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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스의 종말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10월
평점 :
한병철 저 '에로스의 종말'을 몇 달에 걸쳐―아니 사실은 몇 달 전에 포기했던 걸 간만에 붙잡고, 다 읽어냈다. (한동안은 중간에 읽다 말았던 책들을 매듭짓는 데 시간을 보내야겠다.) 4장에서 6장까지의 논의는 추후 다시 독해하는 편이 좋겠지만, 7장에서 에로스가 사유의 선험조건이자 핵심이라는 주장을 밀고 나가는 데서 전율을 느꼈다. 한 자 한 자 숙고하며 읽던 책인데(거진 모든 책을 그렇게 읽지만) 그 맹렬한 추동을 따라서 7장은 열렬히 읽어나갔다. 역시 막판에 가서 총성을 질러대는 것이 멋있는 법...
책에 서술된 '에로스' 개념은 내가 작년 무렵, 철학에 관심을 가지게 된 사건과 비슷한 맥락이 있다. '그는 어느날 갑자기 나를 찾아와서는 새로운 세계로 이끌었다.' 헤겔의 '정반합' 개념처럼 나는 어떤 근원적 '진, 선, 미'에 대한 희망을 품게 됐고(쉽게 말하면 믿음이 들어 온 게다. 아브라함 계통의 인격신 개념이 배제된. 그래서 내가 가톨릭에 쉽게 친화될 수 있었다.) 여느 인문주의자들처럼 세계를 '구조적인 관점에서 바라보게 되었다. 이른바 사유의 힘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뿐이었다. 나는 금새 질려버렸고(에로스는 식었고 'Cupid's Dead'), 새로운 데이터를 동화해내지 못한 스키마는 점점 말라 죽어갔다. 일련의 시기를 거쳐, 결국 지금에야 가까스로 경종을 울리기는 했다.(잘 울렸는지 아직 가늠하기는 어렵지만), 그런데 그때의 이성은 지금에 와서 일정 때묻고, 다듬어졌겠지만(어느 방향으로든) 그때의 '에로스'는 여전한가. 그 열망을 재생산하기에 나는 여전히 순수한가. ...이것은 실존적 물음이다.
목표가 더 구체화되고 있다. (좋은 징조) 우선은 문해력이 절실하다. (나는 너무할 정도로 이 부분에 약하다.) 다음은 작문력. 정확히는 내 사유를 포착(capture)하고 텍스트를 기록해내는 일련의 과정에 해당하는 능력들이 필요하다. '결국 기표에는 다 드러난다.' 이것을 게을리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이것들을 지탱하는 에로스적 열망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겠지.
타자와의 생동하는 관계를 사유 속으로 끌어들이는 '용기'가 필요하다. 이것은 '에로스'에서 시작하는 사유. '사유'로 시작하는 에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