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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여우눈 에디션) - 박완서 에세이 결정판
박완서 지음 / 세계사 / 2022년 1월
평점 :
품절
박완서 작가님 이름만 알고 있었다.
이름만 안다고 그 사람을 알리 없다. 그저 대단하신 작가분이라는 정도였다. 그런 저자의 책을 만나 한 페이지를 펼칠 수 있었던 건 필사 모임을 통해서였다. 멤버분이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를 함께 읽길 바라셨고, 그렇게 나는 박완서 세상에 들어섰다.
다른 책을 엄두 내지 못 했던 건 시대적 배경에 금세 집중력이 틀어져서다. 부끄럽게도 시대적 흐름에 대한 배경지식이 약한 나로서는 그녀가 담아낸 글을 달달하게 음미할 수 가없었다. 그런 틈에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는 한입 쏙쏙 넣어 녹여내는 글이었다. 나는 실제로 벅차했고, 작가의 신랄한 표현과 솔직한 마음에 구석구석 고해성사를 하기 바빴다.
"잡문 하나를 쓰더라도,
허튼 소리 안 하길,
정직하길,
조그만 진실이라도,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진실을 말하길..."
작가는 부끄러운 마음을 내놓고 시원하게 침을 뱉었다. 소히 글을 쓴다 하면 마음이 정갈하리라는 예상을 깨고, 앞장서 모진 마음들을 꺼내니 누구라도 마음속으로 '저도요. 저도요. 저도 그런 마음 갖은 적 있어요.'라며 세차게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그 찰나의 순간에 내 것이 아닌 줄 알았던 기억들이 부끄러운 모습을 드러낸다. 평상시라면 손을 뻗어 주워 담기 바빴을 나를 향한 경멸이 다시 모습을 바꿔 재정비된다. 읽는 동안 서서히 정갈해지는 마음을 느낄 수 있다.
시어머님은 몸이 크게 아프신 이유로 삶에 대한 의욕이 많이 줄어들었다. 불안을 다독이며 긍정적으로 살던 모습이 점점 위축되면서 푸념들로 쏟아졌다. 어머님 발아래 한숨이 잔뜩 내려앉았다. 남편은 어머님에게 '필사'를 권했다. '어머니, 제가 해보니까 딴생각 안 나고 좋은 거 같아요. 한번 해보세요.'
어머님은 '필사'를 한다는 아들이 신기하면서도 '그럼 책 좀 추천해 줘.'라 하셨다. 남편과 나는 같은 책을 떠올렸다.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책을 읽고 필사하는 동안 실제로 남편은 어머님을 많이 떠올렸다. 나 역시 이 책이 어머님의 접힌 마음을 펼 수 있는 좋은 시간이 되리라고 믿는다.
"길은 사람의 다리가 낸 길이기도 하지만 누군가의 마음이 낸 길이기도 하다. 누군가 아주 친절한 사람들과 이 길을 공유하고 있고 소통하고 있다는 믿음 때문에 내가 그 길에서 느끼는 고독은 처절하지 않고 감미롭다." 15p
산을 오르면 많은 사람들이 다니면서 낸 길만 따라 걷는다. 발자국이 없고 풀이 무성한 곳은 뱀과 알지 못할 덫들이 그득할 것 같아 발을 헛딧지 않고서는 얼씬거리지 않았다. 그런 면에서 앞서 지난 이들이 마음으로 내준 길을 따라 안전하게 걷는 나는 감사한 마음이 든다. 나잇살 좀 먹었다고 요즘은 나는 누군가를 위해 마음의 길을 내어 주었는가?에 대한 고민을 한다.
"우리가 아직은 악보다는 선을 믿고, 우리를 싣고 가는 역사의 흐름이 결국은 옳은 방향으로 흐를 것을 믿을 수 있는 것도 이 세상 악을 한꺼번에 처치할 것 같은 소리 높은 목청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소리 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무의식적인 선, 무의식적인 믿음의 교감이 있기 때문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수많은 믿음의 교차 26p
작가는 자신을 말하면서 독자에게 묻는다. 잔잔한 동화 같기도 하고, 평범한 일상을 이야기하는 에세이지만 나는 읽으면서 '고백론'처럼 느꼈다. 톨스토이 고백록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어쩌면 만인이 인정하는 유명인도 속은 나와 별반 다르지 안구나 하는 안심이 나를 무장해제 시켰다는 것을. 비로소 나를 열어 나의 검은 속을 거둬낼 기회를 얻었다는 것을. 이렇게 거창한 의미를 가지고 나는 이 책을 사랑한다.
"크게는 안 바라요. 그저 보통 사람이면 돼요.
가장 겸손한 척 가장 욕심 없는 척 이렇게 말했지만 실은 얼마나 큰 욕심을 부렸었는지 모른다. 욕심 안 부린다는 말처럼 앙큼한 위선은 없다는 것도 내 경험으로 알 것 같다."
보통 사람 _57p
왜 당신에게는 그런 일이 일어나면 안 된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이었다. 그래, 내가 뭐 관대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일을 나에게만은 절대로 그런 일이 일어나면 안 된다고 여긴 것일까. 그거야말로 터무니없는 교만이 아니었을까.
_생각을 바꾸니
내가 하나의 작품을 이룩한 게 작가가 되기 위한 피나는 노력이나 준엄한 각오에서가 아니라, 순전히 중년으로 접어든 여자의 일종의 허기증에서였던 것이다.
쓰는 일만 부끄러운 게 아니라 읽히는 것 또한 부끄럽다.
나는 내 소설을 읽었다는 분을 혹 만나면 부끄럽다 못해 그 사람이 싫어지기까지 한다.
_218p
부끄러웠지만 허기증으로 글을 써야 채워졌던 그녀의 영혼이 아름답다. 사실 그 영혼을 들여다볼 수 없지만, 그녀의 글이 다른 이들이 마음을 흔들어 놓았으니 그 모래알만 한 진실들이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작가의 진실을 모래알 세 듯 읽다 보면 내 마음의 모래알이 여기저기 굴러다녀 걸음마다 발바닥이 거슬 거린다. 진실을 마주한다는 건 이렇게나 서걱거린다. 하지만 그 마주함을 통해 나를 알알이 이해해 나갈 수 있다.
<이 책은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아 읽고 쓴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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