고유성을 지키기 위함은 공동체의 고유성을 지키기 위함이고, 이런 목적을 이루기 위한 가장 근본적인 도구는 언어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방증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는 곧 처절한 문화 투쟁의 장을 보여주는 것이지요.
작가는 세 종교가 갈등과 반목을 중단하고 화합해야 한다는 취지로 이 책을 썼다고 합니다. 그러나 종교는 인간이 공동체를 만들고, 이를 유지시켜온 원인까지는 아니지만, 우리들의 전쟁, 정치 갈등, 문화적 약육강식의 세계와 발맞춰 발전해온 제도, 가장 뿌리 깊은 상징이라는 생각이 오히려 이 책을 읽으면서 더욱 확실시 되었습니다. 우리는 공동체의 고유성을 보장해주는 이 ‘상징으로 이루어진 기억’을 서로 화합시킬 수 있을까요? 그 때의 두려움을 극복하고 용기를 낼 수 있을까요? 책에서 보여주는 숱한 역사적 사례들과 이를 아직도 반복하고 있는 현대사 속의 종교가 결합된 외교적 갈등들을 보며, 잠시 생각해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