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담, 실없이 놀리거나 장난으로 하는 말

살면서 가끔 농담이 주는 힘이 있다. 진담 못지 않게 힘을 주는 농담은 진지한 말보다 다양한 느낌으로 부담없이 다가와 거부감 없이 상대방에게 전달될 때가 있다. 이런 농담은 문제 해결의 다양한 방법중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농담은 분명 때와 장소를 가려야 되며 지나치면 오히려 독이 되어 화를 부른다는 치명적인 문제점을 안고있다.

책의 주인공 ‘루드비크‘의 농담은 진지하고 엄숙한 시대에서 먹히지 않을 농담이었다. 어처구니 없게도 젊은 시절 농담 한마디 잘못 했다가 ˝삶의 길 밖으로 내 던져진˝ 농담 같은 시절을 보내게 된다.

이 책의 저자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으로 유명한 ‘밀란 쿤테라‘의 초기 작품이다. 그의 작가적 천재성은 더이상의 말이 필요 없겠지만,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책 제목의 친숙함과 달리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막힘에, 그의 천재성을 내가 따라가지 못하던 때가 있던지라 책을 들고도 가볍지 않았다. 하지만 <농담>은 그의 처녀작이라 다행히 삶의 깊이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보다 심오하지 않아 내가 이해하는 점에선 괜찮았다. 그래서 조금 가볍게 즐기면서 책장을 넘길 수 있었다.

이야기는 ‘루드비크‘가 ‘제마네크‘에 대한 복수심에서 ‘헬레나‘를 만나기 위해 고향을 찾는 것에서 시작된다. 유부녀인 헬레나는 대학시절 ‘제마네크‘의 부인이다. 제마네크는 자신이 공산당원에서 축출되고 오스트라바의 광산으로 가게된 결정적 역할을 한 인물이다. 그래서 루드비크는 젊은 시절 자신의 삶이 그에 의해서 엉망이 되버렸다고 생각하였다.
그렇게 시작 된 헬레네의 이야기는 ‘농담같이‘ 헬레네의
삶에 비웃음을 던진다.

대학시절 루드비크의 어처구니 없는 ‘농담‘
어린 루드비크의 서투른 감정이 부른 ‘농담‘

˝낙관주의는 인류의 아편이다. 건전한 정신은 어리석음의 악취를 풍긴다. 트로츠키 만세 !˝

서툰 자신의 어린 감정에 표현하는 법을 몰랐던 ‘루드비크‘의 방식에서 나온 질투성 ‘농담‘은 그를 한순간에 불행의 시간으로 끌려가게 만든다. 당에서 축출되고 더이상 학업을 계속 할 수 없는 그는 고향으로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입대를 기다리지만, ‘검정표지‘ 탄광 바닥에서 노역을 하게 된다.

루드비크는 ˝자신의 삶이 길 밖으로 내 던져졌다˝고 생각하며 탄광에서의 삶을 부정하며 시간을 보내게 된다. 하지만 결국 자신이 처한 현실을 정확히 인지하게 되는 순간, 적응하며 그 시간도 익숙해져 간다. 그러면서 그동안 보이지 않던 주변 동료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루드비크는 삶의 태도가 조금씩 바뀌게 된다.

‘혼자‘라는 인물은 그곳에서의 ‘자유‘를 깨닫게 해준 사람이며 자신이 응석받이 어린애 같았던 모습을 직면하게 한 사람이다. 하지만 적응을 한다고 해도 ‘한계‘를 실감할 때는 처참한 미래와 운명이 공포스럽게 다가왔다. 그 시간에 만난 ‘루치에‘ 와의 운명은 그에게 또 다른 삶을 맛보게 한다.
그는 이제 현실에서 도망칠 수 있는 안식처인 그녀의 존재를 깨달으며 역사와 무관하게 자신의 문제에 집중하는 삶을 바라보면서 해방감을 찾았다.

반면에 탄광에서 벌어지는 모든 것에 대한 관심은 그를 분노하게 했다. 누군가의 맹목적인 믿음에 그곳에서의 잔인성에 대해 경험하며 점점 ‘삶의 깊이‘를 느끼게 된다.

˝삶은 아직 미완인 그들을, 그들이 다 만들어진 사람으로 행동하길 요구하는 완성된 세상 속에 턱 세워 놓는다. 역사 또한, 미숙한 이들에게 너무도 자주 놀이터가 되어주는 이 역사 또한 끔찍한 것이다.˝
(p151)

루드비크와 관계된 사람들 중 야로슬라프는 고향 친구이자 민속 음악을 같이 하던 친구였다. 그에겐 고향 같은 친구이다. 루드비크가 어느 순간 자신을 피하면서 원망하는 사이로 불편한 존재가 되어버린다. 하지만 루드비크가 ‘복수‘의 무의미를 깨달으며 그들 사이에 놓인 거리감은 무너지게 된다. 마지막으로 야로슬라프와 함께 민속 음악을 연주하게 된다.

이제 헤어진 그녀, 루치에를 다시 만나게 되지만 그녀는 이미 그를 잊었다. 그리고 그녀의 과거를 코스트카에게서 듣게 된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깨닫게 된다.
청년기 자아 중심주의에 빠져 그녀 존재 자체를 알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 내 삶의 이 구체적인 상황을 벗어나는 모든 것, 그 자체로서의 그녀 모습은 모두 간과되었던 것이다.˝

루드비크는 자신의 삶 또한 ‘엽서의 농담‘과 더불어 실수로 생겨난 일들 때문에 억울하고 부당했던 시간들을 아예 없던 것으로 만들 수는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복수 시기는 대학 그 시절, 그때였어야 했다는 복수의 무의미‘ 또한 알게 된다. 시간이 지날수록 모든 것이 변한다.

루드비크는 알게 된다.
자신들의 기본적인 가치를 박탈당했던 유린의 역사에서 루치에와 자신은 닮은 운명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가치들은 잘못이 없다. 유린된 세계에서 루드비크와 루치에는 불행도 이해하지 못했고 세상과 등지고 자신의 불행을 악화 시켰다. 서로를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에 비껴간 운명이었다.

책의 마지막의 ‘루드비크‘의 깨달음은 바닥 없는 심연 속으로 끝없이 미끄러져 들어가는 것, 그의 유일한 집은 무언가를 찾고 갈망하는 끊임없는 추락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게 자신을 내맡기며 클라리넷을 입에 문다. 고향 같은 친구와 함께 민속 음악을 연주하던 시절로 돌아간다. 청중은 더이상 의미가 없는 시간이다.

무언가의 정답을 찾은 것 같은 시간에서 그에게 던져진 삶은 또 최악의 ‘농담‘ 같은 현실로 다가온다. 제마네크에 대한 복수를 위해 귀향했지만 고향 같은 진정한 친구 야로슬라프를 두 팔에 안고 슬프하는 운명을 맞이한다. 루드비크 두 팔에 무겁게 느껴지는 친구의 무게가 자신의 확실치 않는 죄를 짊어지고 있는 것처럼 거대하게 느껴졌다.

현실의 부당함과 억울함에 세상을 원망하는 사람들 이 있다. ‘농담‘ 같은 삶이 때론 농담처럼 지나가길 원한다. 나에게 주어진 삶이 진지하게 다가오는 것을 나는 불편해 한다. 그래서 회피하고 도망가고 결국엔 자신의 처지에 대해 억울함을 호소하고, 세상을 향해 투정을 부린다. 내 탓이 아닌 남탓으로 책임회피는 세상에서 제일 간단한 문제 해결법 중의 하나다.
내가 내 삶을 ‘농담‘처럼 두리뭉실 넘기려고 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하는 책이다. 그리고 삶이 결코 가볍지 않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농담‘의 주인공 ‘루드비크‘는
최인훈의 <광장>에 나오는 명준을 떠오르게 했다.
명준과 루드비크가 살았던 이데올로기적 역사 속 삶에서 유린된 시간들, 그들의 사랑에서 찾은 자유와 해방감은 비슷한 맥락이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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