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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우화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12월
평점 :
신경숙작가의 소설 <엄마를 부탁해>와 <외딴방>을 감동깊게 읽었다.<엄마를 부탁해>를 읽으면서 어찌나 마음이 아프던지 속으로 울음을 꼭꼭 삼키며 읽었다.남에게 눈물을 잘 보이지 않는터라 책을 읽으면서도 누가볼까 무서워 차마 드러내놓고 울지 못했다.<외딴방>을 읽으면서는 나의 또 다른 모습을 보는 것 같아 놀랐다.신경숙작가가 걸어왔던 그 청춘의 시기를 필자도 좁은 땅덩어리 어딘가에서 걷고 있었다는 걸 책을 읽으면서 알았기때문이다.
그래서인지 <겨울우화>를 읽으면서 신경숙작가의 글다우면서도 글답지 않은 모습을 만나고선 많이 놀랐다.필자가 읽었던 두 권의 책은 장편소설이어서 쉽게 씌였고 가독성이 뛰어났다.그런데 단편인 <겨울우화>는 장편과는 다른 무게때문에 오히려 가독성이 떨어진다.그것은 11편의 단편이 저마다 상처를 가진 주인공들의 의식의 흐름을 많이 따르기 때문이다.문체는 장편보다 아름답기 그지없다.그녀는 아름답다못해 아린문장,극한의 멋을 담은 문장을 만들어낸다.문장이 아름다워 가독성이 떨어진다? 이것이 바로 <겨울우화>가 가진 매력이다!
11편의 단편은 모두 시간적 ,공간적 배경이 1980년대,시골이 주를 이룬다.그래서 1980년대를 지나온 세대는 공감하면서 읽을 수 있다.하지만 그부분이 20대에게는 현재와 유리된 공감하기 어려운 부분이 될 수 있다.단편에 등장하는 주인공들 또한 우리가 살아오면서 일상에서 만났던 각양각색의 상처를 가진 보통 사람들이다.80년대는 대학가에 학생운동이 한창이었다.<겨울우화>에서 혁수는 학생운동으로 감옥에 가게 되고,그의 애인 명혜와 어머니는 그 고통을 고스란히 떠안는다.<강물이 될 때까지>의 은섭은 전경으로 복무하면서 학생운동하는 후배를 끝까지 쫒아가 잡아서 패준것을 괴로워한다.
<밤길>에서는 유년기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이숙이 사회에 적응하지 못해 죽게 되고,기차에서 만난 젖이 안나오는 여자와 그녀의 아이에게 자신의 젖을 물리는 여자가 나온다.수녀가 된 명실은 친구인 화자에게 다르게 살고 싶다고 고백한다.<지붕>의 원희는 전쟁의 피해로 온전치 못한 '곰배팔이'에게 강간당한 상처로 장애를 안고 살아간다.<初經>에서는 학생운동하다 붙잡히는 오빠와 미쳐버린 언니가 등장한다.말기암을 선고받은<등대댁>,결혼의 희망이 사라지자 자살하는 <외딴방>의 희재언니까지 등장인물은 모두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인물이다.
여름 햇살은 폭죽처럼 터져 묵은 먼지가 앉은 유리창에서 반짝 튀었다.-p15
지친 운동장으로 잘게 부서지는 마른버짐 같은 햇살이 아니라,지친 모습으로 운동장을 바라보는 주름진 노인의 뺨에서 반짝이는 액체라는 것을-p22
그와 동료들이 햇살이 작살처럼 꽂히는 잔디밭 위에서 스크럼을 짜고 사박자의 구호를 외칠때,나는 화장실에서 최루가스에 매운 눈을 씻어내며 늪 속 같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p35
알 수 없는 내면 어디에서 어떤 힘이 자꾸 그녀 자신을 거울 앞에 세우곤 했다.그러나 아무리 들여다보아도,자신이 몸을 사리고 있던 그라는 껍질조차 툭 터져버린 그땐 어디에서도 그녀 자신이 보이지 않았다.p101
누구나 아픔하나쯤 안고 살아간다.누구나 겪을 수밖에 없는 시대적인 아픔,가정사.책을 읽으면서 '우리는 80년대를 이렇게 건너왔구나'에 생각이 미친다.이 작품이 신경숙작가의 대뷔작이라니 깜짝 놀랐다.그녀 나이 20대 후반에 이런 문장을 썼다는게 믿어지지 않는다.문장이 찾아올때 집으로 돌아간다던 그녀.신경숙 소설의 또 다른 매력은 문장에 있다.너무 고와서 곱씹어 읽게 하는 문장들.역설적이게도 필자는 이 문장에 턱 걸려 넘어지고 만다.아이러니.나무를 보느라 숲을 보지 못해 자주 흐름을 놓친다.
<겨울우화>를 읽으면서 한 권의 책이 자꾸 겹친다.미술에서 트롱프 뢰유라는 눈속임기법을 문학에 도입한 <잉글리쉬 페이션트>가 그것이다.<겨울우화>는 다빈치의 스푸마토처럼 그 경계가 흐릿하다.하나의 풍경을 만날때마다 화자의 기억은 또 다른 기억을 불러오는 구조다.그래서 몽환적인 느낌을 불러옴과 동시에 갑갑하다.자꾸 80년대로 돌아가는 화자의 기억이,소설에 동화같은 느낌을 불어넣는다.그러면서도 해피엔딩은 없다.다만 작가는 '너,아프구나~그래 많이 아프지~'어루만져주는 느낌이 들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