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Q84 3 - 10月-12月 1Q84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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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

 

무라카미 하루키. 활동 중인 일본 작가 중 가장 유명하고 많은 팬층을 거느린 작가. 실제로 국내에서도 수많은 이들이 그를 가장 좋아하는 작가로 뽑기를 서슴치 않는다. 그는 대개 풀네임이 아닌 ‘하루키’라고 불린다. 그는 유명한 작가이고(출판계의) 흥행보증수표이며 하나의 아이콘이다. 그러니 하루키를 읽는다, 는 것은 단순히 한 작가를 선호한다는 것과 조금 다르다. 그것은 젊고 이질적이고 쿨하고 세련된 문화나 문학을 향유 한다는 혹은 그 정도의 안목을 갖추고 있다는 말과 유사하다. 그가 매일 달리기를 하고 스파게티와 맥주, 와인을 좋아하며 재즈광이자 철인 삼종 경기에 출전한 경험과 재즈바를 운영했던 적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도 많다. 종종 하루키로 인해 달리기나 재즈에 몰두하게 되었다는 사람들도 있으니까. 이들은 하루키를 경애하고 사랑하고 몰래 짝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밝히듯 쑥스럽게 그러나 자식 자랑을 하듯 자랑스럽게 그의 이름을 말한다. 하루키와 재즈, 하루키 에세이, 하루키 여행집, 하루키 문학 연구, 그에 대한 책들도 참으로 방대하다. 아아, 모두가 하루키를 사랑한다.

 

나 역시 그를 좋아한다, 아마도. 하지만 한 번도 그에 대한 애정을 드러낸 적이 없다. 왜였을까. 다른 이들처럼 그에 대해 제법 잘 알고 있고 그가 쓴 거의 모든 책을 읽었는데. 내가 읽기도 전, 미처 존재를 알기 전, 판단하기도 전 그가 ‘이미’ 유명했다는 것에 대한 묘한 배신감과 억울함 혹은 내가 그저 스테디셀러를 읽고 있다는 것에 대한 거부감일까. 나의 이전 시대의 상징이었던 그는 내 것이 될 수 없다고 느끼는 허탈함 때문일까. 어쨌든 나는 그를 늘 보류 상태에 놓아두고는 했다. 그런데도 나는 『상실의 시대』를 아마 열 번쯤 읽었다.

 

『상실의 시대』에는 언제나 지나가버린 것의 냄새, 청춘의 쓸쓸함이 묻어있다. 책이 쓰여진 일본의 시대, 엄청난 베스트셀러가 된 국내 첫 출간해, 그리고 현재까지의 유행. 배경과 시대는 달라도 이십대의 젊은이들은 이 책에 끊임없이 열광한다. 아마도 언제 쓰여졌든 언제 읽혀졌든과는 무관하게 이 책에는 젊음의 어딘가를 자극하는 뭔가가 담겨 있나보다. 어쩌면 청춘을 지나고 있는 모든 이들의 머릿속에 이 책을 기억할 어떤 세포가 심어져 있는 게 아닐까 생각이 들 만큼.

 

사실 나는 『상실의 시대』를 한 번도 잘 써진 소설, 좋은 글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다만 친하지는 않았지만 또렷이 기억이 나는 동창생처럼, 버스에 놓고 내린 우산처럼, 기억이 날듯 말듯 입에서 맴도는 노래가사처럼 이상하게도 마음이나 머릿속 어딘가에 가라앉아 있다는 느낌을 받곤 한다. 마치 와인 병 밑바닥에 가라앉은 포도주의 침전물처럼 말이다.

 

그의 다른 글들도 비슷했다. 그에게선 ‘어떻게’ 보다는 ‘무엇을’ 을 읽을 수 있었고, 단 한 문장과 문단만으로도 반하게 되는 묘한 매력을 가지고 있었고, 독특한 설정과 다분한 실험 정신으로도 보편적인 감정을 끌어내게 했다. 젊고 생생하고 의도하지 않은 (소위 말하는) 쿨함을 지닌 문체 또한 인상적이며 무엇보다 글을 잘 쓰기보다도 기억에 남게 쓰는 작가였다. 그런 그에 대한 인상이 바뀌었다. 1 여 년 전쯤의 이야기이다.

 

1Q84

 

간헐적인 스테디셀러와 일부의 베스트셀러. 그 가운데 출판계에 돌풍을 일으킨 『1Q84』의 효과는 어마어마했다. 일본에서의 판매 부수, 국내에 출간되자마자 팔리는 경향, 2권의 예약판매 부수, 수많은 리뷰와 특집 기사. 어떤 ‘책’이 이토록 다양한 화제와 서브컬처를 양산했던 게 언제가 마지막이었을까. 언젠가부터 책의 위치는 영화, 연극, 뮤지컬 등의 다양한 문화로 대체되었고 책은 간신히 그 자리를 버티고 있었는데. 실제 어느 잡지 에디터가 말하길 어느 날 지하철 한 칸에 이 책을 들고 있는 사람이 네, 다섯이 되더라고 썼던 글을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약간의 경악 반, 감탄 반으로 읽은 책이었는데 과연 소문은 과장이 아니었다.

 

첫째로 나는 이 책의 놀라운 흡입력에 감탄했다. 짧지 않은 페이지,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는 차근한 묘사, 평범하지 않은 환경과 인물들을 안고도 엄청난 몰입도를 자랑했다. 실제로 책을 좋아하지 않는 남동생과 친구 한 명도 이 책을 이틀 만에 깔끔하게 독파했다고 했고, 내 경우엔 밤에 읽기 시작해서 2권을 모두 읽어내고 몇 시간 후 아침을 맞이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다음에는 여전히 매력적인 캐릭터가 즐거웠다. 군살은 하나도 갖고 있지 않은 깔끔하고 매끈한 아오마메, (해를 입히지 않을 것 같은) 덩치는 크지만 온순한 동물과 같은 덴고, 상냥하고 선한 웃음을 가진 아유미, 강하고 단단하게 그야말로 나이스하게 나이가 든 노부인, 뫼비우스의 띠처럼 어딘가 뒤틀려있는 기묘하고 아름다운 후카다 에리코 등. 모든 인물들은 각각 분명한 개성과 매력이 있었지만, 묘하게도 조금씩 닮아있기도 했다. 그들은 모두 단단하고 상처받았고 뭔가 중요한 부품이 하나씩 결여된 사람들 같았다. 특히 (주인공 두 명 외에) 개인적으로 가장 반했던 캐릭터는 노부인의 경호원을 맡고 있는 다마루였다. 공기와 말의 밀도를 변화시키지 않는 말, 다양한 이야기와 해학, 해야 할 일과 할 수 있는 일을 구별하는 냉철함, 탄탄한 몸과 군더더기 없는 동작, 그의 말투, 건네져오는 목소리, 느껴지는 성향 모든 것들이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마치 하루키라는 사람이 나도 몰랐던 취향을 꼭 맞춰서 만들어내기라도 한 듯 (말도 안 되는 말이지만) 그는 정말로 내가 선망하는 거의 모든 습성을 갖고 있었다.

 

세 번째로는 이 책이 하루키 소설의 핵심이자 완결, 혹은 옴니버스가 아닌가 하는 생각에서 흥미로웠다. 『1Q84』는 분명 새로운 책이었지만 그가 여태껏 써온 소설과 약간의 교집합 또는 합집합을 모두 갖고 있었다. 판타지적인 설정, 독특한 인물들, 그들의 과거와 현재를 접목시키는 방식, 다마루가 말한 ‘쥐’, 여태껏 그가 써온 어떤 이야기보다 현실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지만 사실 냉철한 세계, 문장의 호흡과 농도 등 모든 것들이 ‘하루키 식’이었다. 그가 말하려던 모든 것이 간헐적으로 합해진 짝패 혹은 가장 핵심 된 맥락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하루키가 그런 나이였던가, 자신이 가진 모든 카드를 함께 조합해서 내놓아야하는? 왈칵 서글픈 생각까지 들 정도로 이 책은 하루키 문학 그 자체였다. 마치 한 방울씩 떨어지는 물방울이 언젠가는 바위를 뚫게 되듯이 그는 이 한 권을 위해 여태껏 모든 글을 써왔던 걸까 싶은 생각까지 들었다.

 

허나 내가 말하고 싶었던 『1Q84』의 놀라운 점은 이 세 가지만이 아니다. 앞서 말했다시피 나는 하루키를 ‘매력적인’ 작가라고 생각했지 ‘문장력이 좋은’ 작가라고 판단하지 않았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내용 자체에는 손을 대지 말고 문장만 철저히 수정해나간다. 아파트 리모델링 공사와 마찬가지다. 기본적인 구조는 그대로 둔다. 구조 자체에는 문제가 없으므로. 수도 설비의 위치도 변경하지 않는다. 그 외의의 교환 가능한 것 - 마룻바닥과 천장, 벽이나 칸막이- 을 뜯어내고 새로운 것으로 바꿔나간다. 나는 모든 것을 위임받은 솜씨 좋은 목수다, 라고 덴고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정해진 설계도 같은 건 없다. 그 자리 그 자리에서 직감과 경험을 구사해 고쳐나가는 수밖에 없다. (중략) 늘릴 수 있는 만큼 최대한 늘리기 위한 시간대가 설정되고, 그 다음에는 깎을 수 있는 만큼 최대한 깎아내기 위한 시간대가 설정된다. 그 같은 작업을 번갈아가며 집요하게 거듭하는 사이에 진폭이 점점 작아져서 글의 분량은 자연스럽게 적정한 곳에 자리를 잡는다. 더 이상 늘릴 수 없고 더 이상 깎아낼 수 없는 지점에 도달한다. 자아가 지우지고 쓸데없는 수식이 떨어져나가고, 빤히 보이는 논리는 깊숙한 뒷방으로 물러난다. 그런 작업은 덴고의 천성적인 특기였다. 타고나기를 기술자로 타고난 것이다. 먹잇감을 찾아 하늘을 나는 새처럼 날카로운 집중력을 가졌고, 물을 운반하는 당나귀처럼 참을성이 강하며, 게임의 룰에는 한없이 충실했다. (1권)

 

하루키가 문체를 바꾼것일까? 감수와 교열 과정에서 움직인걸까? 아니면 번역에서? 미묘하고도 조심스럽게 뭔가가 바뀌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딘가 모르게 단절 된 문장, 냉철하지만 상냥한 말투, 독특하고 굴절된 표현들이 그의 특징 아니었던가. 하루키 문장에서의 ‘논리’와 '해설'은 -그가 자신의 소설에서 표현했듯- 나비에게 뼈대를 부여하는 일이 아닌가 싶어 잠시 혼란스럽기도 했다. 그런데 뭔가가 변했든 아니든, 바뀌었다면 어디서부터 어떻게 바뀌었든 결국 상관 없어지고 말았다. 『1Q84』의 문장은 마치 공부도 운동도 잘하고 좋은 가정에서 교육을 잘 받고 자란, 심지어 매력까지 있는 그야말로 얄미운 사람 같았다.

 

아주 작은 단어로도 문장은 크게 변한다. 마찬가지로 생기 있는 문장 하나로도 문단의 숨도 바뀐다. 차근차근한 시선과 일정한 호흡, 마치 하루에 쓴 것과 같이 변하지 않은 마음의 상태, 쉽고도 적확한 표현. 아아, 쉽고도 적확한 표현이라니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아니던가. 그래서였을까. 2권까지 하룻밤에 모두 읽어낸 후 지금까지 총 열 번 정도 이 책을 읽었다. 마음에 드는 물건을 눈으로 각인하려는 듯, 마음의 정화나 배설을 위한 듯, 조금씩 핥아가는 심정으로 문장을 먹고 음미하고 따라하고 경배했다. 모든 장점들을 차치하고서라도 나는 이 책의 문장으로 좌절하고 경외하고 사랑에 빠졌다.

 

1Q84 3

 

아오마메는 자신의 입안에 총구를 들이밀었다. 그렇게 2권은 끝이 난다, 하나의 끝이자 다른 하나의 시작을 알리며. 한 이야기가 끝나고 다른 내러티브가 시작하려 한다, 결말은 가시적이지만 함의는 깊고 길다. 소설이라는 오브제의 가장 완벽하고 모범적인 결말은 어쩌면 뫼비우스의 띠와 같은 모양이 아닐까. 그렇다면 <1Q84>의 결말은 최선이다, 라고 책을 덮으며 혼자서 중얼거렸다. 나는 3권을 기다리기도 했고 아니기도 했다. 끝까지 가보고 싶다는 마음과 이것만으로도 하나의 세계는 완결되었다는 완전함이 양쪽에서 같은 밀도로 나를 밀어왔다.

 

그렇게 복잡하고 벅차는 마음으로 읽은 3편은 (1, 2편에서 인물들의 성격과 배경, 사건의 발단과 전개가 이미 이루어졌기에) 비교적 담백했다. 새로운 인물의 시각이 추가되었고, 분명 수레는 굴러가고 있지만 다소 밋밋할 수도 있는 은근하고 더딘 진행이다. 허나 그것은 문장의 농도가 일정하지 않거나 기복이 물결치는 상태는 아니었다. 오히려 부지런한 등산이 진행 된 후 어느 임계선을 통과한 끝에 걷는 부드럽고 유연한 걸음에 가깝다. 게다가 그 와중에도 계속되는 추적과 엇갈리는 덴고와 아오마메 덕에 나는 TV 추리극장이라도 보는 사람처럼 두 손을 꼭 쥐며 읽었다.

 

실제로 지난 두 권에서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나는 마치 둘을 연결하지 못해 안달이 난 오지랖 넓은 중매쟁이 같았다. 아오마메를 기억에 묻어둔 채 살아가는 덴고를 바라보며 발을 동동 구르기도 했고, 아오마메에게서 아유미까지 뺏어가는 작가를 잠시 원망하기도 했다. 정말이지 진심으로 아오마메가 행복해지길 바란다. 어서 덴고가 그녀를 찾아 그녀와 그녀 안의 ‘작은 것’ 부드럽고 따뜻하게 안아주길 원했다. 나는, 그리고 (확신컨대) 아마 이 책을 읽는 모든 독자들은 왜 그렇게도 두 사람의 해피엔딩을 원할까. 아마도 이 책은 근본적으로 사랑과 구원에 대해서 말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단 한 사람이라도 진심으로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다면 인생에는 구원이 있어. 그 사람과 함께하지 못한다 해도.” (1권)

 

아오마메는 말했다. “티베트의 번뇌의 수레바퀴와 같아. 수레바퀴가 회전하면 바퀴 테두리 쪽에 있는 가치나 감정은 오르락내리락해. 빛나기도 하고 어둠에 잠기기도 하고. 하지만 참된 사랑은 바퀴 축에 붙어서 항상 그 자리 그대로야.” (1권)

 

작가는 『상실의 시대』서문에서도 ‘이 책은 근본적으로 사람이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에 대해 쓴 것이다’ 라고 말했는데 아마 『1Q84』도 같지 않을까. 가벼운 만남 혹은 신파, 타산과 이기, 고결한 척 굴거나 애써 아프게 구는 모습, 호의나 호감을 애정으로 착각하는 현재에 덴고와 아오마메의 교감이란 얼마나 깊고 길고 촉촉한가.

 

확인할 방법은 하나밖에 없고, 둘 다 굳이 입 밖에 내어 그것을 말할 필요는 없다. 아오마메는 조용히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본다. 덴고도 거의 동시에 똑같이 고개를 들고 하늘을 본다. 두 사람은 하늘에서 달을 찾는다. (중략)

 

이윽고 구름이 끊기고, 달이 하늘에 모습을 드러낸다.

 

달은 하나뿐이다. 항상 익숙하게 보던 그 노랗고 고고한 달이다. 억새 들판 위에 말없이 떠오르고, 온화한 호수면에 희고 둥근 접시가 되어 떠돌고, 조용히 잠든 집의 지붕을 조용히 비추는 그 달이다. 만조의 물결을 한결같이 바닷가 모래사장으로 밀어 보내고, 짐승들의 털을 부드럽게 빛나게 하고, 밤의 여행자를 감싸 안아 보호해주는 그 달이다. 때로는 예리한 그믐달이 되어 영혼의 살갗을 깎아내고, 초승달이 되어 어두운 고절의 물방울을 지표면에 소리도 없이 떨구는, 늘 보던 그 달이다. (3권)

 

그들의 사랑은 억지로 열거나 밀어오는게 아니라 조용히 닿아온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바칠 수 있는 순정, 감내할 수 있는 고통과 인내, 누군가를 구원으로도 절망으로도 여겨줄 마음, 그리고 서로가 같을 것이라는 의심 없는 확신. 두 사람이 미끄럼틀 위에서 만나 겨우 상대의 체온을 느낄 수 있었을 때, 나는 저도 모르게 눈물이 뚝 흘렀다. 의미나 감정을 필요로 하지 않는 눈물이었다. 아마 진심에 공명했던 투명한 눈물이 아니었을까. 그렇게 약간 붉어진 눈시울로 ‘덴고’와 ‘아오마메’의 이름으로 있던 챕터가 ‘덴고와 아오마메’가 되었을 때의 안도감과 벅참이라니.'덴고와 아오마메'로 바뀐 일곱글자를 언 땅 위에 피어난 꽃을 바라본 것처럼 기쁘고 안쓰럽고 고마운 마음으로 눈으로 좇고 있었다.

 

나는 둘을 걱정하지 않는다. "이 네 사람은 각자의 심산을 품고 이 계획에 임했을 뿐, 딱히 똑같은 방향을 지향했던 건 아니었어. 말을 바꾸자면, 모두가 같은 리듬에 같은 각도로 노를 저었던 건 아니라는 얘기야."(3권) 라는 고마쓰의 이야기를 빌려 말하자면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모두 같은 마음, 방향, 리듬과 각도를 노를 젓고 있으니까. 그들이 사랑할 수 있도록, 그 사랑을 지키도록. 어떤 의미에서 덴고와 아오마메는 우리가 지켜야 할 애정의 상징이자 이상이고 꿈이기도 할테니. 4권이 어떤 식으로 진행되든 두 사람은 헤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

 

나는 예전에 작가란 -이른바 하늘이 내려준- 일부의 선택받은 천재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엉뚱한 일을 하다가도 어느 순간 그야말로 섬광 같은 계시를 받고 갑자기 책상에 앉아 글을 휘갈기고, 그들의 광기 어린 붓끝은 아무도 말릴 수 없는 것이며 한바탕 폭풍이 몰아치는 그 움직임을 뒤로 하고 짠! 하고 책이 완성되는 것이라고. 엉뚱하고 예민하고 재능을 타고 난, 전혀 다른 차원의 사람들이라고. 퇴고로 머리를 썩이거나 열패감에 시달리거나 밤새 눈을 퀭한 채 밤을 새는 일들은 없을 거라고. 많은 작가들 중에서도 특히나 하루키는 ‘그런 작가’ 라고 넘겨짚었다. 왜 그런지 그는 언제나 무연하고 대담하고 쿨하고 솔직한 천재라고만 여겨졌다.

 

하지만 이제는 알고 있다. 작가란 축복 받았다기보단 사실 저주에 걸린 사람들과 같다는 것을. 그들은 재능을 뽐내는 쪽이 아니라 열등감에 시달리는 쪽에 가깝다는 것도. 쓰고 싶은 것들을 저절로 술술 풀어내는 게 아니라 때로는 쓰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써왔다는 것 또한. 퇴고에 퇴고를 거듭해 만성적인 어깨결림 따위를 안고 살고, 가끔은 한 단어 때문에 머리를 감싸며 좌절하기도 한다는 것을.

 

그리고 무라카미 하루키 역시 끊임없이 글을 쓰기 위해 자신의 체력을 단련한다는 것을 안다. 매일 새벽에 일어나 일정한 페이지를 써내고, 헤밍웨이의 말처럼 오늘 더 쓰고 싶을 때 내일을 위해 멈추는 사람이라는 것 또한. 하루키는『먼 북소리』에서 소설을 쓸 때는 죽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강렬하게 한다고 했다. 걸작이 되지 않다손쳐도,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기억하지 않는다 해도 소설을 끝맺음 할 때까지는 죽고 싶지 않다고. 만약 그 안에 죽는다는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날 만큼 분하다고도 말했다. 아아, 이제 나는 그를 천재 작가라고 상상하지 않는다. 아마도 그는 늘 같은 시간에 일어나 고요한 새벽을 필력의 위엄으로 채워가고 있을 것이다. 같은 시간에 일정한 운동량을 달성하고 (앞서 인용한) 덴고의 경우처럼 끈질기고 빈틈없는 퇴고를 할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분명 단단하고 아름다운 등을 한 채 『1Q84』의 4권을 써가고 있을 것이다. 문득 그런 생각을 하니 괜시리 가슴이 뻐근하고 그와 동시대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 고마워진다.

 

이제는 나도 하루키가 좋다고 솔직하게 수긍한다. 게다가 사실 옛날보다 지금, 그리고 점점 더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사람이 좋아진다. 그는 여전히 젊고, 담백하고, 뜨거운 ‘작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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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즘 2010-10-02 08: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Q84를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책의 분위기나 하루키에 대해 많이 생각해보게 되었네요. 올해가 가기 전에 읽어봐야겠습니다.
8기 서평단 안내 글을 따라 무심코 들어왔는데 하루키도 좋았지만 [Talk to]님의 글이 더 매력적으로 보입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Shining 2010-10-03 14:49   좋아요 0 | URL
취향에 따라 호불호가 있겠지만; 매력적인 책이라는 것과 흡입력면에서는 대부분 동의를 하니, 읽어보시면 좋을 것 같아요^^ 리뷰도 많지 않고, 미욱한 글솜씨로 서평단 하게 되어 걱정도 됩니다. 과분한 칭찬을 들었으니 더 분발해야겠어요+_+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