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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낙엽
토머스 H. 쿡 지음, 장은재 옮김 / 고려원북스 / 2013년 1월
평점 :
* 결말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아직 네가 '아이'라 불렸을 때, 너는 질문지를 앞에 두고 망설인다. 질문의 끝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이다. 혹은 누구냐는 물음이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너는 그 안에 무얼 써넣어야 하는지를 몰랐다. 그러나 남들이 무엇을 쓸지는 알았다. 따라 쓰려 해보았으나 거기 멈춰선 채 너는 한참을 망설이고 있다. 다른 이들은 모두 가족을 쓸 것이었다. 그들이 가족을 정말로 제일 소중히 여기지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어쨌든 그들이 그렇게 썼다는 것이 중요했다. 너는 물론 가족을 사랑한다. 가족도 너를 사랑하며 그들은 네게 가장 중요한 사람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과 소중한 것은 다르지 않던가. 소중히 해야하는 것과 소중한 것이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 것처럼.
가족사진은 언제나 거짓말을 한다.
너는 가족 사진을 지갑에 넣은 적이 없다. 어차피 꺼내보지 않을 것을 아는데 부러 갖고 다닐 필요가 있느냐고 생각했던가. 아니면 마음에 드는 적당한 사진이 없어서일지도 모른다. 아니, 너는 한 번도 지갑에 어떤 사진도 넣은 적이 없다. 열일곱 소녀처럼 친구들과 찍은 사진을 넣지도 않았고 스무살 계집애처럼 애인의 사진을 넣지도 않았다. 네 지갑은 어딘가 황량했고 휴대폰 사진 폴더 또한 다르지 않았다. 너는 사진을 믿지 않았다.
아니면 사진을 불편해했다. 너는 사진이 증명할 수 없는 것이 너무나 많다고 생각했다. 또는 사진은 너를 증명하기에 적합한 도구가 아니라고. 너는 사진을 싫어했다. 열 두살 아이처럼 네가 네 생각에서만큼 예쁘지 않다는 것에 실망해서도 아니고 열 다섯 아이처럼 얼굴에 뭔가 묻지 않았을까 표정이 이상하지는 않을까 과민해서도 아니고 열아홉 졸업사진처럼 억지웃음을 짓고 어울지지 않은 어설픈 화장을 하고 있어서도 아니다. 너는 사진을 믿지 않았다. 연예인들의 사진이 아름다운 것은 그들이 아름답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들이 '남들에게 보여지는 나'에 익숙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라고 너는 믿었다. 너는 네가 예의에 어긋나지 않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면 누구도 너를 바라보지 않을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래서 너는 너를 알고 있는 사람이 네가 아는 숫자보다 항상 많다는 것에 늘 놀랐다. 너는 '남이 보고 있는 나'를 꾸미는 사진이 불편했고 사진과의 접촉을 최소화했다. 그런 네게 사진이 없다는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다. 가족사진 마저도.
아니 네게도 가족사진이 있었다. 초등학생과 고등학생 때 한 번씩 찍은 사진. 그 속에 찍힌 다른 가족들의 얼굴은 네가 알고 있는 것들이라 너는 멈칫한다. 그렇다면 그들도 여기에 박힌 내 얼굴이 익숙한 것인가. 너는 정말 이런 표정을 짓고 있었나. 너는 어색하게 웃고 있었다. 자 웃으세요, 라는 말에 순간적으로 만들어낸 얼굴일 것이다. 경직된 밝은 표정, 건조한 웃는 얼굴. 너는 갖고 다니거나 액자를 만드는 대신 편지가 담긴 상자 속에 던져뒀다. 아마 지금도 거기 어디 있을 것이라 너는 생각했다.
붉은 낙엽이 떨어진 마당위에 솟은 저택. 르네 마그리트의 유명한 그림 <빛의 제국>을 떠올린다. 명백한 부조리를 드러내는 그 그림과 이 표지는 결코 닮지 않았지만 유사한 감정을 일으켰다. 지층 밑에서 올라오는 냉기 비슷한 불온함이라는 느낌. 너는 때때로 자신이 픽션 속에서 사는 것으로 혼동한다. 그러지 않고서야 살인이 이토록 가볍고 쉽게 하나 건너 하나에 그것도 현실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묵인하기가 힘겨웠다. 너는 더 이상 웬만한 소식에 놀라거나 얼굴을 찌뿌리지 않았고 가끔은 네 자신의 무덤덤에 가벼운 혐오감을 느낀다. 이건 실종사건, 그것도 소설에서의 사건이다. 그러나 너는 이따금 가볍게 입술을 깨물거나 혀를 찬다.
나는 다른 부모들이 그들의 자녀가 끔찍한 짓을 저질렀을지도 모른다는 소름 끼치는 가능성을 부정할 방법을 찾는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예전에는 부모들이 자식의 결백에 대해 맹목적인 믿음을 표현하는 것을 보고 놀랐었다. 하지만 갑자기 레오가 몸을 돌려, "키이스가 집에 돌아왔을 때 자넨 깨어 있었는가?" 라고 내게 물었을 때, 나 역시 그들과 다를 게 없는 부모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의심의 냉혹한 물결들 되돌리기 위해서는 무슨 말, 무슨 짓이라도 할 용의가 있는 부모 말이다.
지나친 확신은 언제나 지나친 부정에 대한 반증. 그것이 부모라면, 부모가 자식을 결백하게 여긴다면 그건 믿음이 아니라 사랑이다. 결코 의심해선 안 되기에 감히 확신한다고 너는 생각한다. 한 소녀가 사라졌고 마지막으로 소녀와 함께 있었던 것은 자신의 아들. 그 아들은 자신에게 크거나 작은 거짓말을 하고 있다. 그(에릭 무어)는 -어떤 의미에서든- 아들을 불신하지만 아들을 의심하지 않는다 자위하며 확신하는 척 믿는다. 불신은 작고 가녀린 불꽃의 씨앗. 허나 씨앗이 작고 여리다 하여 그 생명력이 약하다거나 가지가 적거나 줄기가 튼튼하지 않은 법은 아니다. 그는 자신이 자신의 생각보다 자신의 아들을 잘 모르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혹은 이제야 깨닫는 척 한다. 누군가를 잘 모른다는 것.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이렇게 중대한 상황에서? 그것도 내 아들을? 그는 절망한다. 그러나 본디 가족이란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고 인정한다. 자신은 이미 실패한 첫 번째 가족의 구성원이 아니던가.
결국 고발은 증거가 있어야만 한다. 의심만으로는 아무것도 파괴할 수 없다. 아니, 의심만으로도 파괴할 수 있지 않을까?
이전까지 나는 그 말이 얼마나 진실에 가까운지 전혀 몰랐다. 아주 미세한 의심의 냄새가 어둠을 몰아오고 점점 더 위협적인 것으로 변하면서, 실제로 일어난 일이 무엇인지 찾아내겠다는 욕구 하나에 당신을 고정시키고, 얼마나 끈질기게 당신을 앞으로 몰아붙이는지 말이다.
그는 아들을 의심한다. 그러나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고 스스로를 확신시킨다. 유일한 같은 편이라고 여겼던 아내조차 어쩐지 이상하다. 하지만 아내마저 잃은 채 그는 이 싸움을 끝낼 자신이 없어 다시 침묵한다. 형을 바라본다. 과거로 회귀한다. 총명하고 사랑스러웠던 고작 일곱 해 밖에 살지 못했던 여동생, 고압적이고 허세 넘치는 아버지, 그런 아버지 옆에서 조용히 시들어가던 어머니, 늘 모자르고 한심했던 형, 가장 많이 배웠고 가장 냉정하던 그러나 지금 제 가족을 믿지 못하는 자신. 사라진 소녀는 이제 계기에 불과하다. 그런 일만 아니었다면 나는 이대로 내 삶을 잘 유지했을 거야, 라는 것은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언제고 변질될 수 있는 삶이기도 하다는 말이라고. 너는 다소간 냉정하게 판단한다.
당시에 나는 그 희망은 정당화될 수 없는 환상이고, 그리 오래 버틸 수 있는 문제도 아니라는 점을 알았어야 했다. 그때 이후로 나는 인생의 절반은 부정이며, 우리가 사랑하는 것들에서조차 우리를 지탱해주는 것은 우리에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못 본 체 하기로 결정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는 진실이라 불리는 것으로 걸어간다. 껍질을 천천히 벗겨내 하나하나 들어갈 때마다 그는 자기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은 얼마나 하찮은 것인가를 깨닫는다. 소녀의 실종은 아들의 인생을 바꿨고 가족의 향방을 바꿨고 에릭을 에릭의 두 개의 가족 모두를 끝끝내 절단냈다.
그게 사실일 수 있을까? 나는 의아했다. 내가 어머니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게 사실일 수 있을까? 혹은 아버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건? 워렌에 대해선 어떤가? 함께 자라났음에도 불구하고 형 역시 본질적으로 수수께끼로 남아있는 건 아닐까?
"난 당신이 어떻게 어느 누구라도 속속들이 안다고 장담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어."
예컨대 너와 네 남동생. 너는 그와 퍽 사이가 좋지만 친하진 않았다. 너는 시간관념이 투철했고 예민하다못해 냉철했지만 동생은 즉홍적이었고 두루뭉술하다 못해 때론 흐리멍텅했다. 너는 동생의 교우관계에 관여하지 않았고 동생은 너의 취미에 관심이 없었다. 너는 동생의 안목을 가르치려 들지 않았고 동생은 너의 취향에 간섭하려 들지 않았다. 너는 동생과 같은 유전자를 공유했고 피를 나눴고 한 부모 아래 자랐지만 강과 호수 정도로 달랐던 셈이다.
너는 그것이 이상하지 않았다. 너는 늘 가족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도 얼마간 그것을 알았다. 너는 그들이 너를 선택하지 않은 것처럼 너도 그들을 선택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죄책감이 없었다. 아버지의 약점과 어머니의 단점, 형제의 닮은 점과 다른 점을 인지하는 것이 그렇게나 잘못일까. 약점이라면 모른 척 할 수 있고 결코 손대지 않을 것이지만 그것이 단점이라면 무조건 덮어둬야 하고 볼 수 없어야 하는가. 사랑과 믿음의 강도가 늘 같지 않음을, 인간은 다른 인간에게 비열해지거나 비겁해질 수 있음을.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견뎌야 하는가. 당신은 나를 몰라, 그러나 나도 당신들을 모르지. 가족이라고 가족이기에 어떻게 다르겠어. 너는 가끔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너는 가끔 믿기지 않게 순진했다.
마치 우연한 이중노출에 의해 한 사진의 색깔이 다른 사진으로 번지는 것처럼, 한 가족의 역사가 어떤 식으로 다른 가족을 물들이는지를 묘사하고 싶다. 너는 그 과정을 드러내 보이고 싶지만, 지금은 내리는 비를 하염없이 바라보면서, 비에 흠뻑 젖은 우산 아래 서 있는 사람들을 지켜보면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어떻게 했으면 그 일을 피할 수 있었을까? 그 일을 멈추게 하기 위해 너는 무슨 일을 할 수 있었을까, 혹은 적어도 생명이 계속 이어져 균형을 찾고, 추락한 자만이 아는 지고한 지혜에 도달할 수 있는 방향으로 그 일을 바꿀 수는 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네 머릿속의 바퀴들이 회전하기 시작한다, 너는 그 바퀴들이 도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할 일은 아무것도 없고 오직 그 바퀴들이 견인력을 가질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다. 그러다가 사전 경고도 없이 바퀴들이 견인력을 갖게 되고, 너는 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계속 진행하는 것뿐임을, 정확히 네가 중단했던 곳에서 시작하는 것뿐임을 이해한다.
이 소설이 갖는 강점이 유려한 문장에 있었다면 최대점은 결국 아무것도 없었다는 것이다. 에릭은 아버지로서 아들을 의심하고 아내를 의심했다. 아들로서 형을 의심하고 어머니를 의심했으며 아버지를 의심했다. 하지만 자신의 아들은 사라진 소녀의 실종에 결코 관여하지 않았고 그저 외롭고 방황하는 어린아이였음을 알게 된다. 아내의 외도, 형의 부정(不正), 아버지의 계획과 어머니의 절망에 대해서는 단서만 언급된다. 어쩌면 모두 사실일 수도 사실이 아닐수도 있다. 몇몇 것은 사실이고 몇몇은 아닐지도, 어떤 것은 밝혀지고 어떤 것은 숨겨졌을지도 모른다. 세상에 절대적인 진실이란 없다고 너는 생각한다. 관건은 의심과 믿음의 팽팽한 줄 어딘가에 위치한다. 에릭이 의심한 것이 타인이었다면 그는 어떤 결과에서든 상처받지 않았을 것이다. 타인에 대한 의심과 믿음의 줄은 헐겁거나 느슨하기 마련이니까. 그러나 에릭은 완벽한 가족을 꿈꿨고 믿음에 대한 완전함을 꿈꿨다. 그가 의심한 것이 가족이었기에 그는 무너진다. 붉은 낙엽이 우수수 떨어지는 공허한 저택 속에서.
이제 너는 생각한다. 에릭은 불행의 신의 시험에 든 가엾은 운 없는 자일 뿐이라고. 가족은 의심할 수도 의심스러울 수도 있는 거라고. 누군가를 완벽하게 안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그것이 가족이라도, 때로는 가족이기에.
가족 사진은 종종 거짓말을 한다. 너는, 가족을 모른다.
덧) 제목이며 방식이 정이현 씨의 소설과 겹쳐지는 것은 우연. 쓰면서 떠올리지 않는 것은 아니나 그 소설은 읽지 않은데다 이 소설에 또 다른 전개에도 '너는'의 방식이 등장해, 거기에 비춰 써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