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쿠터가 닿는 길들은 다 옛날로 이어져 있고, 거기엔 아직 내가 너무 많다. 담벼락에 기대 서 있고, 양손에 비닐봉지를 들고 슈퍼에서 나오고, 술 취한 채 비틀거리고, 나를 향해 미소 지으며 오다가, 더 오지 못한다. 시간이 멈춘 풍경에는 그 풍경에 갇혀 버린 사람이 보인다. 투명한 유리막 속에서 순간이 영원인 줄 아는, 한때 나였으나 이젠 내가 아닌 수많은 내가 길 위에 있다. 노래 가사처럼 이러다 그녈 만나게 될까 봐 두렵지는 않지만, 헬멧을 쓴 채 치킨을 들고 아파트 계단을 오르는 내 모습이 부끄럽지도 않지만, 나는 저기 골목 모퉁이에서 지난날의 우리를 맞닥뜨릴까 봐, 그때의 행복한 우리를 만나게 될까 봐, 내가 망쳐서 오래전에 끝나 버린 우리가 나를 원망스레 노려보고 있을까 봐 두렵다.
- 치킨런 - P145
안양월드사우나를 지나 안양예고 앞 할아버지장작구이로 가는 길, 언덕길에 이미 오래전에 폐업한 ‘짱비디오대여점‘이 있다. 담쟁이덩굴에 뒤덮인 폐건물을 볼 때면 지난날들이 떠오른다. 낙후와 망각과 소멸의 풍경이지만, 나는 그때 이 비디오 가게 앞을 지나던 우리를 아직 기억한다. 힘차게 스쿠터를 몬다. 자, 오늘은 장작구이 치킨런! 아무리 스로틀을 세게 당겨도 2006년식 낡은 스쿠터는 빨리 달릴 수 없다. 시간이 나를 앞지를 수 없도록, 스쿠터는 나를 싣고 자꾸 옛날로 간다.
- 치킨런 - P146
"매일매일 반복되는 삶 속에 보람을 찾아요. 채수를 끓여 놓고, 설거지에 양배추채에 밥에 수프에 할 일이 많아요. 새로움이 없어요. 다양함이 없어요. 퇴근해서 똑같이 고기를 두드리고, 은지원은 소파에서 잠을 자지요." 이수근이 무표정한 얼굴로 흥얼거린 자작곡에 (강식당)의 모든 애환이 담겼다. 그렇게 고생해서 10만 7천 7백 원의 수익을 냈다. 다섯 명이 나누면 2만 원이 조금 넘는 돈, ‘강호동가스‘ 한 그릇도 못 사 먹는다. 자영업의 현실이다. 우리 삶도 비슷하다. 출근하면 퇴근하고, 잠들면 눈뜨고, 새벽에 잠깐 깨 시계를 보면 아직 한두 시간 더 잘수 있다는 데 안도하고, 다시 출근해서 퇴근하고, 어제와 오늘과 내일이 똑같은 삶을 최선 다해 살아내도 남는 것은 별로 없다. 손해나 보지 않으면, 빚이나 지지 않으면 다행이다. 물론 열심히 살다 보면 땀의 대가를 얻고 때로는 생각지도 못한 행운이 생기기도 하지만 대체로 행운보다는 불운이, 정직한 보상보다는 억울한 일이 빈번하다.
- 순수익 늘어나는 세상 - P161
<강식당>은 불과 닷새지만 우리는 365일, 십수 년, 길게는 평생이다. 제주도의 자연 속에서 마음 맞는 이들끼리 농담하고 장난도 치며 일하지만, 우리는 미세먼지와 빌딩숲 속에서 꼴도 보기 싫은 사람에게 혼나고 욕먹는다. 안 웃긴데 애써 웃고, 억지로 술 마시고, 생판 모르는 남에게 머리 숙이고, 아쉬운 소리하고, 통사정을 한다. 그 하루들이 쌓여 어느새 나이를 먹고, 젊은 날은 멀리 떠나고, 취향과 건강과 여가를 잃어버리고, 결국 다시 오늘, 당장의 삶만 남는다.
- 순수익 늘어나는 세상 - P162
새해를 맞은 엄마의 메신저 프로필 문구는 "아프지말고 건강하자" 다. 그저 삶이 계속된다는 것만으로도, 일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하는 사람들과 살고 있다. 이렇게 소박하고 욕심 없는데, 세상도 좀 푸근하고 넉넉해지면 안 될까.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좀 더 욕심내도되는 세상, ‘건강‘과 ‘행복‘도 좋지만 더 크고 많은 것들을 원해도 되는 세상, 다는 아니더라도 몇 가지쯤은 반드시 이뤄져서 노력마다, 눈물마다 순수익이 늘어나는 세상이 될 수는 없을까.
- 순수익 늘어나는 세상 - P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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