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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가 미안하다고 전해달랬어요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16년 4월
평점 :
이제 거진 여덟살이 된 엘사.
엘사는 늘 그리핀도르의 목도리를 두르고 종횡무진 동네를 다니다 잘못 쓴 철자를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나이보다는 성숙한(상당히 많이) 아이다. 부모님이 이혼한 후, 엄마와 엄마의 새 파트너와 함께 살고 있다. 이제 곧 동생도 태어날 예정이다.
하지만 엘사에게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비밀이 있다.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늘 상처가 나고, 옷이 찢어지지만 엘사는 넘어졌다고만 말할 뿐, 누구에게 맞았는지, 학교에서 무슨 일을 당했는지. 절대 엄마에게 말하지 않는다. 그냥 내가 참거나 피하면 된다고 생각하며 하루 하루를 보낸다.
그러나 단 한 사람. 엘사의 기분을 한 눈에 알아채는 사람이 있었다. 옆집에 사는 할머니다. 할머니는 엘사가 아무 말 안해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떤 상처를 입었는지 단번에 알아차렸고 할머니만의 방식으로 엘사를 위로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제일 아끼던 그리핀도르 목도리가 찢어져 화장실 변기에 쳐 박혔을때, 할머니는 한밤중에 엘사와 함께 동물원 담을 넘는다.나쁜 기억이 아닌 특별한 날로 기억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알면 알수록 괴짜 할머니지만, 결코 미워할 수 없다. 엘사는 그런 할머니가 세상에서 제일 좋다. 엄마보다 할머니가 더 좋다.
할머니가 기능장애가 있는 슈퍼 히어로라면 엄마는 기능이 아주 정상적인 슈퍼 히어로다. (34쪽)
지금은 우라지게라는 말을 달고 주변 사람들에게 민폐 끼지는 것이 일상이지만, 할머니는 보통의 할머니가 아니다. 젊어서는 외과의사로 세계를 누비며 수 많은 생명을 구했다. 그런 할머니의 모험담은 할머니와 함께 만든 이야기 나라인 깰락말락나라에 모두 담겨져 있다.
상상속의 나라지만, 그곳에서는 불가능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어느 날. 할머니가 암으로 세상을 떠나버렸다. 자신에게 단 한마디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엘사는 슬픔보다 더 큰 배신감을 느꼈다. 할머니와 함께 나누던 깰락말락나라 이야기도 이제 끝이 났다. 친구 하나 없는 엘사는 그렇게 혼자가 되버렸다.
하지만 할머니는 이미 다 알고 있었다. 할머니는 엘사가 혼자가 되도록 남겨둘 사람이 아니었다. 할머니는 엘사에게 자신이 지정한 누군가에게 편지를 전달하는 임무를 맡긴다. 그리고 마치 보물 찾기처럼 편지가 전달된 곳에서 다음 편지를 발견할 수 있는 단서를 남긴다.
그렇게 엘사는 편지 임무를 이어가며 할머니와 인연을 맺은 사람들을 만가게 된다.
할머니가 일찍 돌아가셔거 할머니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어서인지. 엘사와 할머니의 이야기가 너무 재미있다. 꾀짜 할머니와 그 할머니에게 한마디도 지지 않고 따박따박 대답하며 따라다니는 엘사도 너무 귀엽다. 나도 이런 기억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하면서 읽었다.
이야기를 읽으며 팀 버튼 감독의 영화 <빅 피쉬>가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할머니의 비밀이 밝혀지는 과정은 영화와는 사뭇 다르지만, 할머니의 모험담, 젊어서 맺은 인연들. 그리고 남겨진 소중한 추억들이 겹쳐지며, 책을 읽는 내내 마음이 아주 띠뜻했다.
아이들은 사랑으로 자란다. 이게 겨우 일곱살 밖에 되지 않은 손녀에게 손이 작아 제격이라며 담배말이를 시키는 할머니지만, 정말 멋진 할머니다. 평생 잊을 수 없는 소중한 추억과 인연을 손녀에게 남겨주었기 때문이다. 물론 편지를 배달하는 과정에서 엘사는 자신에게는 최고인 할머니가 엄마에게는 최악의 엄마였다는 것을 알고 실망하지만, 엄마를 위로할 만큼 어른스러운 모습을 보여준다.
세상에 완벽한 슈퍼 히어로는 없어요, 엄마. 괜찮아요.(509쪽)
엄마에게 괜찮다고 말하는 엘사가 얼마나 어른스러운지. 어른이 내가 살짝 부끄러워질 정도다.
주글 수바께 없어서 미안해. 주거서 미안해. 나이 머거서 미안해....(540쪽)
할머니가 엘사에게 남긴 편지의 내용이다.
아...이렇게나 가슴 찡하고 진심이 담긴 편지라니...맞춤법도 맞지 않는 이 한 문장에 담긴 의미는 천마디 말로도 대신 할 수 없는 할머니의 마음이 담겨져 있다. 가장 소중한 손녀를 위한 단 한줄의 편지. 세상에서 이보다 더 갚진 것이 더 있을까.
가슴 따뜻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다. 무엇보다 엘사는 이제 괜찮을 것이라는 안도감에 기분 좋게 마지막 장을 덮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