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 과학이 발견한 인간 마음의 작동 원리와 진화심리학의 관점
스티븐 핑커 지음, 김한영 옮김 / 동녘사이언스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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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점에서 우리는 오로지 비유를 통해서만 말할 수 있는 세계의 일부를 들여다볼 수 있게 된다.

Werner Karl Heisenberg. 철학원고/철학의 탄생 182P

문장은 하나의 형상일 때 비로소 무언가를 말할 수 있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비트겐슈타인 Ludwig Wittgenstein, –논리철학논고-

 

태양은 저 어디에선가 세상을 위해 매일 아침 그 모습을 모두에게 보여준다.

그 태양의 빛을 제일 먼저 받는 곳은 어디인가?

세상에서 가장 높은 곳이다.

세상에서 제일 높은 곳이 가장 먼저 햇빛을 받을 수 있다.

해가 뜰 때 그날 가장 먼저 햇빛을 가장 먼저 받기 위해서는 제일 높은 곳에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려면 어두울 때 미리 올라가서 기다려야 할 것이다.

그런데 가장 높은 곳을 올라갈 수 있는 방법은 어느 쪽에서건 존재한다.

그 수단과 방법은 형식과 규범에 어울리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본인 스스로의 힘에 의지하지 않고서는 정상을 밟을 수 없다.

 

흔히 세상의 빛을 가장 먼저 보려 정상을 다녀온 사람들은 그 빛의 장엄함에 뭔가를 얻은 바를 말하곤 한다.

그런데 말하지 않고 보았음을 표현하는 쪽이 가보지 못한 사람에게는 더 신비스러움을 준다.

말하는 쪽은 모르는 사람이 답답하고 그지없이 안타깝거나 한심스러울 수는 있으나

저도 오르기 전에는 말이라도 할 수 없었음을 잊은 듯하다.

해서 말 해서는 안 된다. 아니 하지 않음이 옳다.

저를 위해서도……

 

정상에 올라 본 사람들이라고 회자되는 사람들이 저마다의 색으로 표현하는 소리들 중 동양사람들의 소리.

그러나 가만히 들여 다 보면 모두가 그 소리가 그 소리.

그러니 스스로 경계를 잊고 하려면 빈 서판Blank Slate이라도 들고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목소리도 있는……

동쪽은 자연 속의 관계를 통한 조화를 보고, 서쪽은 개인간의 형식에 치우쳐 순환작용을 모르는 직선적 사고의 물리적 사고를 내세워 발전해 오는 바람에, 그 말의 전달 방식이 달라 지금에 이르렀다고 해도, 결국은 그 말이 그 말.

(서양인은 개별적 사물을 보고 있고, 동양인 연속적인 물질을 보고 있는 것이다.

<생각의 지도: 리처드 니스벳Richard Nisbett/전체를 보는 동양과 부분을 보는 서양/ 84>

 

그러나 이들의 표현은 어떤가?

 

존재하는 사물들의 기원은 아페이론ápeiron이다. 존재하는 사물들은 아페이론으로부터 생겨나지만, 이 사물들은 필연성/책임성에 의거해 다시 소멸하여 아페이론 속으로 돌아간다. 왜냐하면 사물들은 그들이 범한 불의에 대해 시간의 질서에 따라 서로 합당한 벌과 고행을 치르기 때문이다.”(12B1)/

공간적으로 아페이론은 무한하다. 이는 다음과 같은 것을 뜻할 수 있다..

시작도 끝도 없으며 당연히 아무런 한계도 없다. (12A15)

외적인 경계가 없으며 무한정 이어진다. (Infinitum)

너무나 거대하고 광대무변하여 크기를 측정할 수 없다. 공간은 만물 안에 자신을 포괄하는 것이다. <밀레토스Miletos아낙시만드로스Anaximandros> “

 

공기로 이루어진 영혼이 우리를 지배하고 지탱해주듯이, 숨결과 공기가 온 세계를 둘러싸고 있다. (13B2)”

 아낙시메네스Anaximenes

“…… 미풍취유송 근청성유호…… (微風吹幽松 近聽聲愈 ) 寒山

 

마음이 어디에 있는가를 두고 수천 년을 이어온 인간들의 의문.

그 의문을 둘러싸고 분석하기 위해 논리적 선을 긋고 시작한 서양인과 자연 속에 그 의문을 포함시켰으나 시간의 흐름과 함께 태극의 선을 그은 동양인. 그들에게 주()와 객()의 경계는 필요하였던 것일까?

 

主伴具備

 

心心體不異 故說但是心

마음과 마음의 체는 다르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다만 이것은 마음뿐이라고 한다.

心中但是心 心無心而生

마음. 마음 하지만 마음속에 이 마음 밖에 없고,

種種色形相 所見惟是心

마음은 무심인 상태에서 갖가지 . . 생기게 한다. 그 보이는 바 모든 것이 다 마음일 뿐이다.

佛及聲聞身 辟支佛身等

부처의 몸과 성문의 몸 벽지불의 몸 등

復種種色身 但說是內心

그 밖의 갖가지 색신을 다 마음이라고 설한다.

無色界無色 色界及地獄

無色 라든가 무색이라든가 또 색계와 지옥이라든가

色現爲衆生 但是心因緣

이 색은 중생들을 위해서 나타난 것인데 이것은 다만 마음의 인연일 따름이다.

如幻三昧法 而身如意生

깊은 삼매에 들다가 보면 뜻대로 그 몸이 생기는 것이다. <능가 경>

 

사람을 빼앗고 경계를 빼앗지 않는다.

경계를 빼앗고 사람을 빼앗지 않는다.

사람도 경계도 둘 다 빼앗는다.

사람도 경계도 빼앗지 않고 둘 다 그대로 내버려둔다.

유시(有時) 탈인불탈경(奪人不奪境)

유시(有時) 탈경불탈인(奪境不奪人)

유시(有時) 인경불탈(人境不奪)

유시(有時) 인경구불탈(人境俱不奪). 임제록(臨濟錄) 사료간(四料揀)

 

師又 일구어(一句語) 수구삼현문(須具三玄門) 일현문(一玄門) 수구삼요(須具三要)

한구에는 반드시 삼현문이 갖추어져야 한다. 또 하나의 현문에는 반드시 삼요가 갖추어져야 한다. . . 승 삼보의 삼현문이 다 일구어 라고 했으니까. 이 세 가지 경우에 전부 체. . 용이 문제가 되고, 그 하나하나 그 일현문에 또 반드시 세 가지 것이 필요하게 된다.  임제록: 삼구(三句) 삼현(三玄) 삼요(三要)

 

Tetraktys

하지만 이 무한한 것에 단순한 산술적 비례의 형식을 갖는 경계를 부여하면 조화로운 화음과 리듬이 생겨난다.

이는 경계가 형식 없는 무한한 것에 한도를 부여하여 그것을 형식을 잘 갖춘 것, 적절한 것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지고한 것이……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1072b: 사모스Samos의 피타고라스 Pythagoras>

우주와 만물은 수3에 의해 규정되어 있다. 끝과 중간과 시작은 이 만물의 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만물은 3이며, 3보다 많지도 적지도 않다. 모든 개별적인 우수함도 3가지로 요약된다. 지성과 힘과 행복이 그것이다.”

1은 슬기로움과 본질을, 2는 사유를, 4는 정의와 함께 테트락튀스로는 자연 전체를 의미하며, 5는 결혼을, 6肉化, 7은 시간과 빛과 건강을, 8은 우정과 사랑을, 그리고 완전함의 수 10은 수의 모든 본질을 의미한다. –

 

중국 당나라시대의 임제 의현 선사(? ~ 867)와 기원 전 500년대에 살았던 그리스의 헤라클레이토스가 서로 만났다면 할()을 주고 받았을까? 아니면 어느 시간대의 웜홀Worm Hole 을 통과한 메시지를 받았을까?

 

봉운(峯云) 황벽유하언구(黃檗有何言句) 지시어인(指示於人)취봉(翠峯)이 물었다.

황벽스님은, 사람들에게 무슨 말씀으로 가르쳐 주시는가?

사운(師云) 일전과서천(一箭過西天) 임제(臨濟)가 답했다. 화살 하나가 서천으로(인도로) 날아가버렸다.

임제록 하권 355

 

그러므로 화살의 이름은 삶이지만 그것의 임무는 죽음이다. ‘인식은 추론하는 숙고를 통해 서서히 구축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상 혹은 뜻하지 않은 직감에 의해 단번에 획득한다. 그렇지 않으면 영원히 획득되지 못한다.”

 에페소스Ephesus의 헤라클레이토스Heraclitus 222

 

 

그리하여 오늘도 또 의문은 쌓여 간다. 계속하여 Sapere Aude!

 

수천 년의 세월을 지나 이제 현재로 돌아와서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 무슨 작용을 하는지 들어 본다.

 

또 다른 난제는 자아다.

존재했다가 사라지고, 시간과 함께 변하지만 동일한 본질을 유지하고,

지고의 도덕적 가치를 지닌 감각력의 통일된 중추인 자아란 무엇이고, 어디에 있는가?

……

자유의지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다.

나의 행동이 전적으로 내 유전자와 양육과 뇌 상태에 의해 야기된다면,

그것은 어떻게 내가 책임져야 하는 선택이 될 수 있을까?

 ……

현대의 철학자들은 다른 세 가지 해결책을 시도한다.

첫째, 신비한 존재들은 이 세계의 환원 불가능한 부분이므로 그냥 그대로 놔두자는 것이다.

 ……

두 번째 접근 방법은 문제가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다

. ……

세 번째 접근 방법은 그 문제를 우리가 풀 수 있는 것으로 축소하는 것이다.

의식은 피질 4번 층에서 일어나는 활동, 또는 단기기억의 내용이다.

자유의지는 전대상고랑이나 그 실행 서브 루틴에 있다. 도덕성은 친족선택과 호혜적 이타주의다.

……

우리의 마음에는 철학의 주요한 문제들을 해결할 장비가 없다는 제안으로부터

사람들은 터무니 없고 근거를 댈 수도 없는 결론들을 쉽게 이끌어 낼 수 있다.

……

그것은 종교적 믿음이나 신비주의적 믿음을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라 왜 그런 시도들이 무익한지를 설명한다.

철학자들이 거리로 나앉는 일은 없을 것이다. 철학자들은 그 문제들을 명료하게 다듬고,

해결 가능한 토막들을 잘라내고, 문제를 직접 풀거나 과학자들에게 넘겨주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

……

그러나 철학의 문제들에는 전일적 측면, 한 순간에 모든 것에 존재하면서도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고,

동시에 모든 것에 적용되는 측면이 있다.

......

나는 신체 부위들이나 뇌 상태들이나 정보 단위들의 종합이 아니라,

시간과 함께 존재하는 자아의 통합체이며 구체적인 위치에 존재하지 않는 단일한 궤적이다.

……

우리가 의식, 자아, 의지, 지식의 수수께끼들에게 속수무책인 것은

그 문제들의 본질과 자연선택이 우리에게 갖춰 준 계산 장치들 간의 불일치 때문일 것이다.

마음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스티븐 핑커 /8. 인생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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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제록 강의 -상 불연 이기영 전집 30
이기영 지음 / 한국불교연구원 / 199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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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로울 때엔 마음의 평정을 보존하려는 노력을
언제나 잊지 말 것이며,
행복할 때엔 
과도하게 기뻐하는 것을 삼가라."
- 호라티우스(Quintus Horatius Flaccus: BC 65~BC8)


기원전 65년에 로마에서 태어난 사람이 남긴 말을
독일의 철학자 Schopenhauer(1788~1860)는 자신의 책에 인용하였다.

"스토아 적 윤리가 주로 목표로 하고 있는 것은
그러한 망상과 그 결과에서 마음을 해방시켜 망상대신 마음의 평정을 주려는 것이다.
다음과 같은 유명한 송시에 보면 호라티우스는 이러한 통찰을 충분히 하고 있었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제4권 의지로서의 세계에 대한 제2고찰 >

그런데 이 로마의 시인보다 약500년이나 앞서서 살았던

중국 주 왕조(BC1046~BC256)시대의 노자(BC600? ~ BC470?)가 한 말.
 


爲 無爲 (위 무위): 억지로 함이 없는 함을 실천하고
事 無事 (사 무사): 일함이 없는 일을 실행하고
味 無味 (미 무미): 맛없는 맛을 맛보십시오
大小 多少 (대소 다소): 큰 것을 작은 것으로 여기고 많은 것을 적은 것으로 생각하라.
<도덕경 63>



또 호라티우스가 살았던 그때로부터 800년이나 지난 날


그것도 지구 반대편에 위치한 중국 당나라시대의 선사(禪師) 임제(臨濟) 의현(義玄)(? ~ 866)은 이렇게 화두(話頭)를 남긴다. 
 

師云: 你且 隨處作主 立處皆眞 境來回換不得 (니차 수처작주 입처개진 경래회환부득)
스승이 이르기를(師云),
그대들은(你且) 이제 어디에 가든지(隨處) 거기에서 주인이 되도록 해라(作主).
네가 서있는 그곳이(立處) ,그대로 진실된 곳인 것이다.(皆眞)
어떤 경계가 닥쳐오더라도(境來), 돌려서 바꿔 놓을 수 없다.(回換不得)
임제록 13.
또 비슷한 의미로 같은 구절이 있다.
如大器者 直要不受人惑 隨處作主 立處皆眞 (여대기자 직요불수인혹수처작주 입처개진)
큰 그릇이라면(如大器者), 꼭 다른 사람들의 유혹을 받지 않아야 한다.(直要不受人惑 )
가는 곳마다 주인이 되고(隨處作主), 서 있는 곳마다 다 참인 것이다(立處皆眞)
임제록 15. 

 

 

그리고 다시 800년이 지난 명나라 말기(1368~1644) 양명학을 하는 유학자 육상객(陸湘客).
이른바 육연(六然)을 주장한다.


주변의 환경에 따라서 흔들리지 말고 초연하며 (자처초연-自處超然)
사람에 따라서 감정을 달리하지 말고 초연하며 (처인초연-處人超然)
일이 많아 바빠도 일에 쫓기지 말고 초연하게 (유사초연-有事超然)
일이 없더라도 불안하게 생각 말고 초연하게 (무사초연-無事超然)
뜻을 이루고 성공해도 들뜨지 않고 담담하게 (득의담연-得意澹然)
최선을 다하였으나 실패했더라도 태연스럽게 (실의태연-失意泰然)
解 - 幽松


그로부터 다시 300여 년이 흐른 1979년 류송월(柳淞月)이라는 승(僧)이
“六然을 요약하면 수처작주(隨處作主-입처개진(立處皆眞)이 되고 이 글귀를 전개하면 육연(六然)이 되는 것이다.”라고
풀어 쓴 책을 출판했다.(흥신 출판사:1979/禪名句二百選)
 
이렇게 긴 세월 동안 음미되어온 말에 사족을 달면 쓰레기가 되어버릴 텐데……
세월은 글자 몇 자로 성큼성큼 건너 뛰었지만 그 2,000년이란 세월의 면면을 세세히 볼라치면 글자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을 것이다.
그만큼 긴 세월이 흘렀음에도
초연(超然)하다라는 말을 동서양의 시대를 달리 산 현자들이 한 뜻으로 추구했던 것을 보면
그렇게 하기가 얼마나 힘들까라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하지만 희망이야 가질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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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쟁 크리스토퍼 히친스의 유작 1
크리스토퍼 히친스 지음, 김승욱 옮김 / 알마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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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는 엄청난 주장들을 내놓는다.

속세에서 시민들을 다스릴 권위를 갖고 있다는 주장도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면밀한 탐색과 조사를 면제받으면 안 된다.

 크리스토퍼 히친스 Christopher Hitchens / 논쟁Arguably”

 

이 책의 느낌을 말하자면 제목 그대로 "논쟁"이라기 보다 생각으로는 그냥 사전상의 해석대로 저자 본인은 충분한 이유를 들어 주장할 수 있는준비가 되어 있으니 한번 대들어봐라 하고 눈을 부릅뜨고 째려보는 서평 묶음이라고 하고 싶고

굳이 더 한다면 내가 전에 읽은 적이 있는 "위도10-종교가 전쟁이 되는 곳/엘리자 그리즈월드 2011년 시공사", "추악한 동맹-종교적 신념이 빚어 낸 현대 정치의 비극 / 존 그레이 2011년 이후 ", 그리고 저자가 2007년에 발간한 "신은 위대하지 않다.” 2008 /알마 " 를 섞어 놓은 듯한 느낌을 준다.

나머지는 옮긴이가 후기에서 푸념한 내용에 함축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무지 어려운 책이에요. 자기가 아는 게 많다고 자랑이라도 하고 싶은지 문장 하나에 책 서너 권이 들어 있는 건 예사고, 단어도 어려운 것만 골라서 써요. 그래서 다른 책보다 시간이 두 배는 더 걸려요."

여기에 덧붙인다면 그 바람에, 옮긴이의 주석이 들어 간 문장은 두 번씩 읽어야 하였고, 덕분에 저자만큼이나 단기기억이라도 아는 것은 많아졌음에, 그리고 그렇게 번역하느라 수고하였음에 고마움의 박수를 ......

 

한 때 나는, 그러니까 70년대말인가 80년대초인가 필리핀의 국민들이 미국의 한 주가 되자고 국민 투표를 하자는 의견을 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그것이 과연 정말일까 하고 의심했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히친스의 이 책에 그리고 시어도어 루스벨트를 위해 러디어드 키플링Rudyard Kipling/1865~1936)이 쓴 시<백인 의 짐 The White Man’s Burden>은 필리핀 합병에 관한 (미국-스페인 전쟁에서 미국이 승리하자 스페인은 필리핀을 미국에게 양도하였다. 새로운 식민지배 하 필리핀의 정치 및 행정체계는 급속한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다. 또한 영어를 널리 사용하도록 교육 체계를 개선하고 전국에 영어로 수업하는 학교를 세웠다. 이는 스페인이 종교를 통해 꾀하려 했던 민족정신 말살 정책과 유사한 것으로 민족의식을 희석시키기 위해 교육을 장려한 것이었다. <네이버 백과>)

미국 상원 표결에 영향을 미치기 위한 것이었다. 루스벨트는 이 시를 헨리 캐벗 로지 상원의원에게 전달해주었다, (이 시의 부제는 미국과 필리핀 제도The United States and the Philippine Islands’였다. >” 는 구절(앵글로 세계의 미래 164)이 있는 것으로 보나, 당시의 내 나이를 생각할 때 내가 남의 나라의 합병과 같은, 그런 이야기를 만들어 낼 능력도 없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저자의 학자로서, 정치적 저널리스트로서의 경력, 역사적 식견과 신용으로 보아 사실이라고 믿어도 될 것 같다.

 

이 이야기는 마치 바둑처럼 세계라는 바둑판에 19세기의 지중해사건Barbary War에 이어 20세기에 세계전쟁의 승리를 이용하여 동양에 포석을 깔고자 하는 의도가 엿보이는 듯하다. 미국이 그 시기에 대서양을 벗어나 태평양을 향해 세력을 확장하고자 하는 데에는 역사적으로 볼 때 바다를 지배하는 나라가 세계를 지배했고, 따라서 해군 건설만이 미국을 강대국으로 유지시킬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에는 공화당의 유력자 헨리 캐봇 로지도 동조하였다. 이러한 팽창의 요구에 대해 지식인들도 지지하였다. 조시아 스트롱 목사는 인류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우수한 앵글로색슨 족의 기독교 문명이 남아메리카와 아프리카까지 퍼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사회학자 존 피스크도 우수한 앵글로색슨 족의 언어, 종교, 정치 제도가 인류의 발전을 위해 전세계로 퍼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고 하는 팽창주의가 깔려있고 그 바탕에는 WASP의 오만이 있다.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책은 수렵사냥민족은 농경생활에 정착한 민족에게 수렵 공간을 빼앗기게 되므로 사냥을 통한 교역이 성행하고 그로 인해 문화의 다양성을 수용하는 적응력이 강해졌을 것이고 그러므로 인류는 진보를 위하여 안정에 정착하지 말고 모험에 나서야 한다는 뜻으로 내게 들어왔다. 정착민족이 모든 면에서 우수하다는 것은 아니지만 정착하여 안정된 생활은 진보하지 못하고 타 문명에 대하여 배타적이 될 수밖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면으로 본다면 내 생각에 WASP라는 민족은 수만 년이나 지난 아직까지도 수렵생활의 유전자를 버리지 못한 민족임에 틀림없어 보인다.

 

그러나 문제는 한 나라, 민족에 침투하는 것이 총과 균 그리고 쇠만이 아니라 조시아 스트롱과 같은 종교가 따라 온다는 것이다.

어찌 보면 인류라는 큰 틀 안에서 민족이라는 개념은 풍성하고 튼튼한 가지를 위하여 꺾여도 좋은 하나의 줄기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그것이 순환이라는 역사이고 지구의 숨결일 수는 있다. 그 관점에서 인간의 윤리나 문화는 이라고 불리는 세포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세포인 인간 객체는 惻隱之心을 저절로 느끼고 是非之心을 타고나는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 어느 한 민족이 세계를 통합 관리해야 한다는 생각은 가지를 비틀어지게 하는 옹이나 종기, 암과 같은 존재일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히친스는 한 나라를 병합하고자 하였던 미국이라는 나라가 그 시기, 즉 영국을 벗어나 미국이라는 국가로 자리매김하기 시작하는 19세기 중엽이 되기 전까지 유럽의 여러 나라들, 프랑스, 영국, 러시아의 도움과 인도주의적 개입이 없었다면 지금처럼 세계를 상대로 경찰 노릇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며, 그 때문에 기왕의 과거 제국들과 같은 역할을 하려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을 하려고 하는 것 같다.

 

나는 이렇게 복잡하게 얽혀있는 패권주의나 정치는 딱 질색인 사람이고, 진정으로 자유를 즐기고 어떤 왜곡되거나 속내를 숨긴 자유라는 이름으로의 속박이나 구속을 원지 않는 사람으로서, 자유라는 이름으로 온갖 구속을 하는 미국은 가 본적도 없고 앞으로라도 내 돈을 주고 가 볼 생각은 없는 사람인데, 그 이유중의 하나가 미국이 갖고 있는 자연조건은 보고 싶고 알고 싶지만, 그들의 종교를 앞세우거나 은연중에 숨긴 팽창주의나 제국주의 강대국정책을 바탕으로 하는 세계의 사냥개 노릇을 하려는 얼핏 제국주의 황제 같은 오만이 싫어서이고, 그런 한에 있어서만 반미이다.

 

언제나 꺼지지 않을 것이라 믿고 있는 그들의 슬로건 “God Bless America”

미국 코미디언 George Carlin의 말처럼 왜 미국인가? 영국은? 호주는? http://serviceapi.nmv.naver.com/flash/convertIframeTag.nhn?vid=42513F8AA5BB942E36E8B88B850776E2834F&outKey=V12444f0a495df3d023ec14d6a34ee338036c9fb7d8090f6b083f14d6a34ee338036c&width=500&height=408

그런 미국을 구성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인종적으로 말하자면 수백 년 동안 더하고 섞이고 늘어나서, 앞으로 한 세대 안에는 미국을 구성하는 인종의 수가 백인보다는 유색인종이 더 많을 것이라고 한다.

           미국을 명백한 서구사회로 생각하는 것은 더 이상 현실적이지 못하다. 미국은 한 세대 정도 후에는 신흥 탈 서구국가의 하나가 될 가능성이 크다. 인구 변화의 추세를 볼 때 한 세대 정도 후에는 아시아계, 흑인계, 히스패닉계 미국인이 인구의 다수가 될 것이다.” 191 미국과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유토피아

 

인종적으로 어쨌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문화적으로 그렇게 다양한 나라에서 그 한 곳으로 옮겨간 민족에게 그들의 초기 이념을 받치고 있던 종교가 계속 이어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종교는 내게 몇 년 전하고는 많이 달라진 의미로 남아있다. 그런데 그것이 종종 [유리알 유희]에 나오는 인물의 고민처럼 다가올 때는 스멀스멀 뭔가가 저 밑바닥에서 올라올 때가 있다. 그리고 그런 욕지기가 검증 없이, 고민 없이, 의심 없이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나라와 사회가 있다는 것이 한심스럽지 않는가?

인문학자들이 걱정하고 있는 것은 종교가 주는 이점이라는 것- 그런 것이 있다면 보다는 종교라는 이름아래 세계적으로 저질러지는 테러라는 이름의 폭력을 걱정하는 것일 게다. 그런 우려 속에는 빠짐없이 등장하는 말이 있다.

근본주의자라는 표현이 그것이다. 그런데 과연 무엇에 대하여 근본이라는 것일까?

 

『옥스포드 기독교사전』에서는 근본주의(fundamentalism)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1914~1918년 전쟁 후에 발달한 다양한 개신교 단체들 안에서 일어난 운동으로, 정통 기독교 교리라고 믿어지는 것과 특히 문자적으로 성경의 무오류성을 엄격하게 지지하였다.”라고 되어있단다.

 

그렇다면 그들의 주장은 그들의 신을 믿는 누구든 그들의 경전에 쓰여 있는 문자 그대로 이해하고 실천해야 한다는 의미 아닌가?

그 말은 좋은 말, 즉 남과 어떤 식으로든 엮이지 않는 상태에서의 행위만 본인의 의지대로 할 수 있고, 타인과 얽혀 있는 일, 또는 생각은 경전이 시키는 대로 해야만 한다는 의미 아닐까? 그런데 그렇게 실천하는 것이 과연 그들의 신이 원하는 의미였을까?

그들의 신이 했다고 교차통신을 통해 받아 적는 사람이 그만 깜빡 조는 바람에 성경험이 없는 처녀라고 했는지 결혼을 하지 않은 젊은 여자라고 했는지 잘 못 알아 들었거나, 아버지가방에들어간다와 같이 그냥 쓰는 바람에 뭐가 뭔 뜻인지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면?

성경의 무오류성이라고 했는데 그 경전이 세상에 수많은 언어로 번역되면서 친절하게 그 나라의 아이들에게 알린다는 의미로 마음대로 해석해 놓은 무수한 성경들 중 어느 것이 옳은 문자로 경전을 그대로 옮긴 것인가? 목사가 한 것? 신학자가 한 것? 율법자가 한 것? 유대 랍비가 한 것? 교황이 침침한 눈을 비벼가며 손수 번역한 것?

 

어쨌든 영국 국교가 그런 결정을 내렸다는 사실은 종교가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진 것이며, 신의 말씀을 기록한 것이라서 절대로 바꿀 수 없다는 경전에 잉크가 묻은 인간의 지문이 덕지덕지 찍혀 있음을 보여주는 또 다른 하나의 사례다. 퍼거슨의 말은 나름대로 옳았다. 그녀는 다만 선택의 대상이 얼마나 많은지, 얼마나 많은 영국인들과 영어 번역본과 예수 이야기와 각각 다른 예수의 모습 중에서 선택을 해야 하는지 몰랐을 뿐이다. 왕이 하나님을 구했을 때 509

 

그나마도 히친스의 신 십계명을 보거나 아까 그 코미디언이 친절하게 알려주는 십계명을 들으면 과연 뭐가 옳은 문자이며 근본이라는 것인지 세상 모두를 향해 자신 있게 외칠 사람이 있을까?

 

           아프카니스탄에 주둔중인 미군 군목중의 한 사람 게리 헨슬리 중령이라는 사람이 (……) “특수부대 친구들은 기본적으로 사람을 사냥합니다. 기독교인으로서, 예수님을 위해 사람을 사냥하는 겁니다. 맞습니다. 우리는 사람을 사냥합니다. 천국의 사냥개들을 풀어 그들을 뒤쫓아가서 천국에 집어넣습니다. 그렇죠? 우리가 하는 일이 바로 그겁니다. 그것이 우리의 임무입니다” (……) “아프카니스탄 현지에서는 미국 헌법도, 일반 명령 1< 모든 종교 또는 신앙의 개종 권유를 분명히 금지하고 있다. > 도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군복을 입은 선교사들을 저지하는 조치는 지금까지 취해진 적이 없다.”(……) “군대가 여러 종파와 교파의 경연장이 된다면 미국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재앙을 맞게 될 것이고, 그것이 현장의 사기에 미치는 영향 또는 재앙과 맞먹을 것이다.” 전장의 무신론자들을 위한 변호 200

 

그렇다면 세계에서 가장 돈이 많은 나라라고 알려지고, 우주로 탐사선을 쏘아 올리는데 가장 앞선 나라임에도 왜 모순적인 문자에 매달리고 있는 것일까? 그렇게 된 데에는 종교적인 역할이 먼저였을까? 정치적인 음흉함이 먼저였을까? 미국은 내가 생각하기에 초기 대통령 때부터 종교적인 역할이 먼저였을 것 같다. 그 이유로 돈을 내고 신 대륙으로 옮겨온 사람들이니까…… 그렇게 동부에서 서부로 원주민을 학살하며 넓혀온 그 땅에 측은지심시비지심을 내세워 자신의 죄를 스스로 눈감을 수 있는 방법은 종교적이어야 했을 것이다. 그런 사람의 말은 아무리 난폭한 사람이라도 폭력에 주춤하게 하기 마련이며 그 말을 무시하는 사람은 자기 스스로 지옥으로 갈 것이라고 했지 않은가. 비록 서부시대 영화나 현대 갱 영화에서이지만 말이다. 하지만 미국인들이 언제까지나 그렇게 “God Bless America”를 외치고 있을 것 같지는 않으며 속으로는 고향에 있는 유대교도 친척이나, 힌두교도 친척, 도교를 믿는 친척을 위해 기도하거나 이슬람 성전 메카를 향하여 외치고 있는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새뮤얼 헌팅턴은 그의 책문명의 충돌The Clash of Civilizations / 1997에서 앞으로 전쟁이 난다면 문명의 경계선 축에서 전쟁이 날것이며, 유교적 세력과 손잡은 이슬람 세력이 기독교 세력과의 충돌을 예견하였다. 만약 그의 예언처럼 된다면 그것은 종교가 정치가를 부추긴 것일까? 아니면 정치가가 종교를 이용하여 패권야욕을 실현하려는 것일까? 지금까지 인류의 역사상 전쟁으로 죽은 사람의 숫자보다는 종교적인 이유나 민족적인 이유로 죽임을 당한 사람의 숫자가 더 많다고 한다. 전쟁의 이유 또한 영토의 확장이라는 이유보다는 상대의 종교나 문화를 트집잡아 전쟁을 일으킨 적이 많다고 한다. 누가 부추기는 것일까? 자신의 영욕을 위한 야망으로 종교인의 표가 필요한 자와, 자신의 신념에 대한 자만으로 명예를 얻고자 하는 종교인의 결탁? 정치인들이 내세우는 발전과 진보는 민족이 가지고 있는 개인적 문화와는 어울릴 수 없는 것일까?

 

헌팅턴이 주목한 서구문명의 한 가지 구성요소인 종교를 생각해 보자. 오늘날 대부분의 유럽국가가 탈기독교적인 데 반해, 여전히 미국은 종종 근본주의적인 신앙심이 강력하고도 광범위하게 퍼져있는 나라로 남아 있다. (……) 70%에 조금 못 미치는 미국인들이 악마(사탄)의 존재를 믿고 있는데, 이는 영국인의 1/3, 프랑스인의 1/5, 그리고 스웨덴인의 1/8과 비교된다. 미국인의 약 1/4는 개종한 기독교도이며, 그들에게 있어 악마에 대한 관념은 은유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의 현실이다. 186

미국은 계몽주의로부터 물려받은 근대사회의 모델에 부합하지 않는다. 하지만 미국은 근대 말의 다른 어떤 문화보다도 계몽주의 미신과 환상에 더욱 널리 지배되고 있다. 187

 미국에서 다문화주의에 관한 논쟁이 분파적인 성격을 강하게 띠는 데 대한 원인은, 부분적으로 미국문화의 뿌리 깊은 보편주의에 기인한다. 보다 장기적이고 광범위한 인류의 역사를 통해 볼 때, 다문화적인 사회는 인류의 일반적인 조건이다. 세계의 모든 제국 로마, 중국, 오토만(오스만), 로마로프, 영국 및 합스브루크 제국 은 풍부한 문화적 다양성을 지니고 있었다. 각 제국은 지배적인 문화를 가졌으며 때때로 일부 제국은 보편주의적인 목표를 가졌다. 그러나 여태까지 어떤 제국도 피지배국을 시종일관 단일의 생활방식이나 신념체계로 전환시키려 하지 않았다. 188

 

히친스의 책을 통해본 미국은 평화 시에는 선교사를 통해, 국고를 위한 무기판매라던가 시민들이 에너지의 확보가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시점에 프로파간다를 통한 분쟁이 필요한 시기에는 승진을 원하는 장교들의 묵인 하에 군복을 입은 선교 인들을 보내왔다고 보여진다. 내 생각에 그들 중 과반은 신념이라는 가면을 쓴 출세지향주의자들이다. 유대인을 배척하면서도 그들을 위해 원주민을 몰아내고 수십 년 동안 분쟁을 일으키는 것도 그들의 돈을 이용하고자 하는 것이거나, 그런 윗물의 혼탁에 아랫물도 혼탁해졌을 뿐이지 그들 속으로는 조지 칼린의 코미디에 열광하고 싶어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미국이 지금 자신들이 내세우는 신성을 버리거나 타협한다면 어떤 결과가 일어날까? 폭동이 일어날까? 아니면 다들 내심 그렇게라도 되기를 바라는 것일까? 누가 고양이의 목에 방울을 달아주길 바라는 것은 아닐까? 잘못 끼워진 단추는 바로 잡을 수 있지만 시간의 흐름과 함께 지나버린 그릇된 바탕은 그 힘이 어느 경로로 꺾이지 않는다면 어려울 것 같다. 아니면 극한을 경험하여 내려오는 길 밖에 없는 경우가 아니라면 말이다. 그런 관점에서 미국은 얼마나 그 힘이 유지될까?

 

바나나 공화국의 또 다른 특징 하나는 부족적이고 사이비 종교적인 요소들이 이성과 질서를 억누르고 꽃을 피우는 성향이다.

개인의 탐욕을 공적 자금으로 구제해주자는 제안에 대해 처음 투표가 진행되고 있을 대, 의회가 종교적인 축일(유대교의 신년제)을 이유로 휴회한 것이 아주 이상해 보이지 않는가? 이 나라에 사는 대다수의 유대인들은 유대교를 믿지도 않는데 말이다. 여담이지만, 이것이 종교와 정치의 분리와 관련해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159p 바나나공화국이 된 미국

 

언젠가는 미국도 역사 속의 유럽의 강국들, 스페인, 포르투갈, 프랑스, 영국처럼 될 것이고, 그것은 그 이전의 문명국들 마야, 잉카, 이집트, 간다라처럼 시간의 흐름에 지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정작 성인들이 글로 남기지 않은 것을 후대의 혹은 제자라는 사람들이 모여서, 혹은 교차통신이라는, 뇌 생리과학에 의하면 측두엽과 전전두엽 등의 이상에 의한 환청 환시였을 뿐이라는 현상을 가지고 을 연구한다는 외국인 학자가 꼬집은 글이 있다. 유명한 선사들이 상당하여 제자들과 법문을 나누는 과정에서 ‘’! 하는 뜻을 두고 그 참뜻을 어떻게 주고 받았는지 알 수 있는가라는 것이다. 그것 말고도 선문답이라는 것이 말장난 아니냐는 것이다. (臨濟錄(임제록) 상권 48, 61……) 그런데 모든 성인이라는 현자가 참 뜻을 글로 남기지 않는 이유는 이해할만하다. 예로 以心傳心(이심전심)”있고 Telepathy, ESP라는 것이 초상현상이라는 정신반응이 있다고 하는 것처럼, 눈으로 말한다 라고 하는 것처럼 묵언 하에 통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것이 정말 그것인지는 나도 또한 그 외국교수처럼 의문은 있다. 다만 정상으로 올라갈 수 있는 방법은 많다는 등산길처럼 그게 정상이구나 라고 올라 본 사람은 알 수 있을 것이다 라면, “拈華微笑가 꼭 수많은 종파와 교단을 만들어낸 원흉은 아니라고 해야 할 것 같다. 문제는 저만 알고 있으면 될 것을 굳이 남에게 알리려 한다거나 뭐 그리 대단한 것이라고 자기만 아는 것처럼 떠든다거나 좀 그럴듯한 해석을 이용해 사리사욕에 사용하려는 인간들이 일으키는 사건이 문제인 것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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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쟁 크리스토퍼 히친스의 유작 1
크리스토퍼 히친스 지음, 김승욱 옮김 / 알마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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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느낌은 "논쟁"이라기 보다는 그냥 서평 묶음이라고 하고 싶고

굳이 더 한다면 "위도10", "추악한 동맹", 그리고 저자가 2009년에 발간된 "신은 위대하지 않다" 를 섞은 듯한 느낌을 준다.

나머지는 옮긴이가 후기에서 푸념한 내용에 함축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무지 어려운 책이에요. 자기가 아는 게 많다고 자랑이라도 하고 싶은지 문장 하나에 책 서너 권이 들어 있는 건 예사고, 단어도 어려운 것만 골라서 써요. 그래서 다른 책보다 시간이 두 배는 더 걸려요."

여기에 덧붙인다면 그 바람에, 옮긴이의 주석이 들어 간 문장은 두 번씩 읽어야 하였고, 덕분에 저자만큼이나 단기기억이라도 아는 것은 많아졌음에, 그리고 그렇게 번역하느라 수고하였음에 고마움의 박수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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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로부터의 자유 - 무엇이 우리의 생각, 감정, 행동을 조종하는가?
마이클 가자니가 지음, 박인균 옮김 / 추수밭(청림출판)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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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의지가 온전히 본인의 자유의지가 아니라는 것이 최근의 뇌 과학 연구자들이 주장하는 연구 결과의 한 축이라고 한다.

아인슈타인은 나는 철학적 의미에서의 인간의 자유를 믿지 않는다. 인간은 외부의 충동이나 내부의 필요 따라 행동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스피노자도 그 자체로 절대적이거나 자유의지를 가진 정신은 없다. 다만 이렇게 하겠다거나 저렇게 하겠다고 마음 먹도록 정해진 정신만이 있을 뿐이다.”라고 했단다. (4장 무엇이 우리의 행동을 조종하는가 185p) 연구에 의하면 사람이 외부의 자극으로부터 뭔가의 행위를 결정하는 데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한다. 생리학자 벤저민 리벳Benjamin Libet은 인간이 자신이 움직이기로 결심했다고 느끼기 300밀리세컨드 전부터 뇌의 운동피질에서 활동이 나타난다는 것을 뇌파검사EEG를 사용하여 보여준 것으로 유명하다. (자유의지는 없다/샘 해리스)” 그 몇 초도 안 걸리는 시간 동안 뇌 속에서는 무수한 신호가 오고 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뇌가 반응하도록 결정을 내리면 자아가 그 명령을 따르는 것이라고 한다. 단 선험적으로 저장된 경험의 반응은 뇌가 결정하기 전에 반응한다고 한다. 그러면 나는 과연 무엇일까? 자극에 반응하도록 결정지어진 기계일까? 머리에 유령이나 호문쿨루스Homunculus (16세기 스위스의 연금술사 파라켈수스에 따르면 인간의 정액을 증류기 속에 넣고 40일간 밀봉해서 부패시키면 인간의 형태를 가진 투명한 생명체가 탄생했다고 한다. 여기에 인간의 혈액을 넣고 40일 동안 말의 체온과 똑같은 온도에서 보존하면 인간 아이가 된다고 한다. 다만 이 아이는 인간의 아이들보다 훨씬 작았고 유리용기 안에서만 살 수 있다고 한다.)가 들어선?

그런 학문적 주장이 아니더라도 주변에는 흔한 진리는 항상 주변에 널려있다. 유심히 보지 못했을 뿐이지……- 노래 들이 주변 어느 곳에서든 흘러나온다.

내 마음 나도 몰라.” “내가 왜 이러는지 몰라등등.

나는 자아를 모르는 것이 아니라 뇌의 반응을 자각하지 못했다는 것일까?

그런 주장을 하는 학자들 중 한명인 뇌 신경과학 심리학자 마이클 가자니가의 책 뇌로부터의 자유에는 그런 자유의지에 대하여 설명한 부분이 있다. 사람들에게 착시현상은 뇌가 착각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과연 뇌가 착각하는 것인지 자아가 착각하는 것인지에 따라 나의 행동이 자유의지에 의한 것인지 뇌의 명령에 자아가 사회적 규범을 적용하여 반기를 드는 행동을 하는 것인지를 책에는 다루고 있다.

그 책에 인용된 착시현상의 여러 종류를 알려주는 웹사이트를 들여다 보았다.

그 사이트에는 내가 뭘 보고자 하는지 감시하는 눈동자가 따라 다닌다.

과연 내가 보고자 하는 것이 그것인지 확인시켜주려 하는 것일까?

다만 그 눈동자의 움직임 맞는지 확인하려면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 거슬리지만……

뇌 신경과학자들은 나의 의지가 자유스럽지 못하다고 제시하는 한가지 예로 착시현상을 들고 있는데,

인용된 사이트의 내용을 보면 볼수록 과연 내가 보고 인식하는 것이 사실과 다를 수도 있음을 확인하게 되고,

이걸 내가 본 것이라고 생각해야 하는지,

아니면 나는 그저 뇌가 일러주는 대로 인식하고 있는 것인지 그 학자들의 증거가 사실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과연 나는 내가 생각하는 사물에 대한, 또는 내 자신이 인식하였다는 대상에 대하여 기존의 의문에 의문을 더한 꼴이 되어 버린 것일까?

아니면 내가 본 것은 허상이거나 누군가(종교인이 받드는 창조자이거나 인간을 벗어난 그 무엇)에 의하여 왜곡된 형상 또는 개념일 수도 있음을 인정해야 하는 것일까?

내가 보고 듣고 경험한 것에 대한 판단이 내 자유의지에 의하여 결정되었다고 믿는 것은 나란 어떤 존재가 개입된 인간이기 때문에, 나의 판단의 결과에 따른 행위에 대하여 스스로 책임지어야 한다는, 즉 동물과 다르다는 자존적 도덕관념 때문이 아닐까 한다.

최근에 읽은 여러 뇌 관련 심리학 책을 읽고 나서는 의지의 동기를 결정하는데 어떤 원칙이 사회의 보편적 법칙이 되며 우리의 행위를 결정하는 동기란 무엇인가라는 의문 - <즉 순수이성의 진리들과 형이상학적 객관성 사이에는 이해할 수 없는 심연이, 말하자면 이러한 이성의 진리들이 어떻게 해서 곧 바로 사물인식을 실제로 보증할 수 있겠는가 라는 문제가 여전히 남아있다는 점을 느끼게 되었다. /후설 유럽문학의 위기>- 같은 칸트 적 질문자체도 그들이 뇌의 작용을 모르던 시절에 사고의 결과로 끌어낸 것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그들이 쳐 놓은 미로와 같은 思辨의 자물쇠가 열리는 느낌이다.

그 어려운 순수인식이니 실천의식이니 하는 내용도 그저 뇌가 외부의 자극에 반응하여 우뇌가 협조하고 좌뇌가 동의하여,

그에 따라 통합된 신호를 보낸, 일부는 선험적 유전자의 결과로, 다른 일부는 후천적 경험의 일부라는 신호에 따라 인식하였다는 과정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 같다.

물론 아직 그래도 뇌가 자극이 없다면 어떤 신호를 보낼 수 있는지, 만약 Deaf, Dumb, Blind의 경우에는 사물의 인식을 어떻게 보편적인 사고와 같게 동일시 할 수 있는지에 대하여는 조금 더 학습을 해야겠지만, 그래도 조금 수월해졌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왜 格物致知에 대한 실천을 분명하게 할 수만 있다면 모든 사물이, 모든 인식이 皆空인지는 그래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格物致知를 주장하는 삶들이 五蘊皆空을 몰아내고자 했던 것은 정치적, 사회적 규범을 먼저라고 보았기 때문이고

천 년이 지난 이제 와서 老莊을 다시 들여다 보는 것은 인간에게는 규범이 우선이 아니라- 규범은 뇌가 가진 선험적 유전자에 새겨진 인간의 근거라고 할 것이므로 규범을 반응하게 한 자유의지가 무엇에 의한 것인가를 먼저 들여다봐야 하는 것임을 무의식이든 잠재의식이든 재발견했기 때문이 아닐까?

사람은 태어남부터 죽음이라는 단계까지 사회를 벗어날 수 없는 존재이므로 모든 인식이나 개념 등은 그 자체로서 존재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본다면 五蘊皆空 맞는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럼에도 거기서 끝나지 않고 다음에 따르는 수백의 단어들이 주는 자극은 그저 그 순서대로 살아있는 세상에서 살아있는 인식을 하도록 하기 위함이 아닐까 한다.

그래서 세상 모든 학문은 그 나름대로의 존재이유가 있다고 새삼 느낀다.

그러나 자유의지란 뇌의 활동에 의한 외부자극의 반응이라고 한다고 자아를 낮춘다고 해도,

그저 인식이나 자아나 모두 때로는 허상에 의한 불안감을 안정시키려는 방어기제이며 사회적인 규범에 의하여 삶을 존중하려는 노력에 따르고자 자신을 계속 최면에 거는 행위라고 할지라도,

내가 보고 있는 사물이, 내가 듣고 있는 자연의 소리들이 환상과 환청이라고 해도,

이미 결정 난 세상의 모든 이가 단지 기의 흐름에 의한 생성된 법일 뿐이라고 해도,

서쪽에서 온 자아에 대하여 자꾸만 사족을 다는 것이 紅爐點雪(홍로점설)일지라도,

뭔가 해야 한다. 아직 나는 아는 것이 없지 않은가? 그저 주워들은, 그나마도 기억해내지도 못하고, 이야기를 지어낼 수도 없는 처지인 것을…….

글을 이처럼 슬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삶의 경험으로부터 자유롭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결정을 내리기 위해서는 삶의 경험이 필요하다. 우리의 성격으로부터 자유롭고 싶은 것도 아니다. 그 또한 우리의 결정을 이끌어 주기 때문이다, 인과관계에서 자유로워지길 바라지도 않는다. 우리는 인과관계를 통해 예측을 한다. 날아오는 공을 받는 리시버는 태클을 피하는 동안 속도와 경로를 유지하기 위해 몸이 스스로를 조정하는 것으로부터 자유롭고 싶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훌륭하게 진화된 의사결정 장치로부터 자유롭고 싶은 것도 아니다. 우리는 무엇으로부터 자유롭고 싶은 걸까?” <4장 무엇이 우리의 행동을 조정하는가? 202P>

나는 이런 질문에 얼마 전부터 자꾸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다.

어렸을 적에 학교과제를 실험하느라고 나뭇잎을 양잿물에 녹인 적이 있는데 결과로 나타난 나뭇잎은 큐티클이 제거 된 엽맥Leaf vein 만 남은 모습이었는데 그 실보다 가는 조직으로 깊은 땅속으로부터 뿌리를 통하여 수액이 흐르는 모습을 상상하면,

그 이미지와 무엇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다른 듯 닮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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