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기억의 곳간 가장 깊숙히 꽂혀있는 빛바랜 글은 27년 전 읽었던 법정스님의 <무소유>다.책이 귀한 시골에서 처음 접한 세로 글씨의 수필이기에 지금도 내 기억 속에서 책장은 술술 너머간다.글의 세세한 부분까지 모두 기억 할 수는 없지만,신기하게도 책의 내용이 통째로 내 머릿속에 들어있다.창호지바른 문,앉은뱅이 책상,몇 권의 책,등잔이었던가? 가난하지만 풍족한 살림살이.그 공간은 지금도 내가 꿈꾸는 자유의 공간이다.사춘기 때 나는, 사람이 행복한 자유를 누리는데 많은 것이 필요치 않다는 것을 <무소유>를 통해서 알았다.
과학을 너무 좋아한 나머지, 유치하다는 이유를 들이대며 동화를 싫어하는 아이가 올 해 중학생이 되었다.그래서 내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아이에게 과학이 아닌 다른 책들을 읽힐 방법을 궁리하다 찾아낸 책이 바로 <국어 교과서 작품읽기>다.아이들이 거부감을 갖지 않고 받아들이기에 구성이 아주 좋다.새로 바뀐 23종 중학교 1학년 국어 교과서에 실린 문학 작품 가운데, 전국 국어 교사들의 의견을 수렴해 아이들의 눈높에 맞는 작품 45편을 나와 가족,사회와 자연,여행기와 전기,고전 작품으로 나누어 묶었다.
엄마인 내가 중학교 다닐 때와는 딸아이의 교과서가 많이 달라졌다는 것을 실감했다.그래서 부모 세대는 의외의 작품들을 만나게 된다. 평발인 나는, 박지성선수가 평발이라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랐다.의사 장기려선생님의 이야기도 만나서 무척 반가웠고,2만권의 장서가 장석주 선생님의 글도 만나서 기뻤다.산악인 엄홍길님 도전에 대한 글,옛 조상들의 지혜를 만날 수 있는 글,세대간의 갈등을 다룬 글등.차려 놓은 상이 푸짐하다.
세태를 반영한 다문화가정의 이야기는 더불어 사는 것에 대해서 많이 생각해 보게 만들었다.여행기에서는 다른 문화에 대한 이해를 만날 수도 있었고,나눔의 지혜를 배울 수 있는 한비야님의 글도 감동적이었다.무엇보다 학생들의 글이 교과서에 실렸다는 것이 놀라웠다.<여행기>뒤에는 글을 읽고 아이들 스스로 생각하고 느낀 것을 글로 써 볼 수 있는 여백이 있다.아이들이 수필을 생활 속에서 느낄 수 있게 구성되었다.
수필은 붓 가는 대로 쓰는 글이라는 인식을 하게 되면서 부터 수필은 내게서 멀어져갔다.수필은 쉽다는 생각에 감히 수필을 얏잡아 본 것이다.그러다 된통 맞은 글이 있었으니 27년의 세월이 흐른 후에 만난 <하느님의 손도장>이다.그것은 수필을 쓰는데도 홈즈와 같은 관찰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했으며,수필에도 논리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만들었다.수필은 세월의 자태를 담아낸다는 것도 그 책을 통해서 알았다.그래서 이제는 수필보기를 수필같지 않게 대한다.수필은 그 어떤 글보다 과학적이고 정교한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