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신세계
올더스 헉슬리 지음, 안정효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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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신세계>

우리가 지향하는 이상적인 사회 유토피아는 과연 존재 하는가? 라는 의문을 던지는 책이다.
행복이라는 단어, 막연한 의미 또한 질문을 던진다.
한편의 SF영화를 보듯이 선명한 묘사와 지적 묘사는 책장을 넘길수록 몰입도가 더해졌다. 강렬하게 다가온 과학의 불편함은 책을 덮고도 잠시 멍하니 앉게 만들었다.

올더스 헉슬리가 말하는 ‘멋진 신세계‘는 한 마디로 공포다.
모든 것이 안정된 사회, 고통도 없다. 괴로움과 고통은 ‘소마‘라는 약물에 의해 통제된다. 약물로 자신을 누르면서 환각이 주는 거짓 환상에 빠져 행복이라 느끼는 사회다. 무엇보다 자연의 순리를 따르지 않는다. 자연적 노화도 없다. 매끄러운 젊음을 유지하면서 살다가 그저 죽음을 맞이한다. 지나치게 쉽고 지나치게 편한 유아 상태 삶이 있는 문명 세계인 것이다.

신세계 문명세계에는 뭐든 새로운 것만 원하고 아름다운 것을 이해하고 논하지 않는다.
사회 안정을 위한 주요 수단인 보카노프스키 과정을 거쳐 대량의 인력을 생산한다.
커다란 공장 속 투명한 병속에서 부화되는 신세계의 문명인들은 헨리 포드가 이룩한 혁명적 성과의 컨베이어 대량화 시스템 위에서 만들어진다.

‘‘표준형 감마들과 다양성이 없는 델타들과 획일화한 엡실론들에 의해서 해결이 된다. 수백만 명에 달하는 일란성 쌍둥이들. 대량 생산의 원칙이 마침내 생물학에도 적용된 것이다.‘‘(p36)

‘‘결정된 인력‘‘
문명 세계 사람들은 주어진 숙명적 계급과 직업에서 불만도 없고 심지에 자신의 해야 할 일에 대해 사랑한다. 욕심도 더한 욕망도 사라진 세계 ‘불안 없는 안정한 사회‘는 더할나위 없는 행복한 세계다.
개인은 누군가를 위해서 존재한다.
여기서 누군가를 위한다는 것은 자발적 개인의 희생이 아니라 숙명처럼 주어진 사회적 계급이다.
자신의 신분에 대한 의심도 가져보지 못한다.
주체적으로 존재하는 개인은 있을 수 없다.
책 속의 말을 빌리자면 ‘잘 길들인 착한 동물‘인 것이다. 이러한 문명 세계인 신세계는 진정한 ‘자유‘도 사람의 마음을 울리는 문학 작품도 이해할 수 없다.

‘‘사회의 강을 이루는 물방울처럼 하나로 만드소서‘‘
(p138)

아주 커다란 공장을 위한 필요한 부품이 되버린 인간들, 사회라는 집단을 이루는 구성원이 상품이 되버린
문명세계는 아주 절제된 과학기술로 인해 안정화를 이룬다. 가정의 의미가 추악함의 극으로 묘사되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금지어가 되었다. 최면 학습에 의해 주입된 생각들은 의심없이 진리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절대 진리는 없다는 것이다.

그들이 말하는 야만인이 사는 보호구역의 삶과 문명 세계를 사는 문명인의 삶.
전혀 다른 세상과 너무나 다른 삶의 방식에서 서로가 적응한다는 것은 상상불가한 일이다.
거대한 공장을 돌리기 위한 부속품으로 서로 정해진 규칙과 질서가 무너지는 일만 없으면 지속적 안정과 평화를 누릴 수 있는 사회.
불안정하고 예측불가능한, 끊임없이 직면하게 되는 고통 속에서 답을 찾아야 되고 어른이 되어가는 야만인이 사는 보호구역의 사회.

어느 쪽이 옳은지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은 이미 우리가 놓인 현실 속에서 끝없는 딜레마에 빠지게 한다.
책 속의 신세계가 멋진 신세계는 아니었지만 그 세계를 닮은 세상을 사는 현실에서 마냥 부정만 할 수 있는 입장도 아니다. 그리고 더욱이 보호구역의 고통이 즐비한 세상, 그 고통이 도사리는 곳에서 조금씩 성장하는 삶이 개인적 삶에 있어 더 성숙한 삶이 될지라도 지금 누리는 온갖 편의성과 진보된 기술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과학 기술이 자연의 순리에서 역행하는 길을 접어든지는 이미 오래 전이다. 그 부작용으로 인해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음에도 제대로 인지하고 각성하는 이가 과연 얼마나 될까? 그리고 각성하고도 실천까지, 행동으로 옮기는 이는? 나 조차도 부끄럽지만 행동으로 옮기는 것들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단지, 노력만할뿐이다.

한병철의 <아름다움의 구원>에서 현대 사회가
‘‘청결과 위생에 사로잡혀 부정성을 모두 역겨움으로 느끼는 긍정 사회‘‘ 이며
이러한 위생 강제가 다른 영역들까지 번지고 있다고 비판했다.

‘‘지식은 흔히 일정한 저항을 극복해야만 쟁취할 수 있고, 이런점에서 지식에는 부정성 또한 내재한다.‘‘
(아름다움의 구원 중에서,p23)

멋진 신세계의 문명 세계는 모든 부정성을 역겨움으로 여기게 만드는 체면학습으로 안정화를 이룬 사회다. 내재된 모든 부정성을 거부한 사회는 진정한 사랑도 존재할 수 없다. 슬픔과 고통이 없는 사회는 살아있을 수 없다. 그저 허상에 불과 할 것이다.

어떤 사회이든 완벽함이란 없다.
책 속 신세계 문명 세계에서도 보이지 않는 꿈틀거림이 있었다.
알파이지만 신체적 결함으로 의식적으로 더 애썼던 버나드 마르크스는 모두가 안정적이고 행복한 사회에서 쉽게 동화될 수 없었다. 그와는 다르지만 탁월한 능력으로 섞일 수 없던 헬름홀츠, 두 남자의 공통점은 그들이 친구가 되는 계기를 만든다.
그들의 사회에서 외톨이로 혼자일 수밖에 없던 그들은 끊임없이 뭔가에 대해서 갈망하게 된다.
신세계에서 모두가 당연히 받아들이는 소마가 주는 안정을 이들은 불쾌했다. 소마가 인위적으로 만드는 주입식 행복이 아니라 자신만의 방식으로 행복감을 누리고 싶었다.

‘‘내가 내면에 지녔다고 느끼는 어떤 힘, 그런 잠재적인 잉여분의 힘을 스스로 사용하게 된 느낌이에요.‘‘
(p278)

곤경에 처한 현실에서도 그들이 행복감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주체적인 생각과 자유가 가져다준 결과였기 때문이다. 길들여진 생각과 그들이 누린 자유가 진정한 것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그들의 주체적 삶은 많은 대가를 치뤄서 만들어진 것이고 앞으로 닥칠 그들의 삶에서도 어떤 시련과 고난이 닥칠지 모른다. 하지만 그들의 선택에 있어 그들은 책임질 의무가 있지만 그 선택이 그들에게 행운이 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인간은 무엇인가를 얻으려면 필연적으로 대가를 치뤄야 해, 행복은 대가를 치뤄야만 성취할 수 있다고.‘‘
(p345)

이 책을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글귀일 것 같다.

결국 책의 마지막은 씁쓸함을 남겼다.
보호구역에서 문명 세계로 온 존,
그의 선택과 결말...

마지막으로 다음엔
책속에 등장하는 인물들 이름도 나름 의미있게 분석해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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