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언어는 사고의 틀입니다. 상대에 대한 존중과 배려, 수평성을 가지고 있는 라틴어가 로마인들의 사고와 태도의 근간이 되었을 겁니다. ... 몇 개 국어를 하는가, 어려운 외국어를 할 줄 아는가가 대단한 게 아닙니다. 외국어로 유창하게 말할 줄 알지만 타인의 이야기를 듣지 못하는 유명 인사의 강변보다, 몇 마디 단어로도 소통할 줄 아는 어린 아이들이 대화 속에서 언어의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종종 생각합니다. 나는 고상한 언어를 구사하고 있을까하고요.
2.
지식 즉 어떤 것에 대해 아는 것 그 자체가 학문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학문을 한다는 것은 아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그 앎의 창으로 인간과 삶을 바라보며 좀 더 나은 관점과 대안을 제시해야 합니다. ... 배운 사람이 못 배운 사람과 달라져야 하는 지점은 배움을 나 혼자 잘 살기 위해 쓰느냐 나눔으로 승화시키느냐 하는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배워서 남 주는 그 고귀한 가치를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진정한 지성인이 아닐까요? 공부를 많이 해서 지식인은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지식을 나누고 실천할 줄 모르면 지성인이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도 공부를 해나가는 본질적인 목적을 잊지 않기 위해 '나는 왜 공부하는가? 무엇을 위해서, 누구를 위해서 공부하는가?'에 스스로 되묻습니다.
3.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공부를 해나가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학생의 개인적인 성장이지 타인과의 비교가 아닙니다. 성찰없는 성장을 강요하는 한국의 상대평가 방식은 교육적이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라틴어의 성적 구분
Summa cum laude 숨마 쿰 라우데 (최우등)
Magna cum laude 마냐/마그나 쿰 라우데(우수)
Cum laude 쿰 라우데 (우등)
Bene 베네 (좋음/잘했음)
'잘한다'라는 연속적인 스펙트럼 속에 학생을 놓고 앞으로의 가능성을 열어둡니다. '남보다' 잘하는 것이 아닌 '전보다' 잘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미 스스로에 또 무언가에 '숨마 쿰 라우데'입니다. (우리나라는 현재 평가척도가 상/중/하 또는 매우잘함/잘함/보통/미흡/매우미흡으로 되어있어요.)
4.
공부에 지치고 세상이 자신을 보잘것없게 만들어 스스로가 초라하게 느껴지더라도 언제나 자기 스스로를 위로하는 케루빔의 천사가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어떤 상황에 처하든 스스로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일을 멈추지 않을 때 자기 자신을 일으켜세울 수 있습니다. 스스로에 대한 객관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때로는 누구보다 자시 자신에게 가장 먼저 최고의 천사가 되어주었으면 합니다.
5.
매일 출근해 일하는 노동자처럼, 공부하는 노동자는 자기가 세운 계획대로 차곡차곤 몸이 그것을 기억할 수 있을 때까지 매일 같은 시간에 책상에 앉고 일정한 시간을 공부해줘야 합니다. 머리로만 공부하면 몰아서 해도 반짝하고 끝나지만 몸으로 공부하면 습관이 생깁니다. '하비투스'라는 말처럼 매일의 습관으로 쌓인 공부가 그 사람의 미래가 됩니다. 공부는 자동판매기가 아닙니다. 당장 결과가 좋지 않은 경우가 수두룩하지만 체계적으로 학습량을 쌓은 두뇌는 어느 때부터 '화수분'이 될 수 있습니다. 저는 공부하는 노동자입니다. 공부라는 노동을 통해 지식을 머릿속에 우겨넣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을 통해 나를 바라보는 노동자입니다.
6.
Si vales bene est, ego valeo.
시 발레스 베네 에스트, 에고 발레오
당신이 잘 계시다면 잘 되었네요, 나는 잘 지냅니다.
Si vales bene, valeo
시 발레스 베네 발레오
당신이 잘 있으면, 나는 잘 있습니다.
이것은 로마인의 편지 인사말입니다. 타인의 안부가 먼저 중요한, 그래서 '그대가 평안해야 나도 평안하다'는 그들의 인사가 마음 따뜻하게 다가옵니다. 내가 만족할 수 있다면, 내가 잘 살 수 있다면 남이야 어떻게 되든 별로 신경 쓰지 않는 요즘 우리의 삶이 위태롭고 애처롭게 느껴집니다.
7.
Hodie mihi, cras tibi
호디에 미기, 크라스 티비
오늘은 나에게, 내일은 너에게
로마의 공동묘지 입구에 새겨진 문장입니다. 오늘은 내가 관이 되어 들어왔고, 내일은 네가 관이 되어 들어올 것이니 타인의 죽음을 통해 자신의 죽음을 생각하라는 뜻의 문구입니다.
8.
카르페 디엠은 원래 농사와 관련된 은유로서 로마의 시인인 호라티우스가 쓴 송가의 마지막 부분에 있는 시구입니다.
Carpe diem, quam minimum credula postero.
카르페 디엠, 쾀 미니뭄 크레둘라 포스테로.
오늘을 붙잡게, 내일이라는 말은 최소한만 믿고.
카르페란 말은 카르포carpo(덩굴이나 과실을 따다, 추수하다)라는 동사의 명령형비니다. 과실을 수확하는 과정은 사실 굉장히 고되고 힘들지만, 한 해 동안 땀을 흘린 농부에게 추수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행복일 겁니다. 그래서 '카르포'동사에 '즐기다, 누리다'란 의미가 더해져 '카르페 디엠' 곧, '오늘 하루를 즐겨라'라는 말이 됐습니다. 시의 문맥상 '내일에 너무 큰 기대를 걸지 말고 오늘에 의미를 두고 살라'라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오늘을 산다고 하지만 어쩌면 단 한순간도 현재를 살고 있지 않은지도 모릅니다. 과거의 한 시절을 그리워하고 그때와 오늘을 비교합니다. 미래를 꿈꾸고 오늘을 소모하죠. 기준을 저쪽에 두고 오늘을 이야기합니다. 그때보다, 그때 그 사람보다, 지난번 그 식당보다, 지난 여행보다 어떤지를 이야기해요. 나중에 대학가면, 취직하면, 돈을 벌면 집을 사면 어쩧게 할 거라고 말하죠. 내일의 행복을 위해 오늘을 불행하게 사는 것도, 과거에 매여 오늘을 보지 못하는 것도 행복과는 거리가 먼 것이 아닐까요? .. 시인 호라티우스의 말은 내게 주어진 오늘을 감사하고 그 시간을 의미 있고 행복하게 보내라는 속삭입니다. 오늘의 불행이 내일의 행복을 보장할지 장담할 순 없지만 오늘을 행복하게 산 사람의 내일이 불행하지만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9.
Tantum vemus quamtum scimus.
탄툼 비데무스 콴툼 쉬무스.
우리가 아는 만큼, 그만큼 본다.
사람마다 자기 삶을 흔드는 모맨텀이 있을 수 있습니다. 나를 변화시키고 성장시키는 힘은 다양한 데서 오는데 그게 한 권의 책일 수도, 어떤 사람일수도, 한 장의 그림일 수도, 한 곡의 음악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을 통해 새로운 것에 눈 뜨게 되고 한 시기를 지나 새로운 삶으로 도약하게 되는 것이죠. 하지만 그런 모멘텀은 그냥 오지 않습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늘 깨어 있어야 한다는 말과도 같을 겁니다.
10.
라틴어에는 상처와 관련된 용어가 많습니다. 수많은 전쟁과 검투 경기 때문에 생긴 외상 환자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트라우마 trauma는 많은 상처를 의미합니다.
11.
Hoc quoque transibit!
혹 쿠오퀘 트란시비트!
이 또한 지나가리라!
분명한 것은 언젠가 끝이 날 거라는 겁니다. 모든 것은 지나갑니다. 그러니 오늘의 절망을, 지금 당장 주저앉거나 도망치고 싶은 마음을, 끝 모를 분노를 내일로 잠시 미뤄두는 겁니다. 그러다보면 어느 순간에 나를 괴롭혔던 그 순간이 지나가벼렸음을 알게 될 겁니다.
12.
Dum vita est, spes est.
둠 비타 에스트, 스페스 에스트.
삶이 있는 한, 희망은 있다.
라틴어 명구 중에는 희망과 관련된 것들이 참 많아요. 과거에도 참 수많은 사람들이 희망을 꿈꿨구나 하는 생각이 들다가도 그 사실은 결국 그만큼 힘든 삶의 조건이 인간의 모든 세대마다 있었다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 제 희망은 삶이 죽음이라는 선택을 강요할 때 죽지 않고 사는 것입니다. 그게 저의 최고의 희망입니다. 저에게 희망이란 이루고 싶은 무언가, 어떤 것에 대한 기대와 그것이 충족되기를 바라는 마음, 그런 것들이 아닙니다. 그저 '희망' 그 자체로 저를 살게 하는 것이고 살아 있게 하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