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쥐 The Complete Maus 합본
아트 슈피겔만 지음, 권희종 외 옮김 / 아름드리미디어 / 2014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두 번 다시 읽고 싶지 않은 책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두 번씩이나 견뎌야 한다는 건 너무 힘든 일입니다.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했던 시절이 내뿜는 긴장된 분위기가 어찌나 강력한지, 스스로가 만약 그 시절 그 곳에 있었다면 자살했을 것인가 아닌가를 읽는 내내 자문해봐야 하는 그 시련이 어찌나 힘든지, 그 사실들을 그저 회피하고 싶어집니다. 그러나 회피한다 해서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요. 그리고 피한다고 해서 내 안에도 있을지 모를 가해자의 본성과 피해자의 살아남기 위해 가져야만 했던 냉정함, 그 때문에 가해자, 피해자 모두에게 있었으나 영영 망가져 돌이킬 수 없어진 인간의 가능성들이 해결되는 것도 아닐 것입니다. 문제가 어렵다 해서 문제를 놓아서는 안 됩니다. 일단은 그런 일들이 세상에 ‘있었고’, ‘지금도 있으며’, ‘내 안에도 있음’을 아는 것이 첫 번째 단계가 되지 않을까 합니다. 책 안에서 저자가 “아마 모든 사람들이 영원히 죄책감을 느껴야 할 것”이란 말은 그렇게 이해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두고 볼 때, 이 책은 저자가 죄책감을 가지기 위한 시도의 기록입니다. 폴란드 국경 근처에서 살다 독일 나치 세력에 의해 갖은 위협을 받고 아우슈비츠까지 갔다가 살아남은 아버지에 대해, 저자는 기록에 그치지 않고 그 시절을 상상하며 그림을 그려 만화를 만듭니다. 만화라는 이미지를 통해, ‘쥐’라는 만화의 상징성을 통해 저자는 보다 적극적으로 그 시대를 상상하고, 대면하는 것이죠. 아버지의 이야기를 자신의 이야기로 만드는 과정을 통해 무엇이 파괴되었고, 무엇이 살아남았으며, 그와 같은 상황 속에서 인간은 어떤 모습을 띄게 되는가를 ‘아버지의 문제’에서 ‘자신의 문제’로 만든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자신의 문제’를 저자는 모두에게 공개함으로써 ‘우리의 문제’로 만듭니다. 죄책감을 가지기 위한 시도라는 것은, 이런 면에서 과거 어떤 시절의 인간이 저지른 죄에 대해 저자와 우리가 공동을 책임감을 느끼게 만들기 위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때로 어떤 죄는 인간이 저질렀단 사실만으로도, 같은 인간인 우리 자신에게도 그런 본성이 숨어있는지 안지를 의무적으로 점검해 재발을 막아야 할 만큼 끔찍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책에는 내용에 있어 어떤 단일한 메시지가 없지만(아버지의 이야기를 충실히 따라갈 뿐, 어떤 판단을 유도해내려 애쓰지는 않습니다.), 가장 큰 메시지가 있습니다. ‘직시’할 것. 즉 누군가의 끔찍한 과거를 남의 이야기가 아닌 자신의 이야기로 내면화시켜, 스스로는 과연 어떻게 했을 것인지를 자문함으로써 자신의 본성을 점검할 것. 그것이 아버지의 이야기를 ‘아버지만의 이야기’로 생각해 녹취나 기록만으로 남겨두지 않고, 이미지와 상징이라는 만화의 형식을 빌려 ‘작품’으로 만들어낸 저자의 메시지일 것입니다. 자신의 메시지를 만화라는 형식 그 자체로, 작품을 만들어낸 과정 그 자체로 웅변하고 있는 것이지요.
아마 그래서일 것입니다. 저자는 자신이 아버지를 찾아가고, 만화를 그려내는 과정 자체를 만화로 만들어 아버지의 회고 중간 중간 끼워 넣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또 다른 종류의 ‘직시’가 있습니다. ‘자신의 한계’에 대한 직시입니다. 이는 곧 저자 스스로가 고백하는 ‘작품의 한계’이기도 합니다.
정말 너무나 끔찍한 과정을 견디고 살아남은 아버지이지만, 고통을 이겨낸 사람이 꼭 아름답거나 선한 것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의 경우를 저자의 아버지는 보여줍니다. 구두쇠에, 새 아내가 자신의 돈을 뜯어가려 한다는 강박증에, 아들을 무시하며 남의 의사를 물어보지 않고 제 멋대로 행동하고(아들의 낡은 외투를 제 멋대로 버려버리죠.), 자신의 말만이 옳다고 생각하며, 무엇보다 아버지 스스로가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적 성향을 띄고 있음을 저자는 가감 없이 드러냅니다. 그리고 그런 아버지와 갈등하며 아버지와 같이 지내는 걸 무척이나 껄끄러워하는 자신의 모습도 가감 없이 드러내죠. 이것은 두 가지를 말해줍니다. 한 때 호남 형으로 여자들의 선망의 대상이었고, 극한 상황 속에서도 끝까지 가정과 자신의 아내를 책임지고자 했던 아버지가, 박해 후 자신의 내면에서 영영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고통이 인간을 절로 성숙시켜주는 것이 아니고, 또 사람을 성숙시켜주는 고통만이 세상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아버지의 망가진 모습은 과거 모습과의 비교 자체만으로 당시 고통의 정도를 짐작하게 하며, 동시에 살아남기 위해 무엇을 버려야만 했는지, 그 ‘무엇’을 버리도록 강요한 상황은 또 ‘무엇’이었는지를 질문하게 합니다. 그리고 한 번 가해진 그 ‘무엇’이 얼마나 오래가는 지도요(만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아버지는 병중에 혼미한 정신으로 아들의 이름을 리슈라고 잘못 부릅니다. 리슈는 나치 정권에 의해 잃어버려야만 했던 아들의 이름이죠.). 제가 무엇들을 굳이 특정하지 않고 ‘무엇’이라고 부르는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책을 보면 알겠지만, 단일한 하나의 탓으로 모든 책임을 떠넘기기에 우리의 비극은 너무 복잡하기 때문입니다. 그토록 간단한 일이었으면 어찌 아직까지 재발하는 비극이겠습니까. 어찌 보면 이 책은 그 복잡함을 드러내기 위해 어떤 걸 덜거나 빼지 않는 ‘있는 그대로’를 드러내는 방법을 택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하나의 책에서 그 모든 원인을 세세히 제시할 수는 없지만, 그 복잡한 원인들이 뒤섞여 만들어낸 한 사람의 모습이라는 ‘결과’는 때로 그 모든 원인을 짐작하게 만들어주는 압축된 흔적이 되기도 하죠. 저자는 그 흔적들을 자신만의 시선으로 분석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있는 그대로 드러내 우리 모두의 단서로 만들었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앞서 이 책의 메시지는 형식에 있으며, 내용은 메시지보단 ‘문제’와 ‘단서’에 가깝다고 한 이유입니다. 우리는 그 ‘단서’를 풀기 위한 우리만의 형식을 가질 수 있을까요? 얼마나 어렵든, 그것이 저자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사항일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무척이나 힘든 일입니다. 저자는 자신이 아버지에 대해 가진 ‘이해할 수 없음’을 그대로 만화에 담음으로써 그것이 얼마나 힘든지를, 그리고 그래서 이 작품이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음을 솔직히 고백합니다. 작품이 가진 한계에 대한 직시는 우선 기록의 부족입니다. 아버지가 어머니의 수용소 시절 일기를 자신이 읽기 힘들단 이유로 멋대로 태워버리는 통에, 저자는 영영 어머니의 시선으로 그 시절을 바라볼 기회를 잃어버립니다(당사자에게 직시란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저자가 스무 살 때 벌어진 어머니의 자살도 영영 그 이유를 알 수 없는 수수께끼로 남아있지요. 아버지는 자신이 봤을 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을 반복하고, 작품이 다 끝날 때까지 저자는 그 ‘이해할 수 없음’을 넘어서지 못합니다. 그리고 이를 그대로 드러냄으로써, 저자는 자신의 작품이 결코 극복할 수 없는 지점들이 있음을 의식적으로 드러냅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아무리 아버지의 이야기를 자신의 이야기로 만들기 위해 노력해본들, 겪지 않은 사람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라는 것이 있을 테니 말이죠. 이런 한계는 현재 아버지와의 갈등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이 만화로 그려내는 아버지의 이야기 자체가 저자의 한계를 알려주는 시험이 됩니다. 작중에서 저자는 이런 자신의 한계에 대한 두려움을 아내에게 털어놓습니다. 내가 도저히 상상해낼 수 없는 일들을 함부로 만화로 그려내 망쳐버리는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을 말이죠. 자신이 앉아있는 촬영장 의자 아래 많은 유대인들의 시체가 쌓여있는 장면은 죽음을 팔아 유명해진 자신을 자책하는 느낌마저 풍깁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이 자책은 참으로 치열하고 바람직합니다.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정도의 한계를 알아간다는 것은 다른 말로 완벽히 같아질 수 없는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아버지와 같은 존재일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렇기에 아버지의 한계를 자신만의 시선으로 솔직하게 그려낼 수 있었습니다. 자신의 한계를 치열하게 직시한다는 것은 이처럼 서로의 다름에 대한 직시로 이어져 자신과 타인까지 포함하는 더 높은 수준의 반성을 이끌어 내는 가능성으로 이어짐을 이 책은 보여줍니다. 또한 자신이 모든 시선과 감정을 담아낼 수 없음을 알기에 저자는 자신이 그려내는 이야기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합니다. 쉽사리 판단내리지 않고 자신의 한계를 일부러 알려주며 드러나지 않은 더 깊은 어둠이 있음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건조하게 설명되는(감정을 넣기엔 차마 짐작조차 할 수 없어 함부로 집어넣을 수조차 없는) 숱한 죽음들, 그리고 끝내 살아남은 후의 삶을 견디지 못했던 어머니의 자살. 그 ‘알 수 없음’들이 알 수 없는 상태 그대로 작품 속에서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는 오히려 그 죽음들, 그 사건들이 무게감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게 됩니다. 저자가 고백하는 자신의 한계는 이렇게 해서 또 한 번 ‘우리들의 한계’가 되며 그 한계로 인해 우리는 그 죽음과 사건들의 엄중함을 역설적으로 깨닫게 되는 것이지요.
보기만 해도 정신이 다칠 것 같아 피하는 끔찍한 것들이 있습니다. 차에 깔려 죽은 비둘기나 고양이 시체 같은 것들 말입니다. 하물며 그것이 사람이라면 얼마나 큰 두려움이 생기겠습니까. 그러나 바라봐야 합니다. 외면하지 않아야 신고를 하던 검시를 하던 장사를 치르던 해야 할 일들이 생각날 테니까요. 그리고 그럴 수 있는 힘은, 그들의 문제를 내 문제로 인식하는 데에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그들과 같지 않음 또한 인식해야 합니다. 그들과 다르기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이 있으니까요. 끔찍한 비극을 피하지 않고 자신의 문제로 만들어 자신을 반성하고, 그 반성이 완벽할 수 없음마저 반성하여 한계를 가능성으로 바꾸어낸 놀라운 시도가 이 책에 있고, 높은 가치로 살아있습니다. 힘이 들더라도 끝까지 읽어보시길, 그리고 부디, 재독하시길. 이 책을 외면하는 것은 곧 자신을 외면하는 행위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