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은 크면 아버지를 다 이해하게 돼있어!'
은연중에 아빠들은 그런 마음을 품고 훗날 자신을 다시 찾을 자식을 기대한다. 고단한 인생을 겪다 보면 자신을 이해하고 자신의 고달픔을 이야기하며 소주 한잔 부딪힐 순간을 말이다.
'플라멩코 추는 남자' 나는 이 책을 읽기 전에 자유로운 중년 남성의 춤을 상상했다.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반겨주고 인정해 주는 분위기에 눕고 싶어 한다. 하루의 고생을 보상받고 싶은 마음이다. 하지만 가족 모두 그들만의 하루가 있기에 매번 같기란 어렵다. 그럼에도 변함없이 확인하고 싶어 한다. 집안에서 내 위치를 지키고 싶은 마음에 큰소리를 낸다. 강압적인 목소리 뒤에 불안한 마음이 떡하니 버티고 있다.
'지금도 이런 식인데, 은퇴하면 얼마나 더 무시를 할까?'17p
아빠들의 자리는 소파에 앉아 티브이를 보면서 아내와 자녀가 식탁에서 나누는 이야기를 안들리척 하는 거리다. 말, 글, 일, 공부 모든 게 할수록 실력이 늘어난다.
아빠의 언어들은 담배연기로 날아오르고, 술기운에 휘청이느라 실력이 늘지 않는다. 표현되지 못한 마음은 '그걸 꼭 말해야 아느냐?'라며 표현 받고 싶은 마음 앞에 울타리를 친다. 너도 나도 넘나드는 문 하나 없이 큰소리로 말해야 전해진다.
남훈 씨는 굴착기 일로 가정을 챙겼고, 67살 안식년을 갖기로 하고 굴착기를 늙다리 청년에게 임대해 준다. 집에 머문 어느 날 결혼하기 전에 쓴 자신의 '마흔한 살 청년일지'를 꺼내 읽게 된다.
나는 이 지긋지긋한 알코올중독의 삶을 끝내고 건강하게 살 것이다.
건강이란 육체의 것만을 뜻하는 게 아니며, 정신의 것도 포함되어야 온전하다. 오늘부터 내 삶의 목표는 늙어서 죽는 것이며, 멋지게 늙는 것이다. 그러니 우선 다른 사람에게 상처 주는 말은 하지 말자. 그리고 어떤 경우에도, 상대가 화내기 전에는 결단코 화내지 말자. _27p
'나는 말이야, 미국. 거기 꼭 가고 싶었어.'
남훈 씨의 꿈은 언어학자가 되는 거였다고 한다. 부친이 일찍 돌아가셔서 집안의 가장이 돼야만 하는 그는 꿈을 포기했다.
이제 와 생각하면 왜 그토록 쉽게 포기를 해버렸는지 아쉬움이 남았다. 5년 뒤 아니 10년 뒤라도 돈을 모아 배움의 길을 걸어도 되지 않았나? 하지만 그때 그는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다. 마치 거대한 문 앞에서 매를 맞고 쫓겨난 기분이었다. 다시는 그 문안으로, 그 높은 성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_48p
부모님 세대에는 첫째라는 이유로 모든 것을 포기하고 가장이 돼곤했다. 시골에 남아야 했고, 빨리 돈을 벌어 동생들을 뒷바라지하고, 가정을 이루고 살림을 키워나가야 하는 숨 가쁜 시간들을 달린다. 굳은살이 박이는 만큼 마음도 퍽퍽해진다. 감성은 사치이고 사랑타령은 배부른 소리다. 아버지뿐이겠는가 어머니도 그러하다. 희생이 존경받는 시대에서 열심히 제 살을 내어놓는다. 그들의 꿈은 사라졌고, 자식이 이어받거나 꿈은 꿈일 뿐이라며 현실을 쫓으라 당부한다.
'청년일지' 한 번의 이혼 후 다시 일어서기 위해 쓰기 시작한 그 노트에서 남훈 씨는 자신이 안식년에 해야 할 일을 시작한다. 굴착기로 작업을 하면서 누구보다 깨끗하게 유지하고, 클래식을 틀어 둔 그는 먼지 속 노동자의 자존감을 지키려 노력해왔다. 실제로 이 책을 읽던 중 집 근처에서 도로 공사를 하는데 굴착기가 있었다. 출근길 가로막아진 굴착기 기사님과 눈이 마주쳤다. 사람과 사람. 가벼운 목례로 나는 기다리고 그는 길을 내어주었다. 책 속 남훈 씨도 작업할 때 가장 신경 쓰는 부분이 지나가는 사람들의 동선이라고 했다. 굴착기 위에서 그 주변의 모든 것을 계산하고 예측하는 그들의 작업이 멋있어 보인다.
남훈 씨는 청년일지에 이어 어렵게 얻은 딸을 위해 '아버지'의 인생을 적기 시작한다. 내가 살아온 날들을 적을 때 어느 순간부터 시작해야 할까.. 남훈 씨 역시 지금의 아내와 시작한 시기부터일지 그 이전의 삶부터일지 고민하다가 결국 지금에 이르기까지의 이야기를 쓴다. 두 번째 인생 전에 숨죽여둔 기억들이 살아난다. 그 안에 또 한 명의 딸이 있다. 외면하고 찾지 않았던.
지금 가진 것을 과거가 삼켜버릴까 두려워 멈칫하는 그를 다른 사람들의 인생 이야기가 다독인다.
마주해야 하는 일들. 웃음 끝에 매달린 질긴 자기혐오.
그렇게 36년 만에 만난 딸과 스페인으로 여행을 떠난다.
"아빠, 굴착기 기사라면서. 그런 것도 알아?"
"이놈. 내가 굴착기 기사지, 굴착기냐?" "아빠가..... 공부하나 거야. 너 알려주려고."
보연은 깜짝 놀랐다. 누군가가 자신을 위해 공부했다니. 그런 말은 처음이었다. 246p
"엄마가 아빠를 욕하는 게 나는 싫었어." "아빠가 좋아서 그랬던 건 아니야. 그야 아빠가 잘못한 게 있을 수도 있고, 엄마 말이 다 사실일 수도 있지. 하지만 어쨌든 내 반쪽은 아빠한테서 왔잖아. 엄마가 아빠를 욕할 때마다 나도 그런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엄마는 내 맘을 이해 못 했어. 그냥 내가 아빠를 좋아해서 아빠 흉을 못 보게 하는 줄만 알더라. 사실 나는 나 자신을 지키고 싶었던 건데.. 그래서 엄마가 그럴수록, 나는 아빠 생각을 했어. 엄마 모르게 속으로 생각했지." _248p
'누가 그러는데, 새로운 언어가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 준단다. 앞으로 좋은 일이 생길 거야. 네 삶에.' 268p
서로의 언어가 다르면 소통이 어렵다. 부끄러움이 많다면 보디랭귀지도 마찬가지다. 나 역시 그렇게 서로 다른 언어 앞에서 이해 대신 쉬운 방식의 침묵을 택했다. 남훈 씨가 스페인으로 여행 가기 위해 배운 스페인어와 플라멩코는 이해하기 위해 열어두어야 하는 마음과 닮아있다. 그의 탭댄스가 스페인 광장에서 울려 퍼지듯 엇박자 같은 마음들이 소리를 낼 수 있는 광장에 나설 용기가 필요함을 전해주는 책이었다. 이 시기 내게 그렇게 읽혔다.
'이야기의 끝에서 당신은 진짜 가족을 만나게 될 것'이라는 띠지에 적힌 글은 진짜 마음의 소리를 내길 바라는 응원의 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