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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란 무엇인가 - 독점계약 번역 개정판
E.H. 카 지음, 김택현 옮김 / 까치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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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뭐랄까, "20세기의 한복판에서 19세기를 외치다" 같은 부제를 달아줘야 할 것 같은 책이다. 물론 나쁜 의미는 아니다. Carr는 그 스스로도 수차례 밝혔듯 '빅토리아 시대' 때 청년기를 보낸 영국인으로서 '인류의 끝없는 진보'라는 낙관적 가치관을 끝끝내 버릴 수 없었던 사람이었고, 그런 사람이 20세기라는 큰 절망과 회의의 시대(2차 세계대전, 핵전쟁의 위험, 냉전 등등으로 인해 '인간은 틀렸어' 같은 냉소주의가 확산됐던 시절.)를 맞닥뜨렸을 때 가졌을 법한 고민은 당연히 둘 중 하나였을 것이다. 자신의 가치관을 지킬 것인가, 아니면 버릴 것인가? Carr는 전자를 택했다. 그러나 결코 '어버이 연합'류의 똥고집을 부리는 뒷방 늙은이가 되는 방식을 택하지는 않았다. Carr가 택한 방식은 뛰어난 역사학자로서의 자기 능력을 살려 당대의 상황을 충분히 숙고함으로써 자신의 가치관을 더욱 정교하고 풍성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인류가 발전은커녕 자신들의 멸망조차 제대로 막을 수 없는 바보짓을 거듭해 벌이는 것 같은 그 순간, 어떻게 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진보한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인가? 이 책은 그 질문에 대한 Carr의 대답이다. Carr 식으로 말하면, Carr는 이 책에서 역사와 역사철학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만, 사실 자신이 몸담고 있던 60년대 영국 사회의 '현재'에 대해 증언하고 있는 셈이다.

 

  처음은 19세기 역사학의 실수에 대한 반성에서부터 시작한다. 1'역사가와 그의 사실'2'사회와 개인'에서 Carr는 말한다. 19세기 빅토리아 시대처럼 "사실을 숭배하던 위대한 시대"는 갔다고 말이다. 우리는 더 이상 빼도 박도 못하는 '사실'이란 원소들이 모여 '역사'를 이룬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사실'들을 열심히 모으기만 하면 반박할 수 없는 역사의 '절대 법칙'이 자동적으로 도출될 것이란 기대를 하지도 않는다. 19세기 랑케는 '그것은 실제로 어떠했는가?'라는 기치를 내걸고 수많은 역사학자들을 실증주의의 진영으로 끌어 모았지만, 실상 우리가 다들 알고 있다시피 역사는 단순한 사실의 나열이 아니다. 사실을 선택하는 과정에 이미 가치관이 개입하며, 그 사실들이 가진 중요성의 서열을 무슨 기준으로 나눌 것인가의 문제에 있어서도 다시 한 번 가치관이 개입한다. 사실 역사가가 다루는 제 1차 사료부터가 이미 객관적인 사실의 기록이 아닌 기록한 자의 가치관이 반영된 결과물이기 때문에(바이마르 공화국의 외무장관 슈트레제만과 소련의 외무장관 치체린의 회담 기록, 슈트레제만의 기록에서 치체린의 발언은 매우 비합리적인 발언으로 그려진다.), 우리는 출발점에서부터 이미 '무엇이 진짜 사실인가?'에 대한 명확한 결론을 내릴 수가 없다. 그저 자신의 가치관에 의해 역사를 재구성할 뿐이다. 사실 그러한 가치관을 통해 역사를 서술하는 역사가조차 독립된 개인은 아닌 것이다. 그는 자기가 속한 사회의 눈으로 과거를 바라본다. 그리고 현 사회가 과거를 살펴봄으로써 얻어낼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의 기준으로 역사를 서술한다. 그로트가 그리스사 연구를 통해 19세기 영국 부르주아 계급의 민주적 이상을 그려내고자 했고, 몸젠이 로마사 연구를 통해 1848년의 환멸적으로 지리멸렬했던 혁명을 비판하고 카이사르 같은 강력한 지도자가 나타나기를 바랐던 당시의 열망을 반영시켰던 사례들에서 알 수 있듯, 역사가가 '사회 안의 개인'인 한, 크로체의 말처럼 '모든 역사는 현대사'인 셈이다. 여기까지가 Carr가 지적한, 역사가가 처한 거부할 수 없는 조건이고 피할 수 없는 한계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역사가 사실에 의해 구성되느냐 가치관에 의해 재단되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가 유의미한 이유, 역사에서 여전히 '객관성'이란 걸 따질 수 있고, 따져야만 하는 이유이다. 20세기는 사회와 인류가 가진 진보의 가능성에 대해 본질적인 의문을 던지던 시기였고, 이런 사회적 분위기는 역사학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다시 말해 학문이 진보하는 것인가에 대한 본질적인 의문이 제기되었다는 것이고, 이는 앞서도 밝혔듯 사실과 진리 사이 관계에 대한 문제제기, 절대적 진리를 부정하는 상대성에 대한 강조로 드러났다. Carr가 역사학자로서 이런 사회적 분위기에 맞섰다는 것은, 결국 역사학계에서 제기된 이런 문제들에 대한 반박을 해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역사학이 가진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우리는 여전히 역사학이 그 한계를 넘어설 수 있다고 말해도 되는 걸까? Carr는 그렇다고 대답하며, "그렇다"는 대답을 설명하는 장이 사실은 3~6장 끝까지의 내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가 서술하는 자의 시선에 의해 재단되는 것이라 해서, 그 어느 해석도 다른 해석에 비해 우위를 점할 수 없으며, 역사에서 의미, 법칙을 찾아내려는 시도는 헛된 것이라 보아서는 안 된다. Carr는 이러한 회의주의자들의 주장에 대해 그럼에도 불구하고우리는 여전히 역사에서 객관성을 찾아낼 수 있다는 태도를 취하는데, 3장은 그 반박의 첫 단추라 할 수 있다. Carr는 여기서 역사는 결코 과학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논지를 하나하나 반박해나간다.

  역사는 정말로 과학이 될 수 없는가? 이 질문에 대한 Carr의 첫 번째 반문은 이것이다. “당신들이 생각하는 그 과학이란 것이 대체 무엇인가?” 역사에 대한 회의주의는 역사에서 절대적 법칙을 발견해낼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역사를 과학과 분리하려 했지만, 사실 절대적 법칙과 진리를 발견해낼 수 없는 것은 역사학만의 문제는 아니다. 학문을 정립하고 연구해나가는 사람들이 가진 근본적인 한계인 것이다. Carr는 자연과학계에서 전개된 진리에 대한 논쟁들을 소개하며 이를 설파해나간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이다. 앙리 푸앵카레는 과학과 가설이란 책을 통해 과학은 절대적 진리를 찾아나가는 학문이 아닌 사유의 진전을 구체화하기 위한 가설위에 세워진 체계이며, 증명과 수정과 반론을 통해 이 가설을 더 낫게 만들거나 바꾸거나 할 수 있을 뿐이란 주장을 했다. 그리고 이는 자연과학만이 아닌 역사학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 말이다. 역사학도 절대적 진리와 법칙을 찾아낼 수는 없지만 연구자의 가설에 의거해 자료를 수집하고 배치하며, 또 그 과정에서 가설을 수정하기도, 파기하기도 한다. 역사학과 자연과학을 완벽히 똑같이 보는 것도 우습지만, 두 학문을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보는 태도 또한 명백히 위험한 태도임을 Carr는 강조한다.

 

  다른 주장들도 마찬가지이다. 역사는 특수하고 고유한 사건만을 다루며, 교훈을 얻을 수 없고, 예견할 수 없고, 필연적으로 주관적이며, 종교와 도덕의 문제를 포괄하기 때문에 과학이 될 수 없다는 주장들에 대해 Carr는 하나하나 이를 반박해나간다. 펠로폰네소스 전쟁과 2차 세계대전은 서로 다른 고유한 사건이지만, 둘 다 전쟁이란 하나의 테마로 묶여 연구대상이 되지 않는가? 사실 역사가가 하는 일이야말로 고유한 사건들이 가진 일반적 특성들을 찾아내는 작업이다. 또한 그러는 이유 또한 거기서 전쟁의 특징, 공통적인 전개과정, 원인과 배경 등을 알아내 전쟁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을 찾아내기 위해서인 것이다. 그리고 이는 당연히 예견을 담보한다. 언제 전쟁이 일어날지는 알 수 없지만, 어떠한 상황에서, 어떤 요소들이 결합했을 때 전쟁이 발발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을 예견함으로써 우리는 그것에 대비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또한 더 이상 자연과학에서도 예전의 경험주의적 인식론 모델을 채택하지 않는 상황에서 역사학에 대해서만 주관성의 잣대를 다르게 들이대는 것은 온당치 못하며, 종교와 도덕은 이를 역사의 인과관계를 설명하는 이론의 대상이 아닌 요소로 받아들이려는 태도만 조심하면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절대적 진리와 법칙을 찾아낼 수 없다는 것이 곧바로 모든 해석의 평등성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역사에도 과학적 성격이 분명히 존재하며, 따라서 우리는 역사에 대한 연구들 중 더 나은 연구와 해석이란 걸 가려낼 수 있다. 이것이 Carr가 역사에 과학적 성격을 부여하면서 암시하고 싶었을 주장일 것이다.

 

  이 암시는 4장과 5장에서 본격적인 주장이 된다. 그렇다면 역사에선 무엇이 더 나은 연구와 해석인가? 그것을 가려낼 수 있는 기준이란 것은 무엇이 될 것인가? 이 질문 앞에서 당시 역사학자들은 두 가지 퇴행을 보였다. 그딴 건 없고 역사는 우리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우연에 의해 좌우되며 거기서 어떤 의미를 도출해내는 것은 헛짓거리라는 냉소, 혹은 역사 안에서, 즉 인간 안에서 어떤 의미나 희망을 보지 못해 역사가 가지는 의미는 역사 밖의 신이나 우리가 알 수 없는 절대적 법칙에 의해 좌우된다고 보는 신비주의. Carr는 이들 앞에서 여전히 이성의 힘을 말하며 더 나은 인관관계에 대한 설명이란 기준을 제시한다.

 

  여기서 Carr담배 사러 간 로빈슨을 치어 죽은 브레이크 고장난 차의 사례가 나온다. 브레이크 고장난 차가 마침 담배를 사기 위해 길을 걷던 로빈슨을 치어 죽였다. 우리가 기록하고 전해야 하는 것, 그 사고를 일으킨 가장 중요한 원인은 무엇인가? 그 차가 브레이크가 고장 났다는 사실인가, 마침 로빈슨이 그 시각 담배를 사러 가고 있었다는 사실인가? 역사에서의 우연을 주장하며 특정한 사실에 우위를 두지 않는 사람에게 두 사실을 모두 똑같이 보이겠지만, 우리는 통상적으로 브레이크가 고장난 차가 그 사건에 더 큰 원인을 제공했다고 생각한다. 브레이크가 고장난 차에 집중할 때 우리는 그것을 고쳐야 한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고, 그렇게 앞으로의 사고를 예방할 수 있지만, 마침 로빈슨 씨가 담배를 사러 가고 있었다는 그 순간의 우연에 집중할 때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 하나의 사건만을 따졌을 때 원인의 경중을 나누기는 쉽지 않을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대개 하나의 사건을 기록하는 이유는 그 기록을 통해 더 나은 상태를 만들고자 하는 목적을 가지기 때문이며, 그 목적을 충족시킬 수 있는 원인들-우리가 개선할 수 있고 통제할 수 있는 사안들-을 집중해 관찰하여 인과관계를 설정한다. 따라서 Carr의 기준에 따르면, 역사학에서 더 나은 해석이라 부를 수 있는 역사적 해석, 그리고 더 객관적이라 부를 수 있는 역사적 해석은 이 같은 목적을 가장 효과적으로 충족시켜줄 수 있는 인과관계를 발견해낸 해석인 것이다.

 

  그렇다면 그 목적이 뭐냐는 질문이 당연히 나오게 된다. 그리고 바로 이 부분에서 막힘없이 자신의 논지를 펼쳐나가던 Carr의 주장이 잠시 머뭇거리는 모습을 보이는데(내 생각에는), 목적이 있다고 주장하는 순간 역사를 추동하는 힘이 역사 바깥에 있다고 주장하는(신이건 세계정신이건 뭐건 간에) 사람들과 자신을 구분할 수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목적이 없다고 주장할 수도 없다. 목적이 없다면 지금까지 자신이 펼쳐나간 모든 논지는 헛소리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고심 끝에 Carr는 역사에서의 목적을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고 뭉뚱그린다. “인간 잠재력의 부단한 발전이 곧 역사의 목적이며, 이 보편적 목적을 이루기 위한 구체적인 목적들은 그때그때의 역사적 과정마다 생겨나는 것이라고 말이다. 인간의 목적은 인간이다. 대충 이런 멋있는 말로 요약할 수 있는 주장일 것이다. 그리고 Carr는 마지막 장 지평선의 확대에서 당대의 암울한 분위기를 비판하며(세상의 진보가 끝났다는 주장이 제 1세계를 중심으로 나오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라, 그건 우리의 오만이다. 우리의 역할이 끝났다고 인류의 진보마저 끝난 건 아니다. 3세계의 약진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가. 우리는 여전히 발전하고 있고, 그 발전을 선도하는 역할이 우리 손에서 떠났을 뿐이다. 그야말로 지평선의 확대인 것이다. 이게 이 장의 주장이다.) 여전히 우리는 발전하고 있다는 희망으로 끝을 맺는다.

 

  사실, Carr의 머뭇거림을 별로 봐주고 싶은 생각은 없다. Carr는 여전히 이성으로 법칙을 발견해내리라 믿던 시절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 역사에서의 객관성을 옹호하려다보니 어쩔 수 없는 측면도 있었겠지만, ‘인간 잠재력의 부단한 발전이란 말은 너무 막연하고 추상적이다. 인류가 무한히 발전할 수 있으리라고, 잠재력이 무한히 계발될 수 있을 거라고 누가 단언하고 예측할 수 있는가? 그리고 그걸 또 누가 증명해낼 수 있을 것인가? 법칙이 될 수 없는 것을 법칙처럼 이야기하는데 Carr는 너무 많은 공을 들인다. 그러다보니 너무 막연한 목표를 너무 확실한 단언으로 말해야 할 때 생기는 머뭇거림이 나타나는 것이다.

 

 차라리 그건 법칙이라기 보단, 놓을 수 없는 희망이라 보는 것이 더 맞을 것이다. 그리고 그게 Carr의 본심에 더 가까운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역사학의 객관성은 인간 잠재력의 부단한 발전이란 목적에 입각해 최대한 그 목적을 실현하는데 도움이 되는 인과관계들을 얼마나 많이 찾아낼 수 있는가에 달려있다.” 뭐 대충 이런 유의 딱딱한 문장을 좀 더 솔직하게 이렇게 바꿔보면 어땠을까. “그래, 너희 말대로 아무 의미도 없는 게 세상일지도 몰라. 그리고 그 나물에 그 밥으로 살아야만 하는 게 인간일지도 몰라. 그래도 있잖아, 우리는 여전히 아이를 낳고, 사랑을 하고, 친구를 사귀며 살아가잖아. 왜 그러는데? 다 끝난 세상이라면서, 그 말을 하는 사람조차도 똑같이 아이를 낳고, 사랑을 하고, 친구를 사귀며 살아간다고. 그게 인간이야. 가장 깊은 절망 속에서도 결국엔 행복하기를 바라는 게 인간이고, 행복해지리라 믿으며, 지금보다는 더 나은 미래가 있을 거라 믿으며 살아야 하는 게 인간이라고. 그 믿음이 있기 때문에 아이를 낳고, 사랑을 하고, 친구를 사귀며 살아가는 거야. 그 믿음이 철저히 깨져버린 인간은 결국, 죽는 길밖에 다른 길이 없어. 우리가 살려면, 인간이 살려면 세상은 더 나아질 수 있다.’는 믿음을 계속해서 행동에 옮겨야 하는 거고, 그래서 그런 인간이 만들어낸 학문인 역사학은 인간에게 그 믿음을 제공하고 행동을 제시하는 임무를 저버릴 수가 없는 거야...” 사실 Carr가 쓰고 싶었던 말은 이런 게 아니었을까. 적어도 나는 그렇게 느꼈다. 책의 문장 중간 중간에서 그런 인상을 받았으니까. 우리 사는 세상, 힘들다. Carr가 살던 1960년대는 그래도 세상에 다시없을 거라 말해지는 경제 호황이라도 있었지, 우리는 호황은커녕 이제 만성이 된 불황 속에서 조금씩 말라죽어가는 기분을 느끼며 살아간다. 그래도, 악으로 깡으로 세상은 더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을 놓지 말자. 그래야 우리가 살 수 있는 거니까. 책 한 권까지 써가며 희망을 놓기를 거부했던 Carr처럼 말이다. 내게 이 책은 그래서 학술서적이 아닌 그저 좋은 선배의 따듯한 격려처럼 느껴졌다. 누군가와 함께 이 책을 읽으며 그 희망에 대한 믿음에 대해 이야기 나누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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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기자 맞아?
오동명 글, 사진 / 새움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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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옛날 책이다. 무려 15년 전, 그러니까 무려 김대중 씨가 대통령으로 있을 때이다. 굳이 그 시기를 가늠하는 잣대로 대통령 이름을 거론하는 것은 이 책이 정권과 언론 사이의 관계 속에서, 언뜻 갈등인 듯 보이지만 기득권을 놓치지 않으려는 한 족벌 신문의 악다구니였던 홍석현 사장 탈세 건을 둘러싼 일련의 사건 속에서 끊임 없이 스스로의 정체성을 고민하다 결국 사표를 쓰고 나온 중앙일보 출신 한 사진기자의 의견집이자 속내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10년 정도 몸담았던 중앙일보의 모순과 언론사의 관행이라 불리는 나쁜 작태들을 작심하고 낱낱이 적은 책이라지만, 솔직히 정독을 하진 않았다. 언론의 족벌구조를 해체하고 사회의 공기로서 거듭나게 만드는 시민단체, 일선 기자 중심의 언론 개혁 운동이 시급하다. 지당한 말씀이고, 지당한만큼 지켜지지 않았던 말씀이다(그렇게 해서 일어난 것이 안티조선 운동이었고, 이제 그 운동이 벌어지던 시점과 다른 언론 환경에 놓여있는 우리들에게 그의 문제제기가 당장의 실천을 불러일으키는 실효성 있는 제안으로 다가오진 않는다.). 문제제기나 해법이 크게 참신한 것도 아니고, 일선 기자였던 당시 현장에 대한 고발은 이제 15년이 지난 지금 낡은 감이 있다. 저자의 고발은 그냥 묻혔고, 묻힌 상태로 낡아버려 새삼스레 다시 꺼내기에도 애매한 것들이 되어버렸다. 달라진 풍토. 달라진 분위기. 그리고 그 누구한테 책임을 물어야 하는지도 모른 채 사라져버린 논란과 그 당사자들. 저자의 글은 딱히 파란을 일으키지도 못한 채 세월 앞에 스러져버렸다.

 

 그런 저자의 글을 굳이 다시 꺼내 읽은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의 글보단 저자의 삶이, 시간이 흐른 지금 새로이 궁금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홍세화 씨가 '생각의 좌표'에서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흰색을 가장 싫어하고 거북해 하는 건 검정이 아니라 침묵하는 애매한 회색들이라고. 그 흰색이 이만하면 괜찮다 타협하는 회색들의 기만을 존재 자체만으로도 드러내기 때문에 흰색을 회색들한테서 가장 먼저 배타당할 수밖에 없다고. 저자는 독자의 항의를 장난전화처럼 피해버리고 서로 낄낄대는 기자들 앞에서 굳이 '그러면 안 되는 게 아니냐고' 질문하고, 적당히 비위를 맞춰주길 바라는 유력인사들 앞에서 또 굳이 입바른 말을 하고 굳이 안 해도 되는 싸움을 데스크와 만든다. 그 '굳이'라는 말. 아마 그 말조차 회색의 말일지도 모른다. 선배가 나가면 누가 우리 대신 데스크와 싸우면서 추켜올리는 듯 하면서 '어떤 또라이'에게 부담스런 일을 다 시키려들었던 저자의 숱한 선후배들이 했을 말들 말이다. 저자는 흰색으로 남고 싶어서 퇴사를 택했다. 처자식이 있는 사람이 말이다. 이럴 때 텍스트는 문자 그대로가 아닌 저자의 삶이란 맥락에서 새로이 질문을 던지게 해주는 새로운 의미가 된다. 나는 다시 한 번 묻고 싶다. 흰색으로 외로웠던 날들이 어땠느냐고. 그걸 아직 지키고 있느냐고. 15년이 흐른 지금. 동료들이 부장이 되고 잘하면 국장으로 돌아다니고 있을지도 모르는 이 시점에서, 당신의 삶은 문득, 낡아버리지 않았느냐고. 부정을 바라며 던지는 질문들을 이렇게 되뇌어본다. 결국 나는 부탁한다. 끝끝내 지켜달라고. 아직 당신의 흰색이 찬란하기를 바란다고. 천천히 당신을 외롭지 않게 만드는 다른 흰색들이 생겨나기를, 부디, 바란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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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엔 돌아오렴 - 240일간의 세월호 유가족 육성기록
416 세월호 참사 기록위원회 작가기록단 엮음 / 창비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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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이 넘게 지났다, 고 다들 말을 한다. 100일이 되었다, 1년이 되었다, 500일이 넘었다 등등의 숫자를 되뇌는 수작들도, 숫자가 점점 불어나고 늘어날수록 작아져만 간다. 이제 묻지 않을 수 없다. 책 안의 한 어머님의 말씀처럼, “잊지 않겠다고 말하고, 기억하겠다고 말하는데, 과연 무엇을 잊지 않고 기억하겠다는 것인지”를 말이다. 그것이 단순한 숫자는 아닐 것이다. 304명이 죽었고, 577일이 지났다는 숫자와 숫자 사이를 채워주는 것은 구체적인 사람의 이야기이다. 결국, 기억해야 하는 것은 사람이다.

 

 이 책은 그래서, 101번째로 나온 1명의 학생이 아닌, 매니큐어를 바른, 아버지와 이야기하기를 좋아했던 2학년 10반 김다영 학생의 얼굴을 상상하게 만들고, “무엇을 기억하겠다는 것인지”를 말했던 한 어머님이 아닌 2학년 2반 길채원 학생의 어머니 허영무 씨의 한숨을 기억하게 해준다. 그리고 그 기억은 아이들을 잃어버린, 누구보다 생생하게 그들을 기억하고 있을 당사자들의 목소리를 통해 전달된다는 데에서 그 가치를 가진다. 언론에 의해 우는 모습으로만, 아니면 보상금을 따지는 장사꾼의 이미지로만 박혀있던 유가족들은 이 책에서 마침내 딸에게 끓여줬던 라면을 신나게 이야기하는 아버지의 모습과, 김무성의 발치에 무릎을 꿇은 남편의 심정을 이해하는 아내의 모습이 된다. 잃어버린 누군가를 기억하는 일은 그렇게 때론 자신들이 아버지와 어머니‘였’던 게 아닌 지금도 그들의 아버지와 어머니임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끈질김이 되기도 함을 우리는 그들의 목소리를 통해 배운다. 그렇게 지난 사람을 기억하고 기록하는 모든 행위는 끈질긴 미래가 된다. 부모로서,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 싶어 하는 사람의 모습이 된다.

 

 외면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이 책에 보이는 그 분들의 모습은 위태하다. 그 분들의 몸에는 끈질긴 미래 말고도 견뎌낼 수 없는 불행에 짓눌려가는 슬픔이 함께 있다. 사라진 이들을 마음에 담아놓고 사는 건 결국 그 사라짐을 닮게 만드는 걸까. 어느 순간 그 분들이 휙 사라져 버릴까 겁이 난다. 제발, 한 사람 한 사람의 몸에 너무 큰 미래와 너무 큰 슬픔을 떠넘기려 하지 말자. 사라진 이들에 대한 기억을 조금씩 나눠가져, 살아있는 자들이 더 이상 사라지지 말도록 하자. 이 책을 읽는 것은, 이제라도 우리 곁의 사람을 살리고자 하는 작은 노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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쥐 The Complete Maus 합본
아트 슈피겔만 지음, 권희종 외 옮김 / 아름드리미디어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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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두 번 다시 읽고 싶지 않은 책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두 번씩이나 견뎌야 한다는 건 너무 힘든 일입니다.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했던 시절이 내뿜는 긴장된 분위기가 어찌나 강력한지, 스스로가 만약 그 시절 그 곳에 있었다면 자살했을 것인가 아닌가를 읽는 내내 자문해봐야 하는 그 시련이 어찌나 힘든지, 그 사실들을 그저 회피하고 싶어집니다. 그러나 회피한다 해서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요. 그리고 피한다고 해서 내 안에도 있을지 모를 가해자의 본성과 피해자의 살아남기 위해 가져야만 했던 냉정함, 그 때문에 가해자, 피해자 모두에게 있었으나 영영 망가져 돌이킬 수 없어진 인간의 가능성들이 해결되는 것도 아닐 것입니다. 문제가 어렵다 해서 문제를 놓아서는 안 됩니다. 일단은 그런 일들이 세상에 ‘있었고’, ‘지금도 있으며’, ‘내 안에도 있음’을 아는 것이 첫 번째 단계가 되지 않을까 합니다. 책 안에서 저자가 “아마 모든 사람들이 영원히 죄책감을 느껴야 할 것”이란 말은 그렇게 이해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두고 볼 때, 이 책은 저자가 죄책감을 가지기 위한 시도의 기록입니다. 폴란드 국경 근처에서 살다 독일 나치 세력에 의해 갖은 위협을 받고 아우슈비츠까지 갔다가 살아남은 아버지에 대해, 저자는 기록에 그치지 않고 그 시절을 상상하며 그림을 그려 만화를 만듭니다. 만화라는 이미지를 통해, ‘쥐’라는 만화의 상징성을 통해 저자는 보다 적극적으로 그 시대를 상상하고, 대면하는 것이죠. 아버지의 이야기를 자신의 이야기로 만드는 과정을 통해 무엇이 파괴되었고, 무엇이 살아남았으며, 그와 같은 상황 속에서 인간은 어떤 모습을 띄게 되는가를 ‘아버지의 문제’에서 ‘자신의 문제’로 만든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자신의 문제’를 저자는 모두에게 공개함으로써 ‘우리의 문제’로 만듭니다. 죄책감을 가지기 위한 시도라는 것은, 이런 면에서 과거 어떤 시절의 인간이 저지른 죄에 대해 저자와 우리가 공동을 책임감을 느끼게 만들기 위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때로 어떤 죄는 인간이 저질렀단 사실만으로도, 같은 인간인 우리 자신에게도 그런 본성이 숨어있는지 안지를 의무적으로 점검해 재발을 막아야 할 만큼 끔찍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책에는 내용에 있어 어떤 단일한 메시지가 없지만(아버지의 이야기를 충실히 따라갈 뿐, 어떤 판단을 유도해내려 애쓰지는 않습니다.), 가장 큰 메시지가 있습니다. ‘직시’할 것. 즉 누군가의 끔찍한 과거를 남의 이야기가 아닌 자신의 이야기로 내면화시켜, 스스로는 과연 어떻게 했을 것인지를 자문함으로써 자신의 본성을 점검할 것. 그것이 아버지의 이야기를 ‘아버지만의 이야기’로 생각해 녹취나 기록만으로 남겨두지 않고, 이미지와 상징이라는 만화의 형식을 빌려 ‘작품’으로 만들어낸 저자의 메시지일 것입니다. 자신의 메시지를 만화라는 형식 그 자체로, 작품을 만들어낸 과정 그 자체로 웅변하고 있는 것이지요.

 

 아마 그래서일 것입니다. 저자는 자신이 아버지를 찾아가고, 만화를 그려내는 과정 자체를 만화로 만들어 아버지의 회고 중간 중간 끼워 넣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또 다른 종류의 ‘직시’가 있습니다. ‘자신의 한계’에 대한 직시입니다. 이는 곧 저자 스스로가 고백하는 ‘작품의 한계’이기도 합니다.

 

 정말 너무나 끔찍한 과정을 견디고 살아남은 아버지이지만, 고통을 이겨낸 사람이 꼭 아름답거나 선한 것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의 경우를 저자의 아버지는 보여줍니다. 구두쇠에, 새 아내가 자신의 돈을 뜯어가려 한다는 강박증에, 아들을 무시하며 남의 의사를 물어보지 않고 제 멋대로 행동하고(아들의 낡은 외투를 제 멋대로 버려버리죠.), 자신의 말만이 옳다고 생각하며, 무엇보다 아버지 스스로가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적 성향을 띄고 있음을 저자는 가감 없이 드러냅니다. 그리고 그런 아버지와 갈등하며 아버지와 같이 지내는 걸 무척이나 껄끄러워하는 자신의 모습도 가감 없이 드러내죠. 이것은 두 가지를 말해줍니다. 한 때 호남 형으로 여자들의 선망의 대상이었고, 극한 상황 속에서도 끝까지 가정과 자신의 아내를 책임지고자 했던 아버지가, 박해 후 자신의 내면에서 영영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고통이 인간을 절로 성숙시켜주는 것이 아니고, 또 사람을 성숙시켜주는 고통만이 세상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아버지의 망가진 모습은 과거 모습과의 비교 자체만으로 당시 고통의 정도를 짐작하게 하며, 동시에 살아남기 위해 무엇을 버려야만 했는지, 그 ‘무엇’을 버리도록 강요한 상황은 또 ‘무엇’이었는지를 질문하게 합니다. 그리고 한 번 가해진 그 ‘무엇’이 얼마나 오래가는 지도요(만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아버지는 병중에 혼미한 정신으로 아들의 이름을 리슈라고 잘못 부릅니다. 리슈는 나치 정권에 의해 잃어버려야만 했던 아들의 이름이죠.). 제가 무엇들을 굳이 특정하지 않고 ‘무엇’이라고 부르는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책을 보면 알겠지만, 단일한 하나의 탓으로 모든 책임을 떠넘기기에 우리의 비극은 너무 복잡하기 때문입니다. 그토록 간단한 일이었으면 어찌 아직까지 재발하는 비극이겠습니까. 어찌 보면 이 책은 그 복잡함을 드러내기 위해 어떤 걸 덜거나 빼지 않는 ‘있는 그대로’를 드러내는 방법을 택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하나의 책에서 그 모든 원인을 세세히 제시할 수는 없지만, 그 복잡한 원인들이 뒤섞여 만들어낸 한 사람의 모습이라는 ‘결과’는 때로 그 모든 원인을 짐작하게 만들어주는 압축된 흔적이 되기도 하죠. 저자는 그 흔적들을 자신만의 시선으로 분석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있는 그대로 드러내 우리 모두의 단서로 만들었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앞서 이 책의 메시지는 형식에 있으며, 내용은 메시지보단 ‘문제’와 ‘단서’에 가깝다고 한 이유입니다. 우리는 그 ‘단서’를 풀기 위한 우리만의 형식을 가질 수 있을까요? 얼마나 어렵든, 그것이 저자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사항일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무척이나 힘든 일입니다. 저자는 자신이 아버지에 대해 가진 ‘이해할 수 없음’을 그대로 만화에 담음으로써 그것이 얼마나 힘든지를, 그리고 그래서 이 작품이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음을 솔직히 고백합니다. 작품이 가진 한계에 대한 직시는 우선 기록의 부족입니다. 아버지가 어머니의 수용소 시절 일기를 자신이 읽기 힘들단 이유로 멋대로 태워버리는 통에, 저자는 영영 어머니의 시선으로 그 시절을 바라볼 기회를 잃어버립니다(당사자에게 직시란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저자가 스무 살 때 벌어진 어머니의 자살도 영영 그 이유를 알 수 없는 수수께끼로 남아있지요. 아버지는 자신이 봤을 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을 반복하고, 작품이 다 끝날 때까지 저자는 그 ‘이해할 수 없음’을 넘어서지 못합니다. 그리고 이를 그대로 드러냄으로써, 저자는 자신의 작품이 결코 극복할 수 없는 지점들이 있음을 의식적으로 드러냅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아무리 아버지의 이야기를 자신의 이야기로 만들기 위해 노력해본들, 겪지 않은 사람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라는 것이 있을 테니 말이죠. 이런 한계는 현재 아버지와의 갈등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이 만화로 그려내는 아버지의 이야기 자체가 저자의 한계를 알려주는 시험이 됩니다. 작중에서 저자는 이런 자신의 한계에 대한 두려움을 아내에게 털어놓습니다. 내가 도저히 상상해낼 수 없는 일들을 함부로 만화로 그려내 망쳐버리는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을 말이죠. 자신이 앉아있는 촬영장 의자 아래 많은 유대인들의 시체가 쌓여있는 장면은 죽음을 팔아 유명해진 자신을 자책하는 느낌마저 풍깁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이 자책은 참으로 치열하고 바람직합니다.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정도의 한계를 알아간다는 것은 다른 말로 완벽히 같아질 수 없는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아버지와 같은 존재일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렇기에 아버지의 한계를 자신만의 시선으로 솔직하게 그려낼 수 있었습니다. 자신의 한계를 치열하게 직시한다는 것은 이처럼 서로의 다름에 대한 직시로 이어져 자신과 타인까지 포함하는 더 높은 수준의 반성을 이끌어 내는 가능성으로 이어짐을 이 책은 보여줍니다. 또한 자신이 모든 시선과 감정을 담아낼 수 없음을 알기에 저자는 자신이 그려내는 이야기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합니다. 쉽사리 판단내리지 않고 자신의 한계를 일부러 알려주며 드러나지 않은 더 깊은 어둠이 있음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건조하게 설명되는(감정을 넣기엔 차마 짐작조차 할 수 없어 함부로 집어넣을 수조차 없는) 숱한 죽음들, 그리고 끝내 살아남은 후의 삶을 견디지 못했던 어머니의 자살. 그 ‘알 수 없음’들이 알 수 없는 상태 그대로 작품 속에서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는 오히려 그 죽음들, 그 사건들이 무게감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게 됩니다. 저자가 고백하는 자신의 한계는 이렇게 해서 또 한 번 ‘우리들의 한계’가 되며 그 한계로 인해 우리는 그 죽음과 사건들의 엄중함을 역설적으로 깨닫게 되는 것이지요.

 

 보기만 해도 정신이 다칠 것 같아 피하는 끔찍한 것들이 있습니다. 차에 깔려 죽은 비둘기나 고양이 시체 같은 것들 말입니다. 하물며 그것이 사람이라면 얼마나 큰 두려움이 생기겠습니까. 그러나 바라봐야 합니다. 외면하지 않아야 신고를 하던 검시를 하던 장사를 치르던 해야 할 일들이 생각날 테니까요. 그리고 그럴 수 있는 힘은, 그들의 문제를 내 문제로 인식하는 데에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그들과 같지 않음 또한 인식해야 합니다. 그들과 다르기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이 있으니까요. 끔찍한 비극을 피하지 않고 자신의 문제로 만들어 자신을 반성하고, 그 반성이 완벽할 수 없음마저 반성하여 한계를 가능성으로 바꾸어낸 놀라운 시도가 이 책에 있고, 높은 가치로 살아있습니다. 힘이 들더라도 끝까지 읽어보시길, 그리고 부디, 재독하시길. 이 책을 외면하는 것은 곧 자신을 외면하는 행위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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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종교 이야기 -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믿음과 분쟁의 역사
홍익희 지음 / 행성B(행성비)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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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이 세 종교 이야기이긴 하지만, 사실 이 책은 세 종교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분명 이 책에선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의 신학적 차이와 유일신에 대한 입장차를 다루는 비교 종교학적인 부분들이 존재하지만, 그보단 그 세 종교를 만들어낸 국가와 사회들 면면의 차이점을 다룬다고 해야 이 책의 내용을 더 넓게 포괄하는 말이 될 것입니다. 이처럼 종교를 만들어낸 국가와 사회를 다루기에 이 책은 각 국가와 사회의 역사서가 되기도 하고, 문화서가 되기도 하며, 당연히 종교서적이 되기도 합니다. 굉장히 다양한 분야들을 종교란 키워드를 통해 꿰어냈다고 볼 수 있는데요. 그 사실은 종교란 것이 얼마나 우리 생활방식, 사고방식에 복합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방증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그 방증대로 이 책에는 역사, 정치, 문화, 신학 등등에 종교들이 미친 영향, 그리고 각 민족과 국가의 역사적 상황을 반영한 종교의 변화 과정이 나옵니다. 거기에는 세 종교 각자의 차이점이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고요. 그러나 그러한 차이점에도 불고하고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건 모든 종교는 혼란기에 탄생했으며, 그 혼란기에 어떤 공동체를 공동체로 유지시켜주는 구심점 역할을 담당했고, 때로 그 구심점을 유지하기 위해 공동체 안 이질적인 것들을 몰아내는 배타성을 지니기도 했다는 사실이지요.

 

그 사례는 세 종교 모두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유대교는 아브라함이 수메르 문명의 문란함과 우르의 몰락을 벗어나 광야로 떠나면서 시작되었다고 쓰여 있고,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었던 순간은 로마가 수많은 군인황제의 탄생과 암살로 극도의 혼란을 겪고 있을 때였습니다. 이슬람은 유목민족들의 숱한 분쟁과 전쟁 속에서 탄생했고요. 이처럼 모든 종교는 혼란스런 사회 속 새로운 가치체계가 나타나야 한다는 필요성의 반영이라는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필요성에 대한 강조를 세 종교는 모두 노아의 방주. 예수 재림, 심판의 날 등과 같은 멸망과 구원의 스토리를 통해서 확인받고자 하는 것일 테고요. 그리고 이처럼 혼란스런 사회를 진정시키고 공동체를 묶는 구심점 역할을 하기 위해서 종교가 탄생했다고 할 때, 우리는 종교가 필연적으로 정치와 함께 결탁할 수밖에 없는 운명임을 짐작할 수 있게 됩니다. 이스라엘 왕국이 처음 생겨났을 때 12지파의 느슨한 연맹체의 분열을 막는 최후의 보루는 유대교였고, 로마가 갈가리 찢길 위기에 처한 제국의 통합성을 제고시키기 위해 이용했던 것도 기독교의 재발견이었으며, 유목민족들을 한데 묶어 새로운 국가를 탄생시키는 데 결정적 일조를 했던 것도 이슬람의 움마(이슬람 국가) 건설을 제창한 메디나 헌장과 신정일치 체제였습니다. 정치는 자신들의 권위를 높이고 공동체를 결속시키기 위해 신이란 상징을 매우 적극적으로 이용하곤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랬기 때문에 종교는 우리들에게 중요한 제도가 되어갔고 큰 영향력을 미치는 제도가 되어갔던 것이겠지요.

 

그렇지만 다시 한 번 생각해봅시다. 공동체를 결속시키는 도구라는 건, 다른 말로 하면 공동체를 무너뜨릴 위험이 있다고 판단되는 것들로부터 공동체를 지키는 도구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즉, 공동체란 이름에 어울리지 않는 이질적인 것들을 자신들 무리 안에서 밀어내는 배타적인 성격을 종교가 분명 지니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 책에서 나오는 사례를 보면 알 수 있듯, 한 종교가 국가적인 단위로 성행하고 장려됐던 시절엔 반드시라고 할 정도로 이교도에 대한 탄압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주로 위기 상황에서 더욱 심해집니다. 유대인들이 고대 페르시아의 지배 하에서 이스라엘 자치권을 다시 얻었을 때 가장 먼저 했던 일이 에스라 개혁이란 이름으로 행한 이방인과의 혼인 금지였습니다. 바빌론 민족과 피가 섞인 사마리아인에 대한 철저한 멸시도 있었고요. 기독교라고 해서 다를까요? 로마가 태양신 신앙과 기독교 신앙을 적절히 섞어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선포했을 때, 했던 일은 예수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유대인들에게로 돌리는 일이었습니다. 이슬람은 무함마드가 국가수반이 된 후 이교도의 재물을 약탈하는 일은 죄가 아니라는 교시를 내린 적이 있지요. 유대교는 민족이란 이름과 종교란 제도가 결합되었을 때 ‘혼혈’에 대한 배타가 일어났고, 기독교는 제국과 종교가 결합되면서 제국 내 ‘배반자’에 대한 배타가, 이슬람은 국가와 종교의 결합으로 인한 국가 바깥의 ‘이교도’에 대한 배타가 일어났습니다. 물론 각자의 역사적 상황에 따라 이처럼 드러난 양상은 조금씩 다르지만(유대교는 민족이 사라질 위기에서 나타난 배타, 기독교는 제국의 통합성을 위해 적대감을 하나로 모으는 배타, 이슬람은 척박한 사막의 환경 속에서 국가를 유지시킬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일어난 배타), 종교의 강력한 상징성이 그 종교가 속해있는 공동체가 위기에 처했을 때, 그 공동체를 유지시키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을 지키고자 하는 정치적 목적과 결합하면서 나타난 현상이라는 데에는 다른 점이 없습니다. 그것이 유대인들에게는 민족을 지키기 위한 혈통이었고, 로마는 제국을 지키기 위한 내부의 적이었으며, 이슬람은 국가를 지키기 위한 재정이었던 차이가 있을 뿐이었지요. 종교는 이처럼 정치에 의해 호출되거나 적극적으로 정치와 결탁하는 방식으로 자신들의 영향력을 넓힙니다. 그것이 종교가 가진 힘이겠지요.

 

그렇지만 만약 종교가 단순히 정치하고만 연관이 되었다면 정치와 함께 스러졌을 것입니다. 종교는 자신들을 유지시키기 위해 교육과 문화라는 장치를 사용합니다. 수메르 문명 때부터 학교에서 했던 일은 신을 찬양하는 노래를 가르치는 일이었다고 하지요. 유대인들은 아이들에게 히브리어로 성경을 읽는 법을 가르치고, 기독교와 이슬람도 미션스쿨 등을 통해 자신들의 교리를 가르칩니다. 이것이 하나의 중요한 키워드를 알려준다고 보는데요. 종교라는 것은 결국 ‘동일한 기억을 가진 공동체’를 만들면서 유지된다는 것입니다. 성경, 코란, 토라 등등에 나오는 일들은 사실이냐 아니냐를 떠나서 전부 기본적으로 ‘역사서’의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옛날에 이런 신성한 일이 있었고, 이를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는 것이 종교에서 가르치는 중요한 내용 중 하나가 아닐까요. 그리고 그 기억을 대물림해주기 위해 만들어내는 여러 장치들이 결국 문화로 발전하는 것이겠지요. 유대교에서 독립 때의 성화 봉헌을 기억하기 위해 하누카 촛대를 만들고, 망국의 한을 기억하기 위해 통곡의 벽에 순례하며, 이슬람에서 아브라함의 제사를 기억하기 위해 메카의 카바를 순례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처럼 종교로 이루어진 공동체는 어떤 기억들을 계속 환기시키며 유지됩니다. 유대인들의 종교 공동체가 유독 끈끈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 신에 대한 기억만이 아닌 실제라고 훨씬 더 쉽게 믿을 수 있는 자신들의 고대 민족사 전체를 종교로 신성화(구약에 나오는 성스런 얘기들이 곧 자신들의 역사 이야기이기도 하니까요.)시켰을 때 나오는 강력한 유대감이 아닐까 합니다. 그래서 같은 신을 모시면서도 각각 조금씩 다른 경전을 쓰는 것이 아닐까요? 결국 종교 공동체는 ‘어떤 기억을 공유하고 있는가’로 결정 난다면, 다른 종교와의 차별성을 위해서라도 다른 기억을 공유해야 할 테니 말이지요. 그리고 자신들의 기억이 서로 맞다고 싸우는 게 종교 간의 교리 갈등이라고 보면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해 봤습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느낀 것이 있다면, 종교에서 한 시대를 반영하는 방식은 언어가 아닌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한 시대의 정치적 주도권만이 아닌 문화적 주도권까지 온전히 틀어쥔 실세가 어디였는지는 그 시절 경전이 어느 나라의 언어로 쓰였는지를 보면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 것입니다. 유대교의 경전이 처음에는 자신들의 언어인 히브리어로 쓰였지만, 알렉산더가 제국을 만들면서 그 영향력이 그리스 역 경전으로 드러났고, 로마 제국 때는 라틴어로 쓰이는 그 과정이 세계 판도와 맞아떨어져가면서 간다고 느꼈기 때문이지요. 다른 말로 하면, 그 시대의 문화적 주도권을 빼앗아오기 위해서는 우선 언어를 정복하라는 말이 될 것입니다. 루터가 독일어 역 성경을 펼쳐내면서 종교개혁의 횃불이 밝혀졌던 것처럼 말입니다. 유대인들이 아무리 사어화된 말이라고 해도 히브리 원어가 남아있는 경전만을 경전으로 인정하고 다음 세대에게 히브리어 가르치기를 결코 포기하지 않으며 이슬람교도들이 아랍어로 된 코란만을 진정한 코란으로 인정하는 그 모든 사례들이 종교의 고유성을 지키기 위함은 공동체의 고유성을 지키기 위함이고, 이런 목적을 이루기 위한 가장 근본적인 도구는 언어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방증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는 곧 처절한 문화 투쟁의 장을 보여주는 것이지요.

 

작가는 세 종교가 갈등과 반목을 중단하고 화합해야 한다는 취지로 이 책을 썼다고 합니다. 그러나 종교는 인간이 공동체를 만들고, 이를 유지시켜온 원인까지는 아니지만, 우리들의 전쟁, 정치 갈등, 문화적 약육강식의 세계와 발맞춰 발전해온 제도, 가장 뿌리 깊은 상징이라는 생각이 오히려 이 책을 읽으면서 더욱 확실시 되었습니다. 우리는 공동체의 고유성을 보장해주는 이 ‘상징으로 이루어진 기억’을 서로 화합시킬 수 있을까요? 그 때의 두려움을 극복하고 용기를 낼 수 있을까요? 책에서 보여주는 숱한 역사적 사례들과 이를 아직도 반복하고 있는 현대사 속의 종교가 결합된 외교적 갈등들을 보며, 잠시 생각해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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