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비 딕
허먼 멜빌 지음, 김석희 옮김 / 작가정신 / 2011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바람이 불어가는 곳으로 가는 모비 딕‘
‘바람이 불어오는 곳으로 가는 선장 에이해브‘

끝없는 향해가 시작된다


다른 책과 겸해서 읽다보니 제법 오랜 시간을 걸쳐 넘기게 된 책이다. 거의 3주 가량 걸린 것 같다. 페이지수의 방대함도 있지만 ebook으로 틈틈히 읽으면서 자투리 시간을 제대로 활용한 책이다. 오가며 중간중간 읽는 책치곤 그 깊이가 제법 있는 책이라 틈틈히 몰입하게 되는 때에는 다른 걸 잊어 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차안에서 구절구절 생각하게 되는 책의 힘이 만만치 않아 무진 애를 쓰며 운전에 집중해야 될 때도 있었다. 그렇게 일상에서 끊임없이 생각하게 만드는 책이었다. 우울한 현실과 <모비 딕>의 비극적인 결말이 더 착찹하게 하는 시간이기도 했지만, 사는 것이 참 아이러니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워낙 훌륭한 고전이라 전문적인 서평도 많지만,
나에게 <모비 딕>과 작가 ‘하멀 멜빌‘은 바람같은 존재로 와닿았다. 올 여름은 유난히 아쉬움이 남는다.
지나가는 여름을 아쉬워하며 선뜻 다가온 가을을 맞이하는 시점, 그 시간의 무상함과 삶의 오묘함을 이 바람이 전해주는 이야기로 느낄 수 있다.
<모비 딕>은 나에게 그렇게 지나면서 한참 생각하게 만든다.

하멀 멜빌의 의식과 작품은 동시대를 사는 사람들에게는 이해받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49세 이후 세관원으로 일하다가 7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고 그의 이름은 문학사에 한 줄 정도 언급되는 정도였다고. 하지만 100년이 지나고 나서야 재평과 되어 극적인 부활을 하게 되었다. 지금은 미국이 낳은 가장 위대한 작가 중 한사람으로 세계 문학의 거장으로 이름을 남기고 있지만 살아 있을 때는 물론 죽어서도 오랫동안 관심조차 받지 못했던 인물이었던 것이다. 어찌 보면 사후에 그 가치를 인정 받은 대표적인 인물 고흐보다 더 비운의 인물이 아니었을까 (고흐는 그래도 10년 정도 후에 인정받은 게 비하면)그래서 한 시대를 살았던 삶이 그대로 녹아있는 예술과 문학은 한 순간에 끝나는 것이 아닌 영원하다고 말하는 것일수도..

너무나 유명한 고전이지만 진지하게 읽어 본 적 없는 고전 <모비 딕>

책의 첫 문장 ˝Call me Ishmael˝
˝내 이름을 이슈메일이라고 해두자.˝
(이 첫문장, 번역가의 문학적 번역의 고민은 책 뒷부분에 자세히 설명되어있다)
이야기는 이슈메일의 1인칭 시점으로 그가 직접 경험하고 목격한 회고록이다. (이슈메일은 작가가 만든 가상의 인물, 즉 자신이 아닐까)

당시 미국은 세계 포경산업의 중심이었다. 작가 하멀 멜빌도 한 때 포경선을 타고 고래를 잡기위해 바다를 떠돌았으며, 포경선을 탈출하여 당시 식인종이 산다는 미지의 땅에 도착해서 손님이 되었던 적도 있었다.
그래서 그는 ˝포경선은 지구에서 알려지지 않는 곳을 찾아내는 개척자˝라고 말한다. 그리고 고래잡이의 공적을 ˝포경선이야말로 오늘날 저렇게 강대해진 식민지 진정한 어머니˝라고 할 수 있다고 포경업을 변호한다.

˝충성스러운 영국인들이여 여러분의 왕과 여왕들의 대관식에 쓰는 기름을 공급하는 것은 우리들 고래잡이라는 것을 잊지 말지어다.˝

인물

이슈메일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물들 중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에이해브‘선장과 커피 숍의 이름으로 유명한 ‘스타벅‘(여기서 유래라고 함) 그리고 이슈메일의 친구가 된 퀴퀘그. 그는 식인종이라 불리는 원주민이자 이단아다.
이슈메일은 야만인이라고 생각했던 그에게서 예민한 감수성과 예의바른 모습을 발견한다. 그러면서 그에게 인간애를 느끼며 우정을 나누는 친구가 되어가는 과정은 당시 인종 차별과 식민지에 대한 제국주의 적인 관점을 초월한 작가 하멀 멜빌의 생각이 보인다.
어떠한 편견에도 사로잡히지 않는 객관성은 <모비 딕>을 읽는 내내 느낄 수 있다. 그 자신이 청교도의 개신교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종교의 융합과 평등을 말하고 있다. 작가의 초월함이 <모비 딕>이 고전으로 거듭날 수 있었던 이유인 것이다.
뭔가 우직한 퀴퀘그의 묘사는 그를 정감있는 인물로 느껴지게 했다.

그의 섬세한 관찰

이슈메일의 관찰은 포경선을 타러 가면서부터 시작된다. 그의 관찰은 좁은 포경선 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과 포경선의 최후까지 끊임없이 이어진다. 그러면서 아주 섬세하게 그의 관찰이 묘사된다. 당연 고래에 관한 이야기는 마치 백과전서 수준이며 다양한 고래들의 습성과 처음 들어본 고래 이름들은 생물 도감을 찾아 보는 듯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야기의 진행이 느리다 보니 지루할 수 있지만 개인적으로 욕심없이 틈틈히 읽다보니 꽤 흥미있는 시간이 되기도 했다.
방대한 고래의 지식은 고래에 대한 그의 사랑이 느껴지기도 했다. 인간의 무분별한 고래 잡이에 대한 생각도 함께 녹아 있었다.

˝우리는 모두 육지에서나 바다에서나 살해자다. 나폴레옹과 상어도 물론 여기에 포함된다.˝

좁은 포경선 위에 존재하는 서열에 대해서

˝영광은 덧 없고 인생은 어리석기 짝이 없구나!˝

바다의 돛대 망꾼과 육지의 돛대 망꾼을 결부시켜 이야기하는 부분은 작가가 세상을 바라보는 날카로움에 집중하게 만들었다. 세상의 영웅들이 오른 자리에서 내려다 보는 시선과 갑판 위에서 벌어지는 혼란스러움에 응답하지 않는 영웅들의 모습을 풍자했다.

이렇게 포경선은 망망대해에서 끝없는 향해를 이어나간다. 보통 포경선의 항해는 3년이나 4년이 걸리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이들의 배는 세상에서 떨어져 나온 채 그들이 목적한 오직 고래 하나만 집중한 채 바다위에 떠 있는 것이다.

에이해브 선장의 목적은 흰 고래 ‘모비 딕‘이다 .
그의 편집광적인 아집은 모비 딕에게 자신의 다리 한 짝을 잃어서 생긴 것만은 아니었다. 상처입은 육신은 영혼으로 흘러들었다. 그렇게 육신과 영혼의 상처가 겹쳐 ‘모비 딕‘에 대해 편집증으로 인한 광적인 집착을 보였다. 인간의 광기를 그대로 표현한 인물 에이해브 선장은 선원들을 선동한다. 결국 모비 딕에 대한 복수를 위한 항해에 선원들이 이용된 것이다.
여기서 작가는 질문한다.
이 항해의 위험성을 알고 유일하게 반대하는 ‘스타벅‘의 미덕과 상식은 절대 통하지 않는다. 선장의 분노에 열광적으로 응했던 선원들, 그들의 영혼은 과연 어떤 힘에 끌려 노인의 증오가 자신의 증오로 여기게 된 것일까?
이 의문에 대한 하멀 멜빌의 질문은 같은 공감을 불러 일으켰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일어나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오버랩되는 순간이었다.
아직도 누군가는 선동하고 누군가는 동원되고 있는 무지몽매한 현상들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모비 딕> 이 책에서의 고래에 대한 설명과 고래에 관련된 자료와 지식은 섬세하다. 그리고 고래잡이 포경선의 일상도 놓치지 않는다. 그 속에 있는 인물 하나하나도 놓치는 법이 없다. ‘고래 잡는 광경‘을 서술하기 이전 ‘포경 밧줄‘에 대한 설명도 마찬가지다.
‘포경 밧줄‘ 작살이 발사되어 복잡하게 엉키면 이는 치명적으로 그들을 휘감아 버린다. 그런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포경 보트의 광경에선 그래도 유쾌한 농담과 즐거운 웃음, 멋진 익살과 재치가 있었다. 상상할 수 없지만 그들은 포경 밧줄을 감은채 마치 ‘칼레 시민‘처럼 자랑스럽게 죽음으로 돌진하는 고귀함도 지녔다. 포경 밧줄에 묶여 있는 인간들, ˝모든 인간은 목에 밧줄을 두른 채 태어났다.˝ (p774)
인정하지 못하지만 늘 우리 주변에 존재하고 있는 위험들과 그것을 깨닫는 것은 삶이 갑자기 죽음으로 급선회 할 때 뿐이라고 말한다. 포경 밧줄에서 깨달은 삶의 성찰, 그는 이미 철학자였던 것이다.
포경선 위의 선원들은 하루하루가 덤으로 얻은 나날이었다. 죽음을 초월한 삶이란 즐거움 자체였고 고래 잡이들은 살아 남은 시간에서 얻어진 덤으로 얻은 시간의 연속 위에 얹혀진 삶이었다. 그들에게는 유언장이 주는 무거움도 찾아 볼 수 없다. 오히려 죽음 앞에서 더 냉정하고 침착해지는 자세는 그들에게는 일상이었다.

고래 해체 작업을 보면서 하멀 멜빌의 묘사는 너무 적나라해서 눈 앞에 붉게 물든 바다가 펼쳐질 지경이었다. 고래의 몸에서 제일 굵은 부위, 목이 없는 고래 몸에서 머리를 자르는 장면을 작가는 ˝ 그 속을 들여다 보지 못하고 땅 속을 더듬는 것처럼 암중모색할 수밖에 없다.˝ 고 한다. 서로 다치지 않고 교묘히 해체하는 과정은 경이롭기까지 하다고 말한다.

꼬리 찬양

향유 고래의 꼬리를 로마 성벽과 비유했다.
이 거대한 고래의 힘은 꼬리에 응축되어 있다. 고래의 관찰과 고래를 잡으려고 떠난 포경선 위에서 그는 고래의 위대함과 경건함을 깨닫게 된다. 아무리 알려고 해도 고래에 대해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한탄은 지금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에 대해 우리가 머리로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안다고 밝혀진 것 또한 그것이 진실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도 한 번 생각해 봐야 되지 않을까.
하멀 멜빌은 아는 것 같다. ‘진리‘라는 것에 대해 답을 찾기 힘들다는 것을 그래서 끝없이 이야기는 펼쳐진다.
방대한 책의 분량은 그의 호기심과 관찰이 순간순간을 놓치지 않았기에 가능했다. 고래를 잡고 사투를 벌이는 급박한 순간에도 놓치지 않고 쪼개고 쪼개어 섬세하게 설명하는 것에서 만들어 진 것이다. 책 속 이슈메일의 눈은 그 찰나의 순간에 펼쳐진 광경과 머리 속 자신의 생각마저 세심하게 쪼개어 시간을 늘린다. 긴박감에 책을 읽는 눈은 흥분해 간다. 하지만 차분하게 설명하는 주인공의 생각을 쫓아가다 보면 정말 바다 위에서 파도를 타고 떠 다니는 배 위처럼 울렁거려 멀미가 날 지경이었다. 하지만 혼란스러움이 아니다. 이것은 출렁임 속에서 느끼는 생동감과 그 속에서 찾은 이성적인 생각들의 출렁거림이었다. 책을 읽는 동안 나는 이 순간이 ‘살아 있는‘ 모든 감정을 동원한 기분을 만끽하기도 했다. 삶의 생동감을 체험하게 한 묘한 기운의 책, 이 책속에서 나는 또 현실에서 벌어지는 인간사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이 책을 진지하게 읽었다는 이유는 책 속의 어느 하나 나에게 놓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할 말도 기록할 말도 많은 것 같다.
향유 고래의 거대한 집단과 군집에 대해서 말하면서 학교와 교장을 비유로 내세웠다. 이 적절한 비유에 어찌 관심을 두지 않을 수가 있나 싶다.
이 이야기는 정말 재미난 단편 소설을 읽는 기분을 만끽할 수 있다. 직접 읽고 느껴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이다.

쌓기와 청소
이제 이야기는 고래 해체 작업이 끝나고 정리 작업에 들어간다.
항유 고래 잡이에서는 이 작업이 가장 놀랄 만한 작업일 것이라고 한다. 고래를 잡고 이 마무리 작업이 있기까지 아주 고된 시간은 필수다. 이 시간을 해치우고 맞이하는 짧은 시간, 그들에게는 세상 어디에도 없을 우아함과 깨끗함이 남는다. 그리고 말끔히 정리되어 한 켠에 차곡히 쌓여 있는 기름통과 함께 후련함이 남는다. 하지만 이런 진저리 나는 그 일을 처음부터 되풀이 해야 되는 운명은 시시포스의 운명처럼 죽을 맛이다. 하멀 멜빈은 이것이 바로 쳇바퀴 도는 인생이라고 말한다.

선장 에이해브에 관한 이야기는 책의 중간이 넘어서고 후반부에 달해서야 진지하게 다뤄진다. 에이해브의 다리에 관한 이야기와 거대한 흰 고래 ‘모비 딕‘과의 숙명적인 관계는 정말 미련하게 집착적이다. 책의 후반부에 그의 광적인 집착은 최고조로 폭발한다. 그의 이러한 행동은 망망대해 바다 한 가운데에서 의지할 것이라고는 나침반과 사분의 밖에 없는데, 그 사분의를 파괴하고 던져 버린다. 이제 나침반과 에이해브의 감각만 믿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온 것이다. 그런데 이때 나침반 마저 폭풍우에 손상을 입게 된다. 이 막막한 상황에서 일어나는 불안은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고 ‘에이해브‘는 이때 극적으로 나침반을 고치면서 선원들에게 그의 오만함을 증명했다.

˝경멸감과 승리감으로 불타는 에이해브의 두 눈에는 그의 파멸적인 오만함이 넘쳐 흐르고 있었다.˝

이미 운명이 정해진 ‘피쿼드 호‘는 불안함을 안고 비극으로 들어가기 시작한다.

‘바람이 불어 오는 것을 향하는 사람‘ 에이해브

18살 에이해브는 처음 고래를 잡는 경험을 하고 40년이 흐른 지금도 그는 고래를 잡고 있다. 그는 폭풍우 속에서 모든 고난과 위험을 겪으면서 40년을 살았던 것이다. 지상의 평온함을 버린 채 바다의 공포와 맞서 싸워왔다. 그렇게 고독을 몸에 지닌 채 살아야 했던 그의 삶은 오직 광기와 열광, 끓는 피와 땀 흘리는 삶이었던 것이다. 끊임없이 고래만을 쫓고 살았던 그의 삶은 ‘행복‘과는 거리가 먼 ‘어리석은‘ 삶이었다고 처음으로 이야기 한다. 포경선 위에서 유일하게 선장에게 반기를 들었던 스타벅의 눈을 보면서 그는 ‘인간의 눈‘을 느낀다고 말한다.
에이해브와 스타벅의 뜨거운 교감에서 오는 에이해브의 눈물 나는 그의 처절한 삶이 안타까워졌다. 스타벅도 마찬가지였다. 에이해브를 조금 이해하면서 그를 막으려 노력하는 애절함도 책에서 놓치기 싫은 감동이다.
에이해브는 알 수 없는 힘에 끌려 빠져 나올 수가 없는 지경이다. 불가사의한 힘은 모습도 없고 그 형체를 드러내지도 않는 기만적인 주인으로 잔인하고 무자비하게 에이해브를 자연스러운 사랑과 갈망에서 등지도록 강요했다.
인간이기보다 괴물로 변해버린 에이해브의 눈은 ‘스타벅‘의 눈에서 그의 아내와 아이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에이해브는 스타벅에게 모비 딕을 만나게 되더라도 보트를 내리지 말라고 한다.

˝나는 자네의 눈 속에서 머나먼 고향집을 보네. 그 고향집을 그런 위험에 빠뜨릴 수는 없지.˝

스타벅은 에이해브에게 지금도 늦지 않았다고 다시 돌아갈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운명의 장난은 얄궂게도 모비 딕이 눈 앞에 나타난다.

에이해브에게는 아무도 없었다. 인간도 신도 모두가 이웃이 아니라고 말한다. 세상에 ‘홀로‘ 서 있는 에이해브의 영혼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괴물로 변해야 했던 것이다. 그의 처절한 내면 속의 싸움에서 그는 알 수 없는 힘에 정복당한 채 노예가 되어 삶을 마감하게 된다. 이 비극적인 결말이 이야기의 첫 부분부터 끊임없이 암시되었다.
책의 끝 부분에야 만나는 흰 고래 ‘모비 딕‘과 세 번의 추적에서 보여준 에이해브의 비장함은 숭고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선장으로서의 역할은 절대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그의 신념 하나 때문에 선원 전원이 참사를 겪는 비극을 초래했으니 말이다. 결말이 주는 씁쓸함, 이 배가 어디로 갈지 알지만 그 운명을 거스를 수 없었던 그들의 운명이 저토록 무기력한 인간들의 모습에 지금의 모습이 보였다.
그가 믿었던 신념은 흰 고래 ‘모비 딕‘은 절대적인 악의 화신이었다. 그래서 영원히 그 악의 화신을 손수 물리쳐야 한다는 사명감에서였을까. 한 가지의 목적아래 아무것도 볼 수 없었던 에이해브 선장과 어리석게도 동원된 선원들의 최후는 비극이라는 결과를 남겼다. 그리고 에이해브는 모비 딕을 죽이려고 만든 작살이 모비 딕에 명중하자 그 밧줄에 자신이 죽임을 당한다. 그리고 이 흔적도 남지않고 모든 것이 파괴 된 바다위에서 살아 남은 한 명이 이슈메일이다. 그래서 그는 이 모든 것을 말해둬야 된다고 전한다.
여전히
흰 고래는 바람이 불어가는 곳을 향해 가고 있었다.
결국 선장은 죽어서야 고래가 가는 자연스러운 방향에 합류할 수 있었다. 그가 온 몸으로 부딪혀 바람이 불어오는 곳을 향했을 때 부딪힌 ‘모비 딕‘과 함께 말이다.
에이해브가 그렇게 쫓아 다녔던 모비 딕의 존재, 모비딕은 한 번도 에이해브를 의도적으로 헤치려하지 않았다. 모비 딕을 미친듯이 잡으려고 달려 온 선장 에이해브의 모습에서 무례하고 자아도취적인 인간의 우월감이 보인다. 누가 악이고 선인지 모를 그 기준은 또 누가 만든 것인지 생각해보게 된다.


˝새로운 항해가 준비되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위험하고 긴 항해가 끝나면, 두 번째 항해가 시작된다. 두 번째가 끝나면 세 번째가 시작되고, 그렇게 영원히 계속된다. 그렇게 끝없이 이어지는 것, 그것이 바로 견딜 수 없는 세상의 노고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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