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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란 무엇인가 - 독점계약 번역 개정판
E.H. 카 지음, 김택현 옮김 / 까치 / 2015년 3월
평점 :
이 책은 뭐랄까, "20세기의 한복판에서 19세기를 외치다" 같은 부제를 달아줘야 할 것 같은 책이다. 물론 나쁜 의미는 아니다. Carr는 그 스스로도 수차례 밝혔듯 '빅토리아 시대' 때 청년기를 보낸 영국인으로서 '인류의 끝없는 진보'라는 낙관적 가치관을 끝끝내 버릴 수 없었던 사람이었고, 그런 사람이 20세기라는 큰 절망과 회의의 시대(2차 세계대전, 핵전쟁의 위험, 냉전 등등으로 인해 '인간은 틀렸어' 같은 냉소주의가 확산됐던 시절.)를 맞닥뜨렸을 때 가졌을 법한 고민은 당연히 둘 중 하나였을 것이다. 자신의 가치관을 지킬 것인가, 아니면 버릴 것인가? Carr는 전자를 택했다. 그러나 결코 '어버이 연합'류의 똥고집을 부리는 뒷방 늙은이가 되는 방식을 택하지는 않았다. Carr가 택한 방식은 뛰어난 역사학자로서의 자기 능력을 살려 당대의 상황을 충분히 숙고함으로써 자신의 가치관을 더욱 정교하고 풍성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인류가 발전은커녕 자신들의 멸망조차 제대로 막을 수 없는 바보짓을 거듭해 벌이는 것 같은 그 순간, 어떻게 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진보한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인가? 이 책은 그 질문에 대한 Carr의 대답이다. Carr 식으로 말하면, Carr는 이 책에서 역사와 역사철학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만, 사실 자신이 몸담고 있던 60년대 영국 사회의 '현재'에 대해 증언하고 있는 셈이다.
처음은 19세기 역사학의 실수에 대한 반성에서부터 시작한다. 1장 '역사가와 그의 사실'과 2장 '사회와 개인'에서 Carr는 말한다. 19세기 빅토리아 시대처럼 "사실을 숭배하던 위대한 시대"는 갔다고 말이다. 우리는 더 이상 빼도 박도 못하는 '사실'이란 원소들이 모여 '역사'를 이룬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그 '사실'들을 열심히 모으기만 하면 반박할 수 없는 역사의 '절대 법칙'이 자동적으로 도출될 것이란 기대를 하지도 않는다. 19세기 랑케는 '그것은 실제로 어떠했는가?'라는 기치를 내걸고 수많은 역사학자들을 실증주의의 진영으로 끌어 모았지만, 실상 우리가 다들 알고 있다시피 역사는 단순한 사실의 나열이 아니다. 사실을 선택하는 과정에 이미 가치관이 개입하며, 그 사실들이 가진 중요성의 서열을 무슨 기준으로 나눌 것인가의 문제에 있어서도 다시 한 번 가치관이 개입한다. 사실 역사가가 다루는 제 1차 사료부터가 이미 객관적인 사실의 기록이 아닌 기록한 자의 가치관이 반영된 결과물이기 때문에(바이마르 공화국의 외무장관 슈트레제만과 소련의 외무장관 치체린의 회담 기록, 슈트레제만의 기록에서 치체린의 발언은 매우 비합리적인 발언으로 그려진다.), 우리는 출발점에서부터 이미 '무엇이 진짜 사실인가?'에 대한 명확한 결론을 내릴 수가 없다. 그저 자신의 가치관에 의해 역사를 재구성할 뿐이다. 사실 그러한 가치관을 통해 역사를 서술하는 역사가조차 독립된 개인은 아닌 것이다. 그는 자기가 속한 사회의 눈으로 과거를 바라본다. 그리고 현 사회가 과거를 살펴봄으로써 얻어낼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의 기준으로 역사를 서술한다. 그로트가 그리스사 연구를 통해 19세기 영국 부르주아 계급의 민주적 이상을 그려내고자 했고, 몸젠이 로마사 연구를 통해 1848년의 환멸적으로 지리멸렬했던 혁명을 비판하고 카이사르 같은 강력한 지도자가 나타나기를 바랐던 당시의 열망을 반영시켰던 사례들에서 알 수 있듯, 역사가가 '사회 안의 개인'인 한, 크로체의 말처럼 '모든 역사는 현대사'인 셈이다. 여기까지가 Carr가 지적한, 역사가가 처한 거부할 수 없는 조건이고 피할 수 없는 한계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역사가 사실에 의해 구성되느냐 가치관에 의해 재단되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가 유의미한 이유, 역사에서 여전히 '객관성'이란 걸 따질 수 있고, 따져야만 하는 이유이다. 20세기는 사회와 인류가 가진 ‘진보’의 가능성에 대해 본질적인 의문을 던지던 시기였고, 이런 사회적 분위기는 역사학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다시 말해 학문이 ‘진보’하는 것인가에 대한 본질적인 의문이 제기되었다는 것이고, 이는 앞서도 밝혔듯 사실과 진리 사이 관계에 대한 문제제기, 절대적 진리를 부정하는 상대성에 대한 강조로 드러났다. Carr가 역사학자로서 이런 사회적 분위기에 맞섰다는 것은, 결국 역사학계에서 제기된 이런 문제들에 대한 반박을 해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역사학이 가진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우리는 여전히 역사학이 그 한계를 넘어설 수 있다고 말해도 되는 걸까? Carr는 그렇다고 대답하며, 그 "그렇다"는 대답을 설명하는 장이 사실은 3~6장 끝까지의 내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가 서술하는 자의 시선에 의해 재단되는 것이라 해서, 그 어느 해석도 다른 해석에 비해 우위를 점할 수 없으며, 역사에서 의미, 법칙을 찾아내려는 시도는 헛된 것이라 보아서는 안 된다. Carr는 이러한 회의주의자들의 주장에 대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역사에서 객관성을 찾아낼 수 있다는 태도를 취하는데, 3장은 그 반박의 첫 단추라 할 수 있다. Carr는 여기서 ‘역사는 결코 과학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논지를 하나하나 반박해나간다.
역사는 정말로 과학이 될 수 없는가? 이 질문에 대한 Carr의 첫 번째 반문은 이것이다. “당신들이 생각하는 그 과학이란 것이 대체 무엇인가?” 역사에 대한 회의주의는 역사에서 절대적 법칙을 발견해낼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역사를 과학과 분리하려 했지만, 사실 절대적 법칙과 진리를 발견해낼 수 없는 것은 역사학만의 문제는 아니다. 학문을 정립하고 연구해나가는 사람들이 가진 근본적인 한계인 것이다. Carr는 자연과학계에서 전개된 진리에 대한 논쟁들을 소개하며 이를 설파해나간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이다. 앙리 푸앵카레는 ‘과학과 가설’이란 책을 통해 과학은 절대적 진리를 찾아나가는 학문이 아닌 사유의 진전을 구체화하기 위한 ‘가설’ 위에 세워진 체계이며, 증명과 수정과 반론을 통해 이 가설을 더 낫게 만들거나 바꾸거나 할 수 있을 뿐이란 주장을 했다. 그리고 이는 자연과학만이 아닌 역사학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 말이다. 역사학도 절대적 진리와 법칙을 찾아낼 수는 없지만 연구자의 가설에 의거해 자료를 수집하고 배치하며, 또 그 과정에서 가설을 수정하기도, 파기하기도 한다. 역사학과 자연과학을 완벽히 똑같이 보는 것도 우습지만, 두 학문을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보는 태도 또한 명백히 위험한 태도임을 Carr는 강조한다.
다른 주장들도 마찬가지이다. 역사는 특수하고 고유한 사건만을 다루며, 교훈을 얻을 수 없고, 예견할 수 없고, 필연적으로 주관적이며, 종교와 도덕의 문제를 포괄하기 때문에 과학이 될 수 없다는 주장들에 대해 Carr는 하나하나 이를 반박해나간다. 펠로폰네소스 전쟁과 2차 세계대전은 서로 다른 고유한 사건이지만, 둘 다 전쟁이란 하나의 테마로 묶여 연구대상이 되지 않는가? 사실 역사가가 하는 일이야말로 고유한 사건들이 가진 일반적 특성들을 찾아내는 작업이다. 또한 그러는 이유 또한 거기서 전쟁의 특징, 공통적인 전개과정, 원인과 배경 등을 알아내 전쟁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을 찾아내기 위해서인 것이다. 그리고 이는 당연히 예견을 담보한다. 언제 전쟁이 일어날지는 알 수 없지만, 어떠한 상황에서, 어떤 요소들이 결합했을 때 전쟁이 발발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을 예견함으로써 우리는 그것에 대비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또한 더 이상 자연과학에서도 예전의 경험주의적 인식론 모델을 채택하지 않는 상황에서 역사학에 대해서만 주관성의 잣대를 다르게 들이대는 것은 온당치 못하며, 종교와 도덕은 이를 역사의 인과관계를 설명하는 이론의 ‘대상’이 아닌 ‘요소’로 받아들이려는 태도만 조심하면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절대적 진리와 법칙을 찾아낼 수 없다는 것이 곧바로 모든 해석의 평등성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역사에도 과학적 성격이 분명히 존재하며, 따라서 우리는 역사에 대한 연구들 중 ‘더 나은 연구와 해석’이란 걸 가려낼 수 있다. 이것이 Carr가 역사에 과학적 성격을 부여하면서 암시하고 싶었을 주장일 것이다.
이 암시는 4장과 5장에서 본격적인 주장이 된다. 그렇다면 역사에선 무엇이 더 나은 연구와 해석인가? 그것을 가려낼 수 있는 기준이란 것은 무엇이 될 것인가? 이 질문 앞에서 당시 역사학자들은 두 가지 퇴행을 보였다. 그딴 건 없고 역사는 우리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우연에 의해 좌우되며 거기서 어떤 의미를 도출해내는 것은 헛짓거리라는 냉소, 혹은 역사 안에서, 즉 인간 안에서 어떤 의미나 희망을 보지 못해 역사가 가지는 의미는 역사 밖의 신이나 우리가 알 수 없는 절대적 법칙에 의해 좌우된다고 보는 신비주의. Carr는 이들 앞에서 여전히 이성의 힘을 말하며 ‘더 나은 인관관계에 대한 설명’이란 기준을 제시한다.
여기서 Carr의 ‘담배 사러 간 로빈슨을 치어 죽은 브레이크 고장난 차의 사례’가 나온다. 브레이크 고장난 차가 마침 담배를 사기 위해 길을 걷던 로빈슨을 치어 죽였다. 우리가 기록하고 전해야 하는 것, 그 사고를 일으킨 가장 중요한 원인은 무엇인가? 그 차가 브레이크가 고장 났다는 사실인가, 마침 로빈슨이 그 시각 담배를 사러 가고 있었다는 사실인가? 역사에서의 우연을 주장하며 특정한 사실에 우위를 두지 않는 사람에게 두 사실을 모두 똑같이 보이겠지만, 우리는 통상적으로 브레이크가 고장난 차가 그 사건에 더 큰 원인을 제공했다고 생각한다. 브레이크가 고장난 차에 집중할 때 우리는 그것을 고쳐야 한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고, 그렇게 앞으로의 사고를 예방할 수 있지만, 마침 로빈슨 씨가 담배를 사러 가고 있었다는 그 순간의 ‘우연’에 집중할 때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 하나의 사건만을 따졌을 때 원인의 경중을 나누기는 쉽지 않을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대개 하나의 사건을 기록하는 이유는 그 기록을 통해 ‘더 나은 상태’를 만들고자 하는 목적을 가지기 때문이며, 그 목적을 충족시킬 수 있는 원인들-우리가 개선할 수 있고 통제할 수 있는 사안들-을 집중해 관찰하여 인과관계를 설정한다. 따라서 Carr의 기준에 따르면, 역사학에서 ‘더 나은 해석’이라 부를 수 있는 역사적 해석, 그리고 ‘더 객관적’이라 부를 수 있는 역사적 해석은 이 같은 목적을 가장 효과적으로 충족시켜줄 수 있는 인과관계를 발견해낸 해석인 것이다.
그렇다면 그 목적이 뭐냐는 질문이 당연히 나오게 된다. 그리고 바로 이 부분에서 막힘없이 자신의 논지를 펼쳐나가던 Carr의 주장이 잠시 머뭇거리는 모습을 보이는데(내 생각에는), 목적이 있다고 주장하는 순간 역사를 추동하는 힘이 역사 바깥에 있다고 주장하는(신이건 세계정신이건 뭐건 간에) 사람들과 자신을 구분할 수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목적이 없다고 주장할 수도 없다. 목적이 없다면 지금까지 자신이 펼쳐나간 모든 논지는 헛소리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고심 끝에 Carr는 역사에서의 목적을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고 뭉뚱그린다. “인간 잠재력의 부단한 발전”이 곧 역사의 목적이며, 이 보편적 목적을 이루기 위한 구체적인 목적들은 그때그때의 역사적 과정마다 생겨나는 것이라고 말이다. 인간의 목적은 인간이다. 대충 이런 멋있는 말로 요약할 수 있는 주장일 것이다. 그리고 Carr는 마지막 장 ‘지평선의 확대’에서 당대의 암울한 분위기를 비판하며(세상의 진보가 끝났다는 주장이 제 1세계를 중심으로 나오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라, 그건 우리의 오만이다. 우리의 역할이 끝났다고 인류의 진보마저 끝난 건 아니다. 제 3세계의 약진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가. 우리는 여전히 발전하고 있고, 그 발전을 선도하는 역할이 우리 손에서 떠났을 뿐이다. 그야말로 지평선의 확대인 것이다. 이게 이 장의 주장이다.) 여전히 우리는 발전하고 있다는 희망으로 끝을 맺는다.
사실, Carr의 머뭇거림을 별로 봐주고 싶은 생각은 없다. Carr는 여전히 이성으로 법칙을 발견해내리라 믿던 시절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 역사에서의 객관성을 옹호하려다보니 어쩔 수 없는 측면도 있었겠지만, ‘인간 잠재력의 부단한 발전’이란 말은 너무 막연하고 추상적이다. 인류가 무한히 발전할 수 있으리라고, 잠재력이 무한히 계발될 수 있을 거라고 누가 단언하고 예측할 수 있는가? 그리고 그걸 또 누가 증명해낼 수 있을 것인가? 법칙이 될 수 없는 것을 법칙처럼 이야기하는데 Carr는 너무 많은 공을 들인다. 그러다보니 너무 막연한 목표를 너무 확실한 단언으로 말해야 할 때 생기는 머뭇거림이 나타나는 것이다.
차라리 그건 법칙이라기 보단, 놓을 수 없는 희망이라 보는 것이 더 맞을 것이다. 그리고 그게 Carr의 본심에 더 가까운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역사학의 객관성은 ‘인간 잠재력의 부단한 발전’이란 목적에 입각해 최대한 그 목적을 실현하는데 도움이 되는 인과관계들을 얼마나 많이 찾아낼 수 있는가에 달려있다.” 뭐 대충 이런 유의 딱딱한 문장을 좀 더 솔직하게 이렇게 바꿔보면 어땠을까. “그래, 너희 말대로 아무 의미도 없는 게 세상일지도 몰라. 그리고 그 나물에 그 밥으로 살아야만 하는 게 인간일지도 몰라. 그래도 있잖아, 우리는 여전히 아이를 낳고, 사랑을 하고, 친구를 사귀며 살아가잖아. 왜 그러는데? 다 끝난 세상이라면서, 그 말을 하는 사람조차도 똑같이 아이를 낳고, 사랑을 하고, 친구를 사귀며 살아간다고. 그게 인간이야. 가장 깊은 절망 속에서도 결국엔 행복하기를 바라는 게 인간이고, 행복해지리라 믿으며, 지금보다는 더 나은 미래가 있을 거라 믿으며 살아야 하는 게 인간이라고. 그 믿음이 있기 때문에 아이를 낳고, 사랑을 하고, 친구를 사귀며 살아가는 거야. 그 믿음이 철저히 깨져버린 인간은 결국, 죽는 길밖에 다른 길이 없어. 우리가 살려면, 인간이 살려면 ‘세상은 더 나아질 수 있다.’는 믿음을 계속해서 행동에 옮겨야 하는 거고, 그래서 그런 인간이 만들어낸 학문인 역사학은 인간에게 그 믿음을 제공하고 행동을 제시하는 임무를 저버릴 수가 없는 거야...” 사실 Carr가 쓰고 싶었던 말은 이런 게 아니었을까. 적어도 나는 그렇게 느꼈다. 책의 문장 중간 중간에서 그런 인상을 받았으니까. 우리 사는 세상, 힘들다. Carr가 살던 1960년대는 그래도 세상에 다시없을 거라 말해지는 경제 호황이라도 있었지, 우리는 호황은커녕 이제 만성이 된 불황 속에서 조금씩 말라죽어가는 기분을 느끼며 살아간다. 그래도, 악으로 깡으로 ‘세상은 더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을 놓지 말자. 그래야 우리가 살 수 있는 거니까. 책 한 권까지 써가며 희망을 놓기를 거부했던 Carr처럼 말이다. 내게 이 책은 그래서 학술서적이 아닌 그저 좋은 선배의 따듯한 격려처럼 느껴졌다. 누군가와 함께 이 책을 읽으며 그 ‘희망에 대한 믿음’에 대해 이야기 나누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