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칠레의 대표적인 시인이자 혁명가인 파블로 네루다(1904~1973년)의 시집 <모두의 노래>에 그리스 작곡가 마키스 테오도라키스(81)가 곡을 붙인 앨범이 시집과 같은 이름으로 최근 발매됐다. 독창·합창, 관현악이 얽혀드는 오라토리오 형식에 네루다의 시 12편과 그에게 바치는 레퀴엠 한편을 담은 것이다. 클래식과 월드뮤직이 어우러진 장엄한 선율이 훼손되기 전 아메리카 대륙의 아름다움, 강대국이 강요하는 질서에 대한 저항, 폭압적 현실과 그럼에도 삶의 에너지를 잃지 않는 서민들에 대한 애정을 실어나른다.
시가 지닌 생동감은 힘이 넘치는 소리로 증폭된다. 스톡홀름 오케스트라의 연주에 성 야곱 합창단, 보컬 마리아 파란두리와 페트로스 판디스의 목소리가 깊은 울림을 자아낸다. 이 앨범은 1981년 독일 뮌헨 올림픽 홀에서 테오도라키스의 지휘로 벌어진 연주회를 시디 2장에 모은 것이다.
오케스트라와 대규모 합창단이 소리를 넓고 두텁게 만든다면, 그 속을 흐르는 라틴아메리카와 그리스 전통 리듬의 절묘한 조합은 신선하게 귀를 사로잡는다. 두 지역의 전통 악기들이 애잔하면서도 유머 넘치게 끼어든다. “폭풍의 나무, 민중의 나무, 나뭇잎의 수액을 타고 오르듯 영웅들은 대지로부터 솟구쳐 오른다, 마침내 빵의 씨앗이 또다시 대지에 떨어진다”라고 노래하는 ‘해방자들’은 행진곡처럼 시작해 신바람 나는 춤곡 등으로 색깔을 바꿔가며 감정을 끌어올린다. 피아노와 퍼커션이 “여호와는 세계를 코카콜라, 아나콘다, 포드자동차 같은 회사들에게 쪼개주었다”라는 냉소적 노랫말을 장난스럽게 풀어낸다.
이 독특한 작품은 1970년 프랑스 파리에서 두 거장이 만나면서 시작됐다. 테오도라키스는 망명 중이었고 네루다는 외교관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1972년 칠레를 방문한 테오도라키스는 거리의 시민들이 네루다의 시에 멜로디를 붙여 부르는 걸 보고 작품을 구상했다.
1973년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초연된 이 작품의 연주를 정작 네루다는 보지 못했다. 칠레 공연은 군사쿠데타와 아옌데 정권의 몰락으로 무산됐다. 네루다도 10여일만에 자신이 지지했던 정권의 뒤를 이어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 곡은 칠레가 군사 독재의 긴 터널을 지난 뒤인 1993년에야 네루다의 조국에서 연주될 수 있었다.
이번 앨범에 담긴 음악과 시의 깊은 공감처럼 두 사람 삶의 자취도 닮은 데가 많다. ‘기차는 8시에 떠나네’ 등으로 한국에도 알려진 테오도라키스는 여러 민중가곡, 교향곡, 오페라를 남기며 지금은 그리스의 대표적인 작곡가로 추앙받지만 젊은 시절은 가시밭길의 연속이었다. 민주화를 위해 싸운 좌파 활동가였던 그는 잇단 구속과 고문을 겪은 뒤 추방당했다. 1974년 조국에 돌아온 그의 첫 순회연주회 레퍼토리에는 <모두의 노래>가 포함돼 있다.
1945년 상원의원이 된 네루다는 당시 대통령을 비판하는 ‘나는 고발한다’란 성명을 낸 뒤 쫓겨난다. 철저한 공산주의자였던 그는 1952년까지 아르헨티나, 프랑스, 옛 소련, 멕시코 등을 전전해야 했다. 그때 썼던 시를 모은 게 <모두의 노래>다. 월드뮤직 전문 음반기획제작사 알레스뮤직이 내놓은 이번 앨범의 속지에는 시집 <모두의 노래>가 한국에선 처음으로 완역돼 있다. 평전 <빠블로 네루다>를 번역한 김현균(서울대 서어서문학과 교수)씨와 우석균(서울대 언어교육원 연구원)씨가 노력한 결과물이다.
[한겨레 2006-01-19 18:39]글 김소민 기자 사진 알레스뮤직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