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가 있는 곳에는 빈곤이 있다.
라는 말로 시작하는 발전되는 사회가 가져다주는 진보 속에 가난과 그 부작용들이 등장하는데
이는 앞서 말한 생산력은 증가하지만 이러한 국가적 생산과 발전은 노동자 계층의 부담을 덜어주거나 가난을 근절시켜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를 보고 개발도상국에서 일하고 있는 어린 노동자 계층이 생각이 났다. 어린아이들은 근로기준법을 적용받지 못함과 동시에 어린아이가 감당하기 어려운 혹독한 노동환경과 업무 강도에 시달린다.
생산력을 충분히 극대화할 수 있는 시대에 들어섰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그러한 공장에 어린아이들의 노동력이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어린아이들을 통해 이루어낸 엄청난 부는 이 아이들에게 돌아가는 것이 아닌 자본가의 부를 축적되는 것에 노동력이 사용되고 있다. 저자 헨리 조지는 이러한 점을 지적했다. 노동은 자본에 의해 유지된다는 명제와 달리. 부의 풍요는 결국 가장 낮은 노동자의 계층까지 내려가지 않으며 이는 노동자가 생활하기 위해 사용되는 생계비가 자본에서 나오는 것이 아님을 시사한다. 생활하기 하기 위해 필요한 의식주의 비용은 노동으로 인해 충당되지 못해. 가난을 끊지 못하는 것이다. 과거 1878년 9월에 발간된 '19세기'라는 잡지에서 인도의 사람들을 황폐하게 만드는 기근에 대해 " '재정적 어려움에 의한 기근이다."라고 말했다. 노동자의 계층에게 더 많은 세금을 걷어 사람들이 음식을 살 수 있는 충분한 돈을 저축하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었다. 이 부분에서 이상하게 우유나 라면이나 각종 식품에 대한 가격을 단합하고 상승시켰던 기업들의 만행이 떠올랐다. 또한 과일의 가격도 다른 국가에서 판매하는 과일들의 가격들 보다 비싸다는 생각이 들었던 만큼. 상승하는 식품의 가격을 잡는 것이 낮은 계층의 소득을 증가하는 일이 될 수 있음을 깨달았다. 빠른 성장을 이룬 문명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부의 불평등과 빈곤은 존재한다. 이를 위해서 많은 고전들이 존재하지만 이를 조금씩 실현시키며 바꿔나가기에는 부를 향한 독점적 욕망이 너무 큰 것 같아 안타깝다. 그러나 포기하고 싶지는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