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저 먼 우크라이나 키예프에는 하루아침에 모든 걸 잃은 사람들이 있어요. 아직 잃지 않은 목숨마저 던져 지켜야 할 게 있다고 하네요. 누구나 자기만의 전쟁을 치르겠지만, 그들에 비하면 제 전쟁은 놀이터의 땅따먹기 수준일 겁니다. "가난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가난뱅이야. 나는 가난을 두려워하지 않아."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영혼의 자서전』에 스무 살의 제가 밑줄 그은 대목이에요. 걱정할 걸 걱정하자고 마음을 고칩니다. 나는, 우리들은 없어지지 않았으니까요.

- 작가의 말
기죽지 않는 유쾌함이 전해지면 좋겠습니다 - P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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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번역가를 꿈꾸는 것을 안 마스터는 경력도 제대로 묻지 않고 일본의 출판사를 소개해주었다. 처음에는 하청을 받아서 일했지만, 내 번역이 마음에 든 편집자가 종종 번역 일을 의뢰하게 됐다.
한번은 편집자에게 번역하고 싶은 책이 있다고 과감히 제안했다. 의외로 일은 순조롭게 진행되어 지난달, 내가 번역한 호주의 동화책이 일본에서 출판됐다. "힘든 시절이길었지만, 이곳에 와서 급전개를 하네." 하고 마크는 말했다. 하지만 그건 아닌지도 모른다. 힘들었던 게 아니라 내가 번역가가 되기 위해서는 이만큼의 시간과 경험이 꼭 필요했을 것이다.

- 당신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 P154

그가 ‘마스터‘라고 불리는 걸 좋아하는 이유를 어렴풋이알 것 같았다. 누군가를 위해, 무언가를 위해 그는 기점이 되어 사람을 움직인다. 마스터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세상을 비춰보지 못한 빛이 많았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많건 적건 누구나가 누군가에게 그런 존재일지도 모른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는 누군가의 인생에 한자리 잡고 있다.

- 당신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 P159

우리는 1초 앞도 모르는 채 살고 있다. 자기 의지만으로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대항할 수 없는 것도 맞은편에서 찾아온다. 그럴 때 끝없이 부푸는 불안은 우리에게 무서운 시나리오를 쓰게 한다. 자기가 만든 스토리인데, 마치 누군가가 떠맡긴 미래처럼, 그리고 그것이 이미 정해진것처럼 우리는 위협받고 있다. 하지만 사실 그런 것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 여기에 확실히 있는 것은 호흡하는 나, 웃고 있는 마코, 피어 있는 벚꽃.

- 삼색기의 약속 - P174

"늘 앉으시는 자리 말입니다. 좋아하는 자리에 앉는 것만으로 힘이 날 때도 있잖아요."


좋아하는 장소에 있는 것, 그것이 힘을 준다. 정말로 그렇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다면 메리도 마음 편한 곳에서 보내는 것이 무엇보다 치료가 될 거라고 나는 그제야 깨달았습니다. 나도 아무런 경험도 추억도 없는 고급 레스토랑보다 이 가게에 있을 때 훨씬 행복한 기분이 들거든요.

- 러브레터 - P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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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쿠터가 닿는 길들은 다 옛날로 이어져 있고, 거기엔 아직 내가 너무 많다. 담벼락에 기대 서 있고, 양손에 비닐봉지를 들고 슈퍼에서 나오고, 술 취한 채 비틀거리고, 나를 향해 미소 지으며 오다가, 더 오지 못한다. 시간이 멈춘 풍경에는 그 풍경에 갇혀 버린 사람이 보인다. 투명한 유리막 속에서 순간이 영원인 줄 아는, 한때 나였으나 이젠 내가 아닌 수많은 내가 길 위에 있다.
노래 가사처럼 이러다 그녈 만나게 될까 봐 두렵지는 않지만, 헬멧을 쓴 채 치킨을 들고 아파트 계단을 오르는 내 모습이 부끄럽지도 않지만, 나는 저기 골목 모퉁이에서 지난날의 우리를 맞닥뜨릴까 봐, 그때의 행복한 우리를 만나게 될까 봐, 내가 망쳐서 오래전에 끝나 버린 우리가 나를 원망스레 노려보고 있을까 봐 두렵다.

- 치킨런 - P145

안양월드사우나를 지나 안양예고 앞 할아버지장작구이로 가는 길, 언덕길에 이미 오래전에 폐업한 ‘짱비디오대여점‘이 있다. 담쟁이덩굴에 뒤덮인 폐건물을 볼 때면 지난날들이 떠오른다. 낙후와 망각과 소멸의 풍경이지만, 나는 그때 이 비디오 가게 앞을 지나던 우리를 아직 기억한다.
힘차게 스쿠터를 몬다. 자, 오늘은 장작구이 치킨런! 아무리 스로틀을 세게 당겨도 2006년식 낡은 스쿠터는 빨리 달릴 수 없다. 시간이 나를 앞지를 수 없도록, 스쿠터는 나를 싣고 자꾸 옛날로 간다.

- 치킨런 - P146

"매일매일 반복되는 삶 속에 보람을 찾아요. 채수를 끓여 놓고, 설거지에 양배추채에 밥에 수프에 할 일이 많아요. 새로움이 없어요. 다양함이 없어요. 퇴근해서 똑같이 고기를 두드리고, 은지원은 소파에서 잠을 자지요." 이수근이 무표정한 얼굴로 흥얼거린 자작곡에 (강식당)의 모든 애환이 담겼다. 그렇게 고생해서 10만 7천 7백 원의 수익을 냈다. 다섯 명이 나누면 2만 원이 조금 넘는 돈, ‘강호동가스‘ 한 그릇도 못 사 먹는다. 자영업의 현실이다.
우리 삶도 비슷하다. 출근하면 퇴근하고, 잠들면 눈뜨고, 새벽에 잠깐 깨 시계를 보면 아직 한두 시간 더 잘수 있다는 데 안도하고, 다시 출근해서 퇴근하고, 어제와 오늘과 내일이 똑같은 삶을 최선 다해 살아내도 남는 것은 별로 없다. 손해나 보지 않으면, 빚이나 지지 않으면 다행이다. 물론 열심히 살다 보면 땀의 대가를 얻고 때로는 생각지도 못한 행운이 생기기도 하지만 대체로 행운보다는 불운이, 정직한 보상보다는 억울한 일이 빈번하다.

- 순수익 늘어나는 세상 - P161

<강식당>은 불과 닷새지만 우리는 365일, 십수 년, 길게는 평생이다. 제주도의 자연 속에서 마음 맞는 이들끼리 농담하고 장난도 치며 일하지만, 우리는 미세먼지와 빌딩숲 속에서 꼴도 보기 싫은 사람에게 혼나고 욕먹는다. 안 웃긴데 애써 웃고, 억지로 술 마시고, 생판 모르는 남에게 머리 숙이고, 아쉬운 소리하고, 통사정을 한다. 그 하루들이 쌓여 어느새 나이를 먹고, 젊은 날은 멀리 떠나고, 취향과 건강과 여가를 잃어버리고, 결국 다시 오늘,
당장의 삶만 남는다.

- 순수익 늘어나는 세상 - P162

새해를 맞은 엄마의 메신저 프로필 문구는 "아프지말고 건강하자" 다. 그저 삶이 계속된다는 것만으로도, 일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하는 사람들과 살고 있다. 이렇게 소박하고 욕심 없는데, 세상도 좀 푸근하고 넉넉해지면 안 될까.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좀 더 욕심내도되는 세상, ‘건강‘과 ‘행복‘도 좋지만 더 크고 많은 것들을 원해도 되는 세상, 다는 아니더라도 몇 가지쯤은 반드시 이뤄져서 노력마다, 눈물마다 순수익이 늘어나는 세상이 될 수는 없을까.

- 순수익 늘어나는 세상 - P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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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사 학위까지 받아놓고 배달 일을 하는 나 자신이 시간 강의로는 도저히 먹고 살 수 없는 인문학 전공자의 삶이, 이런 구조를 만든 대학과 사회가 환멸스러울 때도 있다. 그러나 그런 우울감이나 분노, 자기연민이 들려 할 때마다 ‘이 일은 내가 나를 위해서 하는 일‘이라고 생각을 고친다. 배달 라이더는 내가 ‘나‘를 지키기위해, ‘나‘를 유지하기 위해 선택한 일이다.
글쓰기와 대학 강의가 본업이지만, 본업 못지않게 중요한 게 취미와 여가생활이다. 나는 낚시와 여행을 즐긴다. 글쓰기가 답답할 때 탁 트인 자연으로 가 맑은 숨을 영혼에 담아 오면 막혔던 글이 트인다. 강의하고, 학생들 과제 피드백해 주고, 시험 문제 출제하고, 성적 입력하고, 다음 학기 강의 준비를 반복하는 강사 생활은 사람을 피폐하게 하는데, 가끔씩이라도 거기서 벗어나야 내가 산다. 낚시나 여행으로 스트레스를 풀어야 학생들에게 더 좋은 수업을 제공할 수 있다. 사람은 일만 하며 살 수 없다. 특히 나 같은 쾌락주의자, 호모 루덴스는 더욱 그렇다.

- 배달하는 마음 - P51

하지만 내가 사랑하는 것들의 총합이 ‘나‘라면, 나는 내 취향과 개성을, ‘나‘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배달은 구속이나 제약이 덜한 일이라서 글쓰기, 그리고 강의와 병행할 수 있다. 나는 돈 벌면서 취미도 즐기고, 문학도,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도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게 내가 배달 라이더를 하는 이유다.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다른 일을 하면 되지 않느냐고, 하고 많은 일들 중에 왜 하필 배달이냐고 묻는 사람도있다. 나는 그에게 이렇게 답한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아서"라고. 배달 라이더는 내가 잃어버린 삶의 단순함을 회복시켜 줬다. 이 일에 좀 더 근사한 의미를 부여하자면 나는 ‘단순함의 미학‘이라 말하고 싶다.
스쿠터를 타고 달리는 동안에는 정말 아무 생각도 안 든다. 식당에 가 음식을 받아서 배달 장소로 갖다주는 단순노동의 반복이다. 시와 문학평론을 쓰고, 여러 매체에 산문을 연재하는 문장 노동자의 생활, 학사 일정과 강의 계획에 파묻혀 지내는 강의 노동자의 생활, 이 두 협소한 활자의 세계, 지식의 세계는 숨 막힐 듯 답답하고 복잡하고 추상적이고 관념적이다. 반면 배달 라이더의 세계는 단순하고 간단하고 명료하다.

- 배달하는 마음 - P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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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가 나랑 진지하게 얘기 중이었는데 전화가 오니까 나가서요. 살짝 화가 나서."
내가 애써 변명하자, 웨이터는 주전자를 기울이며 미소지었다.
"하지만 저희 입장에서는 다른 손님 생각해서 가게를 나가주시는 매너 좋으신 분 같습니다."
허를 찔렸다. 내가 비상식이라고 생각한 것이 다른 각도에서 보면 상식적인 일이기도 한 건가.

- 성자의 직진 - P67

"즐거운 색이니까. 빨간색만큼 자기주장이 강하지 않고 노란색만큼 기발하지 않고, 사람을 밝게 맞이해주고 건강하고 유쾌한 기분이 들게 해주니까."

- 랄프 씨의 가장 좋은 하루 - P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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