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는 존재 자체로 낙인이었어
오현세 지음 / 달콤한책 / 2022년 12월
평점 :
품절


*본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남녀가 서로 혐오하는 사회적 현상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언제부터인지 어디서 시작된 것인지 처음을 찾을 수는 없지만, 이대로 현상 유지된다면 그 끝은 결국 분열밖에 되지 않는다. 서로의 존재가 사회에 필요한 존재임을 알면서도 미워하고 증오하며 때로는 혐오까지 하는 이러한 일들이 발생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도서 여자는 존재 자체로 낙인이었어의 저자는 이러한 이유로 '서로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화성에서 온 남자와 금성에서 온 여자라는 말처럼 같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서로에게 이해하기 힘든 도통 이해가 안 되는 존재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어느 한쪽만이라도 이해를 한다면 얕은 수심을 반이라도 채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저자는 이해의 실마리를 그림문자 '여(女)'에서 찾았다.


중국 전한의 회남왕 유안이 저술한 책인 <회남자>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있다.

 

 

<회남자(淮南子)>


한자를 만들었다는 '창힐'이라는 사람에게 어느 날 여자 귀신들이 몰려와 화를 냈다. 그 이야기를 들어보니 왜 나쁜 뜻을 가지고 있는 한자에 여(女)를 사용한 것이 많냐고 억울함을 호소했다. 창힐도 생각해 보니 시기와 질투를 뜻하는 시기할 질(嫉)에는 여자가 들어있고, 혐오라는 단어 속 싫어할 혐(嫌)에도 여자가 들어 있으며 아첨할 미(媚)에도 여자가 있고 종, 노예를 뜻하는 종 노(奴) 자에도 여자가 들어 있었다. 창힐은 여자 귀신들의 말에 뭐라 반박할 수 없었다. 정말 나쁜 의미의 글자들에 여자가 들어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창힐은 좋은 의미에 글자에도 여자를 사용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한자가 아리따울 교(嬌), 묘할 묘(妙), 예쁠 주(姝), 등이이다.

 

여(女)를 사용해 좋은 글자를 만들겠다고 약속한 창힐이 만든 글자를 보면 여자를 바라보는 모습은 사뭇 좋은 뜻으로 사용되었다고 말하기가 어렵다. 칭찬을 한다고 좋은 의미가 아니듯이. 여성을 바라보는 그 모습은 아름다워야만 하는 존재로 남자를 유혹해 파탄으로 이끄는 존재 정도로 그 인식을 가둬두고 있다. 여자는 아름다움의 존재로 살아가야 하며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면 여자의 언행을 문제 삼아 2차 가해가 이어지는 등.. 이러한 인식은 현재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어머니를 통한 생명 탄생, 모계 사회로 출발한 인간 사회는 부족 간의 다툼이 심화됨에 따라 남성이 가지고 있는 '힘'의 중요도가 높아졌다. 남성이 많이 존재하는 부족은 그만큼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승률이 올라감을 뜻했다. 부족사회의 존립이 남자의 힘에 의해 좌우됨에 따라 아들의 태어남은 길함으로 뜻했고, 딸의 태어남은 불길함이 되었다. 또한 아들은 가문과 대를 이어받아야 할 장손으로 딸은 출가외인으로 여겨졌다. 딸은 금지옥엽으로 키운다 할지라도 열 살이 좀 넘으면 다른 곳으로 '시집'이라 하는 시부모가 사는 집 혹은 남편이 살고 있는 집에서 살게 되고 한번 부모의 손을 떠나면 평생 언제 다시 얼굴을 볼 수 있을지 알 수가 없다. 남편이 죽는다면 따라 죽거나, 시집 귀신이 되어 시가에서 여생을 살아가는 것이 일반적이었기 때문이다.

 

 

딸바보

 

 

흔히들 딸을 사랑하며 아끼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딸바보'라는 명칭을 붙여준다. 그러나 엄마가 딸을 사랑하는 것을 보고 '딸바보', '자식바보'라는 말을 하지는 않는다. 이런 아이러니함을 이 책을 읽고 나서야 알게 됐다. 어머니라는 단어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당연하게 느끼는 단어가 있다 그건 바로 '모성애'이다. 어머니에게 자식은 당연하지만 아버지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일반적이지 않다는 것일까? '딸바보'라는 것이 이상한 말이라는 걸 이제야 알았다. 남녀를 떠나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건 마찬가지인데 말이다.

 

 

 

 

그렇다면 딸 바보라는 개념은 어떻게 나왔을까? 저자는 딸과 아버지의 관계는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와 달리 위협적이지 않기에 아들보다는 딸을 본능적으로 좀 더 애정을 주게 된다고 한다. 아버지와 아들은 암묵적인 영원한 라이벌이라고 한다. 동물의 세계에서도 아들 사자가 늙은 아빠 사자를 쫓아내거나 아빠 사자가 수컷 새끼 사자를 잡아먹는 일이 있다고 한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성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면 사람도 자신의 아버지를 라이벌처럼 여겨 아버지를 뛰어넘는 무언가가 되고 싶다고 말하거나 아버지의 삶을 통해 자신의 삶을 돌아보거나 성장시키고자 하는 경우를 종종 본다. 이는 아버지와 아들이 라이벌, 경쟁해야 할 상대로 보고 있음을 알게 해주는 대목이었다. 참 신기하다. 딸바보라는 말이 갖고 있는 인간의 심리 그리고 사람의 관계성까지.

 

 

 

 

도서에서는 한자를 통해 여자, 어머니, 딸, 며느리 등.. 한 성별의 삶이 어떠했는지를 이야기해준다. 오랜 시간 동안 이어져온 여자에 대한 잘못된 인식과 문화가 갑자기 21세기 들어서 그것도 단 몇 년 만에 종식되었다는 말은 믿지 않는다. 다만 지나간 역사와 현재를 보면서 남녀가 서로를 이해하면서 고쳐나갈 수 있는 부분들이 있다는 것에 희망을 본다. 본 도서 서문에는 인간의 구성원 반쪽만을 다뤘다는 아쉬움이 담겨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남자가 바라본 여자는 많았으나 여자가 바라본 남자 그림은 없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럴 것이 오랫동안 여성이 글을 쓰고 작품을 남기며 예술 활동을 한다는 것 자체가 용납되지 않았다. 그로 인해 여자가 남자를 어떤 관점으로 인식하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었다. 오랫 시간 침묵되어 왔던 이들의 발자취가 빛을 볼 수 있는 연구들이 많이 이뤄졌으면 좋겠다. 도서. 정말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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